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3화 (23/558)

제23화

목소리가 작아질수록 가하란이 품은 불안감은 배가 되어 몸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있잖아요. 저 선물 받았어요. 초콜릿인데 할아버지랑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어요.”

대화가 끊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가하란은 서둘러 손수건을 펼쳤다. 살짝 녹은 초콜릿을 자그맣게 쪼갰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조각을 하나 들어 핀들론에게 보여줬다. 하지만 탁하게 변한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초콜릿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쉬지 않고 불렀다. 살짝 벌어진 입을 통해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핀들론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가하란,”

“네, 할아버지.”

“세상은 넓단다. 사람도 많고. 지금은 이 도시가 한없이 커 보이겠지만, 언젠가 좁게 느껴질 때가 올 거다. 넌 모험을 좋아하니까 그때가 오면 반드시 이곳을 떠나겠지.”

“맞아요. 전 그럴 거예요. 테리 형하고 같이 떠나겠죠? 근데 할아버지. 전 아직 모르는 게 많아요. 할아버지한테 배워야 할 게 산더미예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기적이 찾아오지 않을까? 할아버지의 병이 나아 내일도, 모레도, 내가 커서 이곳을 떠날 때까지 건강하지 않을까?

-인간족은 여러모로 불편해. 죽는 순간마저 불안정하거든. 우리는 기억을 끝내겠다고 정한 순간 사라질 수 있어. 죽음의 형태는 엇비슷하지만 우리가 훨씬 자유롭지. 마지막을 정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편해.

가하란은 눈을 치켜떴다. 책 모양의 정령이 매 위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조용히 잠든 매를 통과하며 낄낄 웃더니, 이번엔 핀들론 가까이 다가가 ‘얼른 죽어’라고 속삭였다.

밉다, 너무나도 밉다.

증오도 잠시 가하란은 정령에게서 눈길을 뗐다. 저런 것한테 시간을 뺏길 수 없었다.

“전 할아버지가 해주는 얘기가 너무 좋아요. 신문을 같이 읽는 것도 좋고요.”

“좋았다니 다행이구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가하란은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저번에 저랑 약속한 거 기억나세요?”

“약속?”

“제가 일곱 살이 되면 알려준다고 하셨잖아요. 할아버지가 옛날에 어떤 일을 했는지.”

“그래, 그랬었지.”

“저 아직 그 얘기 듣지 못했어요.”

“해줘야지. 약속인데, 해줘야지.”

“그러니까요. 할아버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잖아요. 저는 잘 알아요. 이번에도 할아버진 약속을 지킬 거란 걸.”

속삭이는 정령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모든 정신이 할아버지 입에 집중됐다. 호흡 하나, 말 한 조각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지.”

굳어 있던 핀들론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찾아들었다. 가하란은 눈을 크게 뜨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나으셔서 집으로 같이 돌아가요. 네?”

“그래야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초점이 분명했다. 다정하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눈길. 가하란은 웃음을 활짝 짓고 손에 쥔 초콜릿으로 시선을 잠깐 주었다.

“할아버지. 이거 드시고….”

잘라놓은 초콜릿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얼굴에 손이 닿았다. 섬뜩할 정도로 찬 할아버지의 손이었다.

“가하란. 아프지 말고, 밥은 꼭 제때 챙겨 먹고. 아빠 말 잘 듣고. 그리고 내 침대 밑에 네 생일 선물이 있단다. 늦게 줘서 미안하구나.”

손이 떨어져 나간다.

가하란은 초콜릿을 내팽개치고 떨어지는 손을 붙잡았다.

-죽었다! 죽었어! 내 예상보다 조금 더 길어졌지만 얼추 맞았네. 내기에서 내가 이긴 거야!

정령이 위에서 떠들었다. 한 귀로 들어온 말을 다른 귀로 흘리며 할아버지의 얼굴을 봤다.

보는 순간 깨달았다.

더는 할아버지와 얘기할 수 없다는 걸. 더는 할아버지와 밥을 먹을 수 없다는 걸. 더는 할아버지와….

어깨를 감싸 쥐는 손이 있었다.

멍한 상태로 뒤를 보았다. 초콜릿을 준 할아버지가, 탁한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분이 하는 말을 잘 들었냐?”

“모르겠어요.”

“…너는 곧 울게 될 거다. 어쩌면 실신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이분이 한 말을 붙들고 있어라. 한순간의 감정 동요로 잃어버리기엔 너무나도 값진 말일 테니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몸 상태는 기분 나쁠 정도로 좋았다. 게다가 슬프지도 않았다. 기쁘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쨍한 시야로 핀들론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쓸데없이 밝아진 눈이 보기 싫은 것들을 확실하게 잡아냈다.

창백한 피부색, 움푹 들어간 목, 움직이지 않는 가슴.

확연한 죽음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마지막이었다.

“감정이 한발 느릴 때가 있다. 머리가 이해하고 모든 걸 정리한 뒤에 감정이 따라붙지. 그래, 너는 나를 닮았다.”

뒤에 선 할아버지가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일까?

그 순간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울음이 몸을 관통했다. 가하란은 침대에 엎어졌다. 이불을 붙들고 고개를 박았다.

그칠 수 없는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시간을 주마. 마음을 추슬러라.”

문 닫는 소리가 났다.

가하란은 이불에 처박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주할 현실이 두려웠다.

