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문 열리는 소리도 없었다. 다가오는 기척도 못 느꼈다. 그런데 사람이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후드. 어렴풋이 보이는 턱에 흰색 붕대가 감겨 있었다.
누구세요, 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침대로 걸어갔다.
할아버지 곁을 맴돌며 저주를 퍼붓던 정령이 훌쩍 물러났다. 후드 쓴 저 사람이 두려운 모양이다.
“그래도 친구가 곁에 있어서 외롭지는 않았겠어.”
다시금 들려온 목소리에 가하란은 자신도 모르게 후,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을 녹이는 음성이었다. 푸근하고 따스했다.
누구일까?
목소리만으론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린지, 아니면 어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자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후드 쓴 사람이 할아버지 손을 붙잡았다.
삭막한 병실에 꽃들이 가득 피었다. 만개한 꽃을 보며 가하란은 눈을 비볐다.
꿈은 아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여도 눈앞에 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짙은 꽃향기가 몸을 쓸고 지나갔다.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근심을 앗아가는 향이었다.
기적. 혹은 마법.
이 상황을 설명할 두 단어를 떠올렸다. 앞에 있는 분은 마법사인 걸까?
-장난쳤을 뿐이야! 그러니까 날 내보내 줘!
정령이 비명을 질렀다. 한가득 피어난 꽃들이 마치 가시덤불이라도 되는 듯,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꼴좋다고 생각하며 허겁지겁 움직이는 정령을 눈으로 좇을 때였다.
처음 보는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두꺼운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였다. 골목에서 덩치가 가장 큰 게젤 아저씨도 이 남자 옆에 서면 작아 보일 것이다.
처음 보는 아저씨.
그런데 낯이 익었다.
태풍 앞에서도 깜짝 안 할 것 같은 굳센 눈. 그 안에 익숙함이 담겨 있었다.
“핀들론 할아버지?”
가하란은 나지막하게 이름을 꺼냈다.
눈앞의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거친 손이었다. 이야기가 담겨 있는 손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모험심을 샘솟게 하는 손.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저씨가 손을 가볍게 튕겼다.
무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두 손으로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할아버지 맞죠?”
두 번째 물음에도 아저씨의 입은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끈질긴 친구야. 자의로 이렇게 남아 있고. 이 애가 그렇게 소중했어?”
후드 쓴 사람이 말했다. 아저씨의 입가가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바람이 몰아쳤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저씨가 사라졌다. 꽃도, 꽃향기도 바람에 실려 자취를 감쳤다.
가하란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친 질감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는요?”
후드 쓴 사람에게 물었다.
“갔어. 정확히 말하면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있지만 이제 만날 수는 없어.”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할아버지한테 하고 싶을 말이 아직 남아 있어요. 인사도 제대로 못 했고. 다시 한번만….”
“그건 안 돼. 넌 눈이 좋거든. 영혼 세계를 들여다보는 건 위험해.”
후드가 젖혀졌다. 얼굴 전체를 붕대로 싸맨 사람이 가하란을 응시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신비로웠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손을 잠깐 줄래?”
가라한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초록 눈의 여자가 손을 맞잡았다.
“로안이 아낄 만해. 아이야, 넌 바라던 대로 모험을 하게 될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 수 있어. 나는 너만큼 보는 눈이 좋거든. 하지만….”
초록색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숨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자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역시 그 뒤가 안 보여. 어두운 장막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니었다. 가하란은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할아버지 친구예요?”
“맞아.”
여자가 침대로 시선을 주었다.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내가 본 미래와 달라졌어. 로안, 역시 운명대로 살지 않는 남자였어. 그래서 좋아했지.”
다정한 손길로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다.
-너와 친분이 있는 줄 몰랐어! 그걸 알았다면 여긴 얼씬도 안 했을 거야. 다시는 오지 않을 테니 날 놔줘!
정령이 소리를 질렀다.
하늘을 날고 벽을 통과하던 정령이 구석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못 했다.
“가하란.”
여자가 말했다. 가하란은 네, 하고 대답한 후에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름을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안 거지?
“저 정령이 밉니?”
와들와들 떠는 정령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미워요.”
“어떻게 하면 좋겠어?”
“혼내주고 싶어요.”
“혼내준다는 건 어떤 의미지?”
“…없애버리고 싶어요.”
“죽이겠다는 말이네.”
죽인다와 없앤다. 분명 같은 의미였다. 그런데 선뜻 죽이고 싶다는 말이 안 나왔다.
비슷한 뜻일 텐데, 다르지 않을 텐데.
“로안, 그리고 네 아빠가 어린 너한테 너무 많은 걸 가르쳤나 보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여자가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병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구석에서 빌빌대던 정령이 헤픈 웃음과 함께 날아올랐다.
