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랍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보는 자들. 바른길로 인도하는 길잡이이자 동시에 미개척지를 사랑하는 낭만주의자들.
대륙에는 수많은 랍파가 있지만, 그중에서 쓸모 있는 랍파는 소수이며, 존중할 만한 랍파는 언제나 스무 명 남짓했다.
위대한 랍파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손가락에 꼽았고 그들은 국가를 초월해 어느 곳에서든 대우를 받았다.
노년을 부족함 없이 잘 지내리라 예상했는데….
첼은 핀들론의 손을 보았다. 깡마른 팔이 눈을 찔렀다. 35년 전에 봤던 건장한 육체가 아니었다.
“이렇게 누워서 인사를 받는 걸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몸이 말을 안 듣는군요.”
웃으며 말하는 핀들론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을 겪는 중입니다. 늙었고, 갈 때가 된 거죠.”
“이럴 게 아니라 병동을 옮기죠. 성도 싱크탱크 중 한 곳으로….”
핀들론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기가 좋습니다.”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대답이었다. 첼은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서 날고 있던 매들이 어느새 병동 근처로 다가왔다.
“당신의 단짝이 당신을 찾는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핀들론이 힘겹게 고개를 틀었다. 첼은 손을 내밀어 도우려다가 그만두었다.
“떠나보냈다고 한들 영혼은 여전히 얽혀 있었나 봅니다.”
날개 길이가 족히 5m는 되어 보이는 매가 병동 창문 앞에서 날갯짓했다. 날개가 일으킨 바람에 창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군요.”
“…창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첼은 무릎을 짚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굳게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매가 날개를 접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강철 같은 부리를 앞세워 빠르게 침대로 다가오더니, 핀들론 어깨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도 아직 애구나.”
핀들론이 팔을 들어 매의 부리를 쓰다듬었다.
깊은 흉터가 이곳저곳 난 부리.
저 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매의 단짝인 핀들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려주는 증거품이었다.
병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니 확인차 연 것 같았다.
첼은 루카와 벤을 향해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별일 아니니 문을 닫게.”
“알겠습니다.”
살짝 당황한 눈으로 매를 보던 루카가 문을 닫았다. 첼은 열어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늘이 내려앉은 침상에서 한 인간과 한 마리의 매가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외부인이 끼어들어선 안 될 시간이었다.
첼은 언제나 가치를 중요시했다. 인간의 가치, 물건의 가치, 약속의 가치.
모든 것에 등급을 매겨 시간을 할애했다. 가치가 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만큼 끔찍한 게 없다고, 첼은 항상 생각해왔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죽어가는 인간과 그 옆에 붙어 있는 매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랍파 로안과 그의 단짝인 매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필요하다면 병동 내 모든 인원을 바깥으로 물릴 것이다. 핀들론, 아니, 로안은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한 인간이니까.
얼마 만일까.
지켜보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건, 감상에 젖어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리는 건.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인간이 이 조용한 병동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몇이나 알까.
아이러니하면서도 어울리는 마지막이라고 첼은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매가 미동조차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정말로 친구를 따라 생을 마감하는구나.
랍파의 매는 장수한다고 들었다.
마나 때문인지, 아니면 랍파만이 갖는 특수한 힘 때문인지는 몰라도 짝이 된 매는 보통 인간보다 오래 살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매가 나타나곤 했다.
인생을 함께 설계해온 단짝이 죽음의 문턱을 넘었을 때, 그 죽음을 알아채고 친구를 따라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매를 가리켜 영물이라 불렀다. 최고의 미덕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지만 직접 본바, 매의 죽음은 그리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보통의 죽음과 별다른 것 없다.
쓸쓸하고 적막할 뿐.
호사가들 입에서 미화된 것처럼 숭고한 정경은 아니었다.
“이 친구가 인도해준 길엔 언제나 새로운 것들이 가득했죠. 탐험가로서 최고의 순간을 만끽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친구 덕분입니다.”
부리를 쓰다듬는 핀들론의 손길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가족은….”
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B-C 5블록. 그곳에 내 가족들이 있습니다.”
가하란이 사는 골목이었다. 그곳 주민들이 가족이란 건가.
“원하신다면 친족들에게 연락해드리죠.”
“친족이라 할 만한 이들이 이젠 없습니다. 다들 먼저 떠났죠. 이 녀석처럼.”
핀들론이 죽은 매의 눈을 감겨주었다. 거대한 매가 한순간 작은 새처럼 보였다.
“가는 길이 적적하진 않겠군요.”
마른기침을 쏟아내던 핀들론이 첼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시간이 된다면, 내 얘기 좀 들어 주겠습니까?”
“얼마든지 들어드리죠. 한때 당신의 팬이었던 사람으로서 이보다 귀중한 경험은 없을 테니.”
“팬이라니. 첼 공께서 그런 말을 하다니 뭔가 재밌군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게 언제였죠?”
“35년 전입니다.”
“그때였군요. 룬타 평야로 향하기 전 환송 파티였죠.”
“기억하시는군요. 성도 북부의 미개척지. 그곳을 탐사하겠다는 당신의 선언은 청년들의 모험심을 자극했죠. 지금이야 개척사업지로 지정돼 누구나 갈 수 있게 됐지만.”