목이 아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바라던 기적은 눈앞에 없었다.

차분하게 감긴 할아버지의 눈을 넋 놓고 바라봤다.

-인간족 꼬마야. 내가 소용없다고 했지?

정령이 나풀거리며 시야 사이로 끼어들었다. 눈동자가 움직였다. 놀리듯 이동하는 정령을 따라서.

“이제 그만해.”

-뭘?

“그만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정령이 침대를 통과해 눈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가하란은 입을 악다물었다.

정령.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라고 했다. 이해하지 말라고 했다. 무시하는 게 답이니 흘려들으라고.

그러려고 했다. 길가에 돌멩이 보듯 대하려고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입을 다물었다면, 적어도 비꼬지만 않았다면 다름을 인정했을 것이다.

-화내 봤자 소용없어. 무의미한 일이야.

“알아. 아저씨도 그러라고 했으니까. 정령은 우리와 다르니까 무시하라고, 말을 듣지 말라고.”

-하지만 무시하기 힘들지? 이성과 감정은 별개니까. 나는 너희들을 잘 알아. 인간족의 습성을 연구하고 관찰하는 게 내 낙이거든.

“낙? 낙이라고?”

-날 더 미워하게 됐구나? 좋아. 흥미로워.

정령이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날 없애고 싶어?

가하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말로 꺼내는 건 항상 조심해야한다고 아빠가 말했다.

-다시 한번 때려 보는 건 어때? 혹시 알아? 내가 맞을지도?

주먹 쥔 손을 휘둘렀다. 소용없다는 걸 알아도 참기 힘들었다.

허공을 가른 주먹을 보며 정령이 웃었다.

-좀 더 노력해봐. 포기하지 말고. 계속하다 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어?

비웃는 정령을 향해 계속 주먹을 날렸다. 숨이 차서 손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벌써 끝이야? 아무리 애라지만 체력이 아쉽네.

“시끄러워.”

-내가 도와줄게. 극도로 흥분한 인간은 예상 못 한 일을 해내곤 하더라. 한번 믿어봐, 오랜 관찰의 결과니까.

정령이 천장으로 날아올랐다. 곡선을 그리며 안착한 곳은 할아버지 얼굴이었다.

거기서 당장 비켜,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이었다.

찢어진 책 모양의 정령이 흐물흐물해지더니 할아버지 얼굴에 녹아들었다.

-가하란. 해줄 말이 있단다. 어때? 비슷한가?

정령이 핀들론의 목소리를 어설프게 따라 했다. 굳었던 할아버지 입술이 슬쩍 움직였다.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 이내 기괴한 모양새가 됐다.

그걸 보는 순간, 가하란은 이를 드러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서로 이해하고 못 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저건 작은 악마다.

언젠가 중앙성당에서 나온 신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는 없애야 할 악이 존재한다고. 악은 그림자 같아서 선함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타나니 조심하라고.

저건 정령이 아닐 것이다.

악마일 것이다.

아니, 악마여야만 했다.

가하란은 바짓단을 움켜쥐었다. 너무나도 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없애버리고 싶었다.

-날 죽이고 싶지?

정령이 말했다.

-방법을 알려줄게. 네 새끼손가락을 잘라. 그리고 그 피를 나한테 뿌려.

“거짓말하지 마.”

-겁나서 못 하겠지? 그렇겠지. 인간은 다들 그래. 겉으론 위하는 척, 화난 척하지만 정작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지. 희생을 몰라. 대가도 몰라. 기적만 바라는 무지한 동물들이야.

가하란은 힐긋 새끼손가락을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피를 뿌린다고 해서 정령이 사라질까?

게다가 죽일 방법을 알려주다니. 정령에게 득 될 것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놀리는 거였다.

알고는 있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지켜볼 거야? 할아버지가 억울해하지 않을까? 널 그렇게 아끼던 할아버지인데, 넌 구경만 할 거야?

목소리가 귀 안을 가득 메웠다.

호흡이 빨라진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더니, 할아버지의 얼굴만 보였다.

왼손이 움직였다. 새끼손가락을 곱게 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앞니에 걸쳐 놓았다.

-그래. 해봐. 네 의지를 보여줘. 할 수 있어. 내가 죽도록 밉잖아?

통증이 왔다. 이가 살짝 살집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더 아파도 돼.

그런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손가락이 끊어져도 저 정령을, 악마를 죽일 수 있다면….

-더 세게!

턱에 힘을 바짝 줄 때였다.

‘내가 초콜릿을 주며 한 얘기를 기억해라.’

초콜릿을 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손가락을 자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난 왜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바라고 있던 거지?

왜 저놈 말을 듣고 있었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손가락을 빼냈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피도 살짝 났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가 뼈에 닿았을 것이다.

내가 왜 이랬지?

가하란은 긴장한 채 정령을 바라보았다. 위험했다. 잠깐이지만 바보처럼 굴었다. 정령이 무슨 짓을 한 거지?

할아버지 얼굴에서 떨어져 나온 정령이 아쉽다는 듯 웃었다.

-갖고 노는 재미가 있네. 역시 어설프게 눈이 뜨인 인간은….

조잘거리던 정령이 말을 멈췄다.

눈 코 입이 없는 정령이지만, 가하란은 알 수 있었다.

긴장하고 있다. 아니, 두려워하고 있다. 갑자기 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조금 늦었네.”

바로 뒤에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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