제25화
27일째.
비가 그쳤다. 예상 못 한 비라 탐사가 어려웠다. 예정보다 빨리 야영지를 꾸렸다.
체건의 부상이 심각하다. 치료를 했으나 예후가 좋지 않다. 이틀 더 상황을 지켜본 후 결정할 것이다. 계속 같이할지, 후송할지.
28일째.
팀원 셋이 배탈이 났다. 식수가 원인인 것 같다. 점검해도 이런 문제는 어쩔 수 없다.
연구실에서 받아 온 약을 지급했다. 로인스, 엑서의 설사는 멈췄지만 셀의 복통은 더욱 심해졌다.
이동을 멈추고 하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일지를 쓰는 동안에도 셀이 숲으로 향한다. 저러다 독충에게 물리면 큰일 날 텐데.
30일째.
체건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듣지 않았다. 강제성 없는 명령의 한계였다. 목숨을 내놓고 온 놈들이니 당연한 걸까.
내가 체건이었어도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죽을 거면 미개척지 안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본 다음에 죽고 싶다.
32일째.
셀이 죽었다. 새벽에 심한 복통을 호소하다가 그대로 사망했다. 머리카락을 잘라 유서와 함께 보관했다. 시신은 평소 말하던 대로 나무 위에 걸어놓았다.
이름 모를 새가 날아와 셀을 쪼았다. 멜이 돌을 던져 쫓으려는 걸 막았다.
45일째.
표본을 확보했다. 안전 길목도 찾아냈다. 열흘간 재검토를 해봐야겠지만 느낌이 괜찮다.
57일째.
이름 없는 미개척지에 새로운 이름이 생길 것이다. 셀이 제안한 이름을 회의에 내봐야겠다.
윗놈들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지만.
58일째.
오크족 주술사를 만났다. 듣던 대로 기이한 자였다. 대체 몇 년을 살아온 걸까? 수십, 어쩌면 수백.
팀원들이 달라붙어 질문을 퍼부었다. 주술사는 소문과 달리 팀원들과 쉽게 어우러졌다. 대답도 곧잘 해줬다.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 알려달라는 체건의 부탁을 주술사가 거절했다.
정확한 미래를 알려주는 건 예상 못 한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 주술사가 함구한 이유였다.
설명하는 주술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어 확실하게 본 건 아니지만, 느낌이 그랬다.
주술사는 어떤 일을 겪은 걸까. 궁금했으나 질문하진 않았다. 들춰선 안 될 것 같았다.
신비로운 초록색 눈동자.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60일째.
주술사가 떠나갔다.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말이 왜 예언처럼 느껴질까.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개인적인 질문을 해볼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대륙을 누비고 다니는 주술사를 두 번이나 만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제국 황제도 뜻대로 못 만나는 게 오크족 주술사다. 우연은 한 번일 뿐. 그 한 번에 감사하자.
체건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주술사의 선물이었을까. 물어볼 당사자가 없으니 누구도 알 수 없다.
* * *
“가하란.”
밖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가하란은 기록지를 덮었다. 핀들론이 남긴 선물. 서랍에 소중히 보관하고 가방을 챙겼다.
집 밖으로 나오니 루카가 있었다. 옆에 있는 덩치 큰 말이 콧김을 내뿜었다.
“준비된 것 같구나.”
“네.”
대답하며 맞은편 집을 보았다. 당장에라도 할아버지가 마중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닫힌 문이 열리며 타챠가 걸어 나왔다.
“잠깐만요.”
루카에게 말하고 타챠에게 뛰어갔다. 깃대를 챙겨 나오는 타챠의 모습에서 이별을 직감했다.
“아저씨.”
타챠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가는 거예요?”
“그래. 정리가 끝났으니 다시 떠나려 한다.”
타챠가 집을 돌아봤다. 가하란은 그 시선을 따라 집 텃밭에 눈길을 주었다.
“핀들론이 네게 남긴 일지는 다 봤냐?”
“아직 다 못 읽었어요.”
“천천히 읽어라. 한 인간의 모든 걸 담은 기록이니 금방 읽을 수도 없겠지만.”
타챠가 몸을 돌렸다.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두꺼운 발을 가볍게 움직였다.
“아저씨.”
“왜?”
“아저씨는 알고 계셨나요?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온 거고.”
가하란은 가방끈을 꽉 쥐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정령 세계로 넘어가 이틀간 기절했을 때, 만약 할아버지가 간병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무엇보다 널 돌본 건 그 친구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얄팍한 죄책감 따윈 품을 필요도 없다.”
“그래도 그때 할아버지가 편히 쉬었다면….”
“만약이란 건 없다. 나의 벗은 현명한 인간이었고 선택을 책임질 줄 아는 사내였다.”
타챠가 깃대를 번쩍 들어 올렸다. 푸른 깃발이 활짝 펴졌다. 가하란은 머리 위로 드리운 푸른 물결을 바라봤다.
멀리서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례식 때 들었던 그 소리였다.
다른 점은 구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기운차고 밝았다. 위로가 아닌 축복하는 소리였다.
“부끄럼 없는 마지막이었고, 나는 친구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는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누구보다 멀리 보는 자였다.”
쿵, 타챠가 깃대로 땅을 찍었다. 매의 울음소리가 점점 옅어졌다.
