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1화 (21/558)

제21화

“군 병동?”

“예. 지금 막 옮겨졌다고 합니다.”

“상태가 별로 안 좋나 보군.”

핀들론.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증손자가 잘 따르는 남자라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있었다.

아직 어린애다. 주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나이. 심적으로 힘들 것이다.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성품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고.

좋지 않았다.

이래서 환경이 중요한 법이다. 성도에 살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 봐야겠군.”

“준비하겠습니다.”

루카를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직접 증손자의 상태를 확인할 것이다.

손자 놈과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다. 관계를 밝힐 생각은 없다. 언젠가 알려 주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가하란은 울고 있을까? 아니면 이해 못 하고 멍하니 있을까.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었다. 열어둔 창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저 멀리 하늘을 수놓은 검은 점들이 보였다.

눈을 살짝 찌푸렸다. 점들의 정체는 매였다. 거리를 따져보건대, 중앙에 있는 매는 꽤 클 것이다.

“매가 뭉쳐 있다라.”

새들의 습성을 다 아는 건 아니지만, 매가 몰려다니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늘에 선을 긋고 영토 분쟁을 시도 때도 없이 하는 동물. 그런 놈들이 뭉쳐 다닌다?

첼은 오래전 보았던 ‘랍파’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유능한 랍파였고, 하늘의 사랑을 받은 탐사꾼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수십 마리의 매들이 하늘을 채웠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매들처럼.

저명한 랍파가 유명을 달리한 것인가.

첼은 빙글빙글 도는 매를 지켜보다가 방을 빠져나왔다. 마차에 올라타 오후 일정을 생각하고 있으니 금방 군 병동에 도착했다.

조용히 방문하고 싶었으나 병동 앞에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둔 안에서 사령관의 눈을 피하기란 쉽지 않군.

“난 신경 쓸 거 없으니 볼일들 보게. 사령관께도 그리 전해드리고.”

흰색 견장을 단 군인이 군례를 마치며 돌아섰다. 첼은 하브와 함께 병동으로 들어갔다.

“몇 층에 있지?”

“3층입니다.”

“자넨 여기서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계단 앞에 서서 뒷짐을 지는 하브를 흘깃 본 후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병동 특유의 냄새가 진해졌다. 반갑지 않은 냄새다.

3층에 올라서니 루카가 보였다. 전언을 받았는지 곧장 다가와 경례를 올렸다.

“가하란은 휴게실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잘했네. 애한테 보여줘서 좋을 게 하나 없으니. 애 상태는 어떠한가?”

“좋지는 않습니다.”

“애 아빠도 갇혀 있고, 돌봐주던 사람도 병환으로 누웠으니 불안하겠지.”

혀를 찼다. 손자 놈과 달리 증손자는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다잡는 법도, 문제에서 한 걸음 떨어져 관찰하는 법도 모를 것이다.

불안감은 감정 과잉을 불러온다. 넘치는 감정은 인간상을 망치는 재료 중 하나였다.

어릴수록 관리해줘야 하거늘.

“휴게실이 어디지?”

“이쪽입니다.”

루카의 안내를 받아 휴게실 앞에 섰다. 유리로 된 창 안쪽으로 아이가 보였다.

양손을 붙잡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해결 못 한 난관 앞에서 신을 찾게 되는 건 애나 어른이나 다를 게 없는 걸까.

“필요한 인원만 통행하도록 조치해 주겠나?”

“이미 얘기해 뒀습니다.”

“고맙군.”

문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첼은 루카를 다시 불렀다.

“혹시 초콜릿 갖고 있나?”

“구해 오겠습니다. 2층 직원 휴게실에 아마 비치돼 있을 겁니다.”

“부탁하겠네.”

여러모로 귀찮게 했군, 첼은 뛰듯이 걷는 루카를 보며 생각했다.

아랫사람에게 하나를 받으면 둘을 돌려줘야 하는 게 정치인들의 생리였다.

저 친구를 위해 뭘 해줘야 하나.

지금부터 고민해둬야 할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돌아온 루카가 초콜릿을 건넸다. 한 무더기였다. 첼은 그중에서 별 모양 초콜릿 하나만 집어 들었다.

“이거면 됐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박고 기도 중이던 가하란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옆에서 잠깐 쉬어도 되겠니?”

첼은 가하란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여기 앉으세요.”

손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옆으로 조금 비켜서는 가하란이었다.

첼은 옆에 앉으며 증손자의 얼굴과 몸, 팔다리까지 살펴봤다.

없이 키운 건 아닌지 몸이 마르진 않았다. 살집이 적당히 붙어 있는 게 보기 좋았다.

울었는지 눈이 조금 충혈돼 있지만 안색은 괜찮았다.

어조는 안정돼 있고 발음은 정확했다. 이건 손자 놈이 가르친 게 분명했다.

“누가 아픈 모양이구나.”

“네. 옆집에 살고 계신 할아버지가 아프셔요.”

“저런.”

상대의 눈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건 교육보단 타고난 성품일 것이다. 낯선 이와 대화할 때 주눅이 들지 않는 건 보기 좋았다.

경계심을 놓고 정보를 술술 내놓는 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손자 놈의 교육관이니 참견하지 않으리라.

그보다 눈동자 색에 눈길이 갔다.

탁한 하늘색.

제 아비를 닮았고, 나를 닮은 색.

핏줄은 제대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힘들겠구나.”

첼은 초콜릿을 내밀었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마음을 달래 봐라.”

가하란이 초콜릿과 첼을 번갈아 보았다.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 할아버지한테도 너만 한 증손자가 있단다. 널 보고 있으니 그 애가 떠올라. 초콜릿을 참 좋아했지.”