-풀어줘서 고마워. 이제부터 얼씬도 안 할 테니 나 같은 건 잊어줘.
정령이 움직였다. 실실 웃으며 창문을 향해 나아갔다. 이대로 지켜봐야 하는 건가?
가하란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 정령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신비로운 힘을 쓴다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고민 끝에 말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없애 달라니, 죽여 달라니.
그건 책임을 미루는 것이었다.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정령이 창문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잠시 멈춰 섰다.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내 실험에 도움이 됐어!
정령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가하란은 이를 악물며 창가로 뛰어갔다.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과하게 만들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약 그때도 빈정대며 할아버지를 욕보인다면….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거든.”
가하란을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가 도망치는 정령을 보며 말했다.
“로안을 가장 아끼는 저 아이한테 양보해야겠지. 그게 순리고.”
“순리요?”
의문을 담아 되물을 때였다.
뒤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가하란은 입을 살짝 벌리며 하늘로 솟구친 거대한 매를 보았다.
매서운 울음과 함께 날개를 펼친 매가 정령을 향해 날아들었다.
나지막이 정령의 비명이 들려왔다.
-뭐야!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책을 닮은 정령이 몸부림쳤다. 책장이 하나하나 찢겨 나갔다. 붉은 피가 튀는 광경은 아니었으나, 그 모습은 몸을 움츠리게 할 정도로 잔인했다.
-살려 줘! 망할 주술사! 날 살려 내!
정령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몸체를 양분했다. 너덜거리는 책장이 흩뿌려졌다. 낙엽 같다고, 가하란은 생각했다.
끈적한 여름바람이 불어와 잘게 조각난 종이들을 쓸어가 버렸다.
형태도, 음성도 남지 않았다.
아주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통쾌함도 잠시 가하란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물이 올라왔다.
“없앤다는 건 이런 거야. 무서운 일이지. 넌 그 말의 무게를 아주 잘 알고 있고.”
등을 토닥여주는 손이었다. 구역질이 점차 사라졌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걸까요?”
“아니. 누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그건 본능적인 거야. 날 위협하는 대상을 기피하고 싫어하고 나아가 없애고 싶은 건 당연한 거야.”
“아빠가 그랬어요. 당연하다고 해서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니라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말했고요.”
“로안의 가르침은 빡빡한 구석이 있어. 여물지 않은 인간에겐 벅찬 공부겠지만, 네 그릇을 알아봤기에 알려준 거겠지.”
여자가 후드를 눌러썼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떠나려 한다는 걸.
“가는 거예요?”
“가야지.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영혼 세계가 어두워졌어.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몰라. 그러니 알아봐야지.”
여자가 가하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후드가 만들어낸 어둠 사이로 반짝이는 초록색 눈이 보였다.
“로안의 마지막을 부탁할게.”
“할아버지 이름은 핀들론이에요.”
“로안이기도 해.”
꽃향기가 진해졌다.
눈을 깜빡이고 나니 앞에 있던 여자가 사라졌다. 꽃향기도 함께 증발했다.
가하란은 창틀에 손을 얹고 밖을 보았다. 거대한 매가 태양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등에 올라탄 사람이 보였다.
할아버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눈물을 닦아내고 침대를 보았다.
할아버지와 매는 그곳에 있었다.
창밖으로 날아간 건 둘의 영혼이었을까?
“정리가 끝난 것 같구나.”
초콜릿을 준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하란은 잠깐 고민했다.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와 정령, 그리고 핀들론과 매에 대해 말해야 할지 말지.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하고, 아니면 안으로 감춰라.”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살짝 놀랐으나, 이내 감정을 다잡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문밖에 루카가 있었다. 나오라는 손짓에 가하란은 천천히 걸음을 뗐다.
“인사는 제대로 나눴느냐?”
모자 쓴 할아버지가 물었다. 가하란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많지만, 그래도 인사는 했어요.”
“그래. 그거면 됐다.”
“저기 할아버지. 핀들론 할아버지와 아는 사이인가요?”
“팬이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는 할아버지였다. 무뚝뚝한 음성에 실린 슬픔을, 가하란은 알아챘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애가 어른 걱정하는 거 아니다. 루카 부대장, 그 아이를 부탁하겠네. 난 이분의 마지막을 준비할 테니.”
“알겠습니다.”
가하란은 루카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서려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핀들론 할아버지는 매를 타고 저 먼 곳으로 가셨어요. 여행을 떠나신 거예요! 그러니까….”
모자 쓴 할아버지가 가하란에게 눈길을 주었다. 환한 미소가 할아버지 입가에 걸려 있었다.
“나도 안다. 탐험을 멈출 분이 아니라는 걸.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을 신나게 휘젓고 있겠지. 누구보다 미지를 사랑하는 사내니까 분명 그럴 거다.”
그 웃음을 보며 가하란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