“친우의 신념을 네가 어떤 식으로 이어받든,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긍정해도 좋고 부정해도 좋다.”
깃발이 스르륵 움직이며 깃대에 감겼다. 흰개미들의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았다. 일상의 잡음처럼 한 귀로 흘릴 뿐이다.
“그저 기억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깃대를 어깨에 인 타챠가 다시 걸음을 뗐다. 가하란은 멀어져가는 전사의 등에 대고 외쳤다.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도, 아저씨도.”
“난 잊어도 된다. 어차피 다시는 볼 일도 없을 테니.”
“전 할아버지처럼 언젠가 모험을 떠날 거예요. 그러면 아저씨도 만나게 되겠죠. 그땐 아저씨 이름을 부르게 해줘요.”
“기술자가 꿈이 아니었나?”
“꿈은 크게, 또 많이 가질수록 좋다고 했어요.”
“건방진 대답이군.”
산의 전사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다음에 날 찾게 된다면 그땐 이름을 부르는 걸 허락해 주겠다. 물론 네가 전사로서 성장해 있다면 말이지.”
가하란은 손을 머리 위로 들고 크게 흔들었다. 푸른 깃발이 안 보일 때까지.
“헤어져서 아쉽겠구나.”
루카가 말했다.
“네. 하지만 괜찮아요. 다시 만나면 되니까. 그땐 제가 모르는 세상에 대해 다 물어볼 거예요.”
“타린족 전사도 힘들겠군. 네 물음에 답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몸이 번쩍 들렸다. 루카 손에 들려 말에 올라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았다.
“끈을 잡아라.”
뒤에 올라탄 루카가 말안장에 달린 끈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두 손으로 끈을 붙잡았다.
“말을 타 본 적은?”
“처음이에요.”
“천천히 몰 테니 겁먹지 마라. 끈은 여유를 두고 잡고 팔꿈치를 몸에 붙여라. 허벅지에 힘을 풀고 허리는 세워라.”
어느 정도 자세를 잡자 말이 움직였다. 떨림도 잠시 곧 색달라진 풍경에 넋을 놓았다.
시야가 높아졌을 뿐인데 골목이 달라 보였다. 말이 속도를 올렸다. 말발굽이 지면에 닿으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몸을 관통하는 진동.
와, 절로 탄성이 나왔다.
“약간의 긴장은 유지해라. 줄도 제대로 잡고.”
점잖게 타이르는 말에 가하란은 배시시 웃으면서 손에 힘을 줬다.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로 접어들었다. 루카가 고삐를 튕겼다. 나란히 달리던 마차들이 금방 뒤로 사라졌다.
건물들이 눈 옆으로 휙휙 지나갔다. 가하란은 입을 크게 벌렸다. 묵직한 바람이 목젖을 때렸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상쾌했다.
말을 탄다는 건 이렇게 신나는 일이구나.
“곧 도착한다.”
루카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살며시 틀었다. 오른쪽으로 군부 건물이 보였다.
아빠가 있는 곳.
말이 속도를 줄였다. 높은 계단을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대다수가 군복을 입었다. 드문드문 넥타이를 맨 사람도 보였다.
비밀이 많은 도시 둔. 그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 테리와 둔 이곳저곳을 탐험하고 다닐 때도 둔의 중심인 군부만큼은 얼씬도 안 했다.
루카에게 경례한 남자가 말을 끌고 사라졌다.
“조금만 참아라. 곧 네 아빠와 만나게 해줄 테니.”
루카가 계단을 밟았다. 가하란은 군부 건물을 구경하다가 부랴부랴 루카를 따라갔다.
“이름은 가하란. 출입 허가는 받아놨다.”
“확인했습니다.”
입구에서 간단한 검사가 있었다. 가하란은 가져온 가방을 검사관에게 보여줬다.
가방 안에 든 걸 하나씩 꺼내는 검사관이었다.
“음식 반입은 어렵습니다만.”
“괜찮아. 취조부장께서 허락하셨으니.”
“그렇습니까?”
검사관이 도시락을 가방에 돌려놓았다. 가하란은 가방을 넘겨받으며 검사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숨겨둔 아들입니까?”
“비슷해.”
루카가 턱짓하며 안으로 걸어갔다. 가하란은 루카 뒤에 바짝 붙었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들었다. 괜히 긴장된다.
“죄지은 거 없으니 주눅들 필요도 없다.”
“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어깨가 움츠러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기도 군인, 저기도 군인. 거기에 건물 자체가 주는 압박감도 상당했다. 아빠는 괜찮은 걸까.
지하로 내려갔다. 좁은 복도를 꽤 오랫동안 걸었다. 도중에 무장한 군인을 서너 명 봤는데, 다들 눈빛이 무서웠다.
조금만 잘못해도 바로 잡아갈 것 같다.
“여기다.”
루카가 멈췄다. 오른쪽에 문이 보였다. 들어가 보라는 손짓에 가하란은 슬며시 문을 밀었다.
복도와 달리 환한 방이었다.
벽지 색깔도 밝았다. 우중충한 회색빛 건물과 대조되는 방.
“아들!”
아빠가 보였다. 의자에서 일어서며 양팔을 벌렸다. 가하란은 쥐고 있던 가방을 놓으며 아빠에게 달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