첼은 초콜릿 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부담 갖지 말고 받으렴.”

머뭇거리던 가하란이 두 손으로 초콜릿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그래. 어서 먹어라.”

손안에서 초콜릿이 녹고 있었다. 가하란은 손수건을 꺼내더니 초콜릿을 조심스럽게 싸맸다.

손수건을 챙겨 다니는 건 잘 배웠군, 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왜 지금 안 먹고.”

“꼭 지금 먹어야 하나요?”

“그런 건 아니다만, 날씨가 이러니 금방 녹을 거다. 먹기 불편해지겠지.”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늘진 의자 위에 손수건을 놓았다.

“이러면 괜찮겠죠?”

“거기다 놔도 녹긴 녹을 거다.”

“…할아버지가 나으면 그때 같이 먹을게요.”

“그런 거라면 내가 하나 더 주마. 그러니 녹기 전에….”

천천히 고개를 흔드는 가하란이었다. 첼은 손수건을 보며 말했다.

“초콜릿 먹어 본 적 있니?”

“네. 아빠가 생일선물로 한번 사줬어요.”

“맛이 기억나니?”

“엄청 달았어요. 살짝 쓰고. 맛있었어요.”

“잘 아는구나.”

유혹을 참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어릴 때는 즉흥적인 즐거움에, 나이 먹고는 설계한 미래에 취해 유혹에 넘어간다.

흔들리지 않고 한 번은 참아내는 것.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이후의 반응은 썩 달갑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초콜릿을 먹지 않는 것. 타인을 염려하며 같이 슬퍼하는 것.

손자 놈이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보편적인 도덕으로 아이를 잘 키웠다. 누구나 이 아이를 보면 기특하다, 착하다, 성실하다, 대견하다 등등 온갖 칭찬을 쏟아낼 것이다.

그 점이 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욕심을 거세당한 채 키워진 자는 결국 좁은 세상에 만족하게 될 것이다.

배려하는 마음. 그 자체로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교활해질 필요는 있었다.

“네가 초콜릿을 안 먹는다고 해서 네가 걱정하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낫는 건 아니란다.”

가하란이 슬그머니 쳐다봤다.

“내가 따로 준비해줄 테니 너한테 주어진 몫은 지금 먹는 게 어떻겠니?”

인과를 명확히 구분 지어야 이해를 따질 수 있다. 별것 아닌 선택들이 훗날 아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첼은 잘 알고 있었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던 가하란이 슬그머니 첼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이걸 안 먹는다고 해서 핀들론 할아버지가 낫는 건 아닐 거예요.”

“그렇지.”

“그래도 안 먹을래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가하란이었다.

심성이 고운 아이.

그렇기에 더욱 걱정되는 아이.

이곳이 성도고, 교육권을 쥐고 있었다면 첼은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염원해서 이뤄지는 건 없으니, 그 초콜릿을 먹으라고.

“착하구나.”

첼은 가하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자가 권리를 포기해가며 지켜낸 아이였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가치관을 바꿀 순 없었다.

당장은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훗날 이 아이가 성도 생활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때 기초부터 하나하나 바꿔나가면 되니까.

“나도 기도하마. 꼭 낫기를.”

벗어둔 모자를 다시 쓰고 휴게실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 중인 루카가 한걸음 다가왔다.

“앞으로도 저 아이의 보호를 부탁하겠네.”

“올란트가 혐의를 벗고 풀려나는 날까지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지원이 필요하면 내게 직접 말하게. 필요한 만큼 도와줄 테니.”

대화를 끝낼 때였다. 맞은편 병실 문이 열렸다. 의술사로 보이는 자가 하얀 모자를 벗으며 나왔다.

“저기에 핀들론이 있는가?”

“예.”

“얼굴을 한번 보고 싶은데.”

루카가 의술사에게 다가갔다. 몇 마디 나눈 후 다시 돌아왔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첼은 병실에 들어가기 전 의술사에게 말을 걸었다.

“안의 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

자신을 벤이라 소개한 의술사는 핀들론의 상태를 설명해주었다. 상세한 문장들을 요약하면 결국 이거였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방도는 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거참 안타깝군요.”

환자의 죽음이 안타깝기보단, 그로 인해 증손자가 받을 충격이 안타까웠다.

의술사를 뒤로한 채 병실로 들어갔다. 치료 스크롤이라 짐작되는 종이와 가죽이 환자 몸 곳곳에 붙어 있었다.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조용히 다가설 때였다.

눈을 감고 있던 환자가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의술사 양반, 전 얼마나 남은 겁니까?”

환자, 핀들론이 말했다. 시력이 안 좋은 모양이다. 코앞에 있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걸 보면.

“난 의술사가 아닙니다.”

“아, 그렇군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하는 핀들론이었다.

첼은 좀 더 가까이서 핀들론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 어딘가 낯이 익다.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별 의미가 없거나, 오래된 기억이란 뜻인데.

두통이 있는지 이마를 찌푸리던 핀들론이 다시 눈을 떴다. 초점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가 천천히 첼 쪽으로 이동했다.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첼은 핀들론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냈다.

핀들론 역시 첼을 알아봤는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연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이건 환각이거나 꿈이겠군요.”

“환각도 꿈도 아닙니다.”

첼은 의자를 가져왔다. 그저 얼굴 한번 보고 돌아갈 참이었는데.

첼은 반가움과 아쉬움, 그리고 씁쓸함을 담아 말했다.

“매들이 누굴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요. 로안. 위대한 랍파를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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