“미답의 땅에 족적이 남으면, 그 뒤는 개발뿐이죠.”
“당신 덕입니다.”
“나와 함께 한 동료들 덕분이죠. 그때 먼저 떠나보낸 친구들 뒤를 이제야 따라가겠군요.”
위험한 마수들과 정체불명의 벌레들이 들끓는 미개척지를, 눈앞의 남자는 수도 없이 돌파해나갔다.
로안. 지금도 그 이름을 우상으로 삼는 어린 랍파들이 많을 것이다.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핀들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침착하게,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허탈하게. 한 편의 자서전이 날것 그대로의 말들로 작성되었다.
첼은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도중에 양해를 구해 펜과 수첩을 꺼냈다.
핀들론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첼은 재차 허락을 구했다.
“곧 갈 사람이니 산 사람의 의지를 꺾을 순 없겠죠. 뜻대로 하시죠. 건질 거리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허락이 떨어졌다.
위대한 랍파의 말은 활자로 기록해 보관할 가치가 있었다. 이는 중요한 유산이자, 교육자료로 쓰일 터였다.
꺼져가는 생명이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듯, 핀들론은 힘겹지만 끝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해냈다.
말소리가 멎었다. 첼은 마침표를 찍고 침대를 보았다.
핀들론이 옅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건질 게 있습니까?”
“버릴 게 없어서 문제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한시름 놓이는군요.”
핀들론의 기침이 심해졌다. 치료 스크롤 위로 피가 튀었다.
첼은 손수건을 꺼내 핀들론에게 내밀었으나, 핀들론은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밖에 어린애가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눈에 초점이 없다. 첼은 직접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가하란이라면 밖에 있습니다.”
“이름을 아시는군요.”
“제 증손자입니다. 그다지 닮지는 않았지만.”
핀들론이 하하하, 소리 내 웃었다.
“가하란이 누구의 머리를 이어받았는지 이제 알겠군요. 영특한 아이입니다.”
“제가 보기엔 너무 착하기만 합니다. 그게 걱정이죠.”
“첼 공의 관점에서는 그렇겠군요.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그 아이의 착함은 어중간하지 않습니다. 아주 강해요. 그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강력한 무기가 될 겁니다.”
“강해도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전 맹목적인 선함보다는 재빠른 타협을 선호하니까요.”
첼은 핀들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가하란을 불러올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루카가 옆에 따라붙었지만, 첼은 고갯짓으로 막았다.
맞은편 휴게실로 들어가 가하란 앞에 섰다.
“따라오거라.”
휴게실을 나서기 전 의자에 놓아둔 손수건을 보았다. 펼치지 않고 굳게 싸맨 손수건. 초콜릿에 손대지 않은 모양이다.
가하란이 손수건을 들고 따라왔다.
“들어가라. 너에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으니.”
병실 앞에 선 가하란이 머뭇거렸다. 병실의 낯선 공기가 두려운 걸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었다.
첼은 가하란의 눈을 살폈다. 저 아이는 알아챈 것이다. 문틈 너머로 발을 딛는 순간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이별을 미루려는, 참으로 어린아이다운 행동이었다.
“내가 초콜릿을 주며 한 얘기를 기억해라. 네가 여기에 멈춰 서 있는다고 한들 다가올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넌 미련한 아이가 아닐 것이다.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등을 가볍게 밀어줄까?
첼은 살짝 펼쳤던 손바닥을 다시 거두었다. 가하란이 앞으로 나섰다. 뛰듯이 다가가 핀들론의 손을 잡았다.
“결단력은 좋군.”
첼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루카 부대장.”
“예.”
“그 어떤 것도 대화를 방해해선 안 될 걸세.”
“알겠습니다.”
첼은 모자를 살며시 내려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례식을 준비해주게. 가족장으로, 아주 조용하게.”
루카가 의술사를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첼은 벽에 기대 수첩을 꺼냈다.
위대한 탐험가의 이야기를 다시 들추며 곧 다가올 마지막을 준비했다.
* * *
-이 인간족 곧 죽을 거 같은데? 내 말이 통한 건가? 언령이 생긴 걸까? 어서 죽었으면 좋겠는데.
가하란은 위에서 떠는 정령을 무시한 채 핀들론에게 뛰어갔다.
“할아버지.”
옆에 누워 있는 큰 매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지만, 놀라지 않았다.
응당 있어야 할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핀들론 곁에 있었으니까.
“가하란.”
“네, 할아버지.”
“해주고 싶은 얘기가 많았는데 아쉽구나.”
“하면 되죠. 매일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갈게요. 아침이고 저녁이고 할아버지 옆에서 얘기를 들을게요. 아빠가 집에 오라고 해도….”
차갑다.
무섭도록 차가웠다. 가하란은 핀들론의 손을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댔다.
몸의 온기가 조금이라도 전해질 수 있도록, 얼음장 같은 손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질 수 있도록.
“처음에 널 봤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네 엄마 품에 안겨 그 작은 손을 꼬물거렸지. 동그란 눈으로 날 똑바로 보는데 그때 알아봤단다. 이 녀석, 꽤 짓궂은 놈이겠구나.”
낮에서 저녁으로 바뀌어 가는 하늘처럼, 핀들론의 목소리는 서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생기를 잃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