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0화 (20/558)

제20화

가하란은 어른들의 눈동자에서 공통된 생각을 읽어냈다. 그건 체념이었다.

“아줌마.”

타챠 손에서 벗어나 룽네에게 걸어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아파요.”

“그래. 알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해요?”

“저 도마뱀 씨 말대로 의술사를 찾아봐야지. 둔에는 실력 좋은 의술사가 몇 있어. 그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낫게 해줄 거야.”

걱정하지 말라며 볼을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이나 건조했다. 거짓말이다. 가하란은 알 수 있었다.

“정말… 나을 수 있는 거죠?”

두 번째 물음에 룽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절망적인 침묵이었다.

“일단 넌 웰턴하고 있어.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저도 도울게요. 뭐라도 할게요.”

“가하란!”

어깨를 붙들렸다. 룽네가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웰턴하고 있어. 얌전히 기다려.”

선언이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가하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구나.

군인들이 집에 쳐들어왔을 때와 비슷했다. 지켜보기만 해야 하다니. 어린애라는 게, 무엇 하나 빼어난 구석이 없다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아빠의 손재주라면 할아버지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고장 난 태엽 시계도 아빠 손을 거치면 새로 태어난 것처럼 째깍째깍 움직였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가하란은 두 손을 움켜줬다.

헛된 생각이란 걸 안다. 사람은 기계와 다르니까. 부품을 갈 수도, 기름칠을 할 수도 없다.

아프면 낫길 기도해야 한다는 걸 골목 생활을 통해 배웠다. 기도한다는 건 반쯤 포기했다는 것도 배웠고.

그럼에도 수많은 신에게 기도했다. 그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벽을 이루며 앞에 모여 있던 어른들이 동시에 뒤를 쳐다봤다. 서서히 어른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가하란은 앞에 생긴 길을 바라봤다. 군복을 입은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어느새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흐릿한 시야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보였지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루카 아저씨.”

아빠의 친구. 곁으로 다가온 루카가 한쪽 무릎을 접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할아버지가 아파요.”

가하란은 루카가 줬던 인식표를 내밀었다.

“아저씨 말했죠? 무슨 일이 있으면 군부로 오라고.”

“그랬지.”

“도와주세요. 할아버지를….”

뒷말이 차마 안 나왔다.

루카가 인식표를 돌려줬다.

“이건 갖고 있어라. 날 찾아올 때 필요하니까.”

무릎을 편 루카가 타챠를 마주했다.

“타린족 전사가 이곳에 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안에 계신 분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현관 앞을 틀어막고 있던 타챠가 아무 말도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상태를 확인해라. 지금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루카가 무겁게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하란도 눈물을 훔치며 따라갔다.

침대맡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루카가 핀들론에게 질문했다. 언제부터 기침이 심해졌는지, 정확한 병명을 혹시 알고 있는지, 각혈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인지 등등.

“의무병과에서 사람을 돌본 적이 있습니다. 치료법은 자세히 알지 못하나 당장 편해지는 법은 몇 개 압니다.”

루카가 핀들론의 자세를 잡아줬다. 거칠었던 할아버지의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좀 낫군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아는 의술사가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금방 올 겁니다.”

“괜찮습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압니다. 늦었다는 것도 알고.”

가하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늦지 않았어요!”

“가하란, 아직 있었구나.”

할아버지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이쪽을 바라봐야 할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좌우로 움직였다. 그때 알았다. 앞이 잘 안 보이는구나.

“쉬고 계십시오. 가하란은 제가 돌보고 있겠습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루카가 가하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나가 있자.”

여기 있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발을 끌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D-B블록 154에 가면 벤이라는 의술사가 있습니다. 이걸 보여드리면 여기로 와줄 겁니다.”

루카가 룽네에게 목에 걸고 있던 인식표를 건넸다.

“론! 당신 발이 제일 빠르니까 얼른 다녀와요.”

룽네가 인식표를 던졌다. 가하란은 뛰어가는 론을 보며 생각했다. 론 아저씨, 빨리 다녀와 주세요.

“깨끗한 물을 준비해 둬야 합니다. 아주 많이.”

“빗물을 받아 놓은 게 있어요.”

루카의 지시 아래 사람들이 움직였다. 거들게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야.

가하란은 고개를 홱 돌렸다.

할아버지에게 못된 말을 쏟아내던 정령이 등 뒤에 있었다.

-너 말이야, 우리가 보이는 거지?

팔랑거리는 찢어진 책장이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가하란은 입술을 오므리며 정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붙잡고 싶었다. 그만두라고 사정없이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정령한테 닿지 않았다. 허무하게 통과할 뿐이었다.

-인간족 꼬마야. 네가 날 만질 수 없는 것에 감사해야 해. 네가 만일 날 만질 수 있었다면, 내가 널 죽였을 테니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반말이 툭 튀어나왔다. 다른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아빠의 가르침을 지킬 수 없었다.

앞에 있는 저건, 존중할 대상이 아니었다.

-뭐가?

“왜 할아버지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산의 일족이 한 말을 아직도 이해 못 한 거야?

“사는 곳이 다르면 남을 저주해도 된다는 거야?”

-저주라니. 넌 아직도 네 층의 관념으로 날 이해하려 드는구나.

찢어진 책을 닮은 전령이 곁으로 날아왔다. 손 한 뼘 거리. 머리를 들이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난 너희들이 밉지도, 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아. 너흰 그냥 의미 없는 현상일 뿐이야.

“의미가 없다면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일종의 실험이지. 위대한 분들이야 층 너머로 힘을 발현할 수 있지만, 우린 아니거든. 간섭할 여지가 없어.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는 중이야. 의지만으로 층 너머의 동물을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 도전해 보고 있어.

“도전?”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았다.

가하란은 양손을 휘둘렀다. 손에 걸리는 감각은 없지만, 쉬지 않고 계속 휘저었다.

정령은 늘어지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그래. 계속 해봐. 혹시라도 내게 영향을 준다면 난 무척 기쁠 거야.

씩씩거리며 정령을 노려볼 때였다.

“가하란.”

루카가 손을 붙들었다.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대체 허공에 대고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이 정령이….”

“정령?”

“아저씨는 안 보이나요? 여기 있는 이 정령이 할아버지한테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있어요. 전 얘가 정말 미워요.”

눈앞을 날아다니던 정령이 다시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하란은 가지 말라고 소리쳤다.

-꼬마야. 산의 일족이 한 말을 새겨들어. 우린 서로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현상이야.

“기다려!”

정령이 집 벽을 통과해 사라졌다.

쫓아가려고 발을 뗐으나, 거대한 손이 머리를 붙잡았다. 타챠였다.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욕심이라 했을 텐데?”

“하지만….”

“의미 없는 일에 화내지 마라. 차라리 기도해라. 그게 핀들론에겐 도움이 될 테니까.”

차가운 손 덕분일까. 화가 나서 좁아졌던 시야가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었다.

“누구한테, 누구한테 기도하면 되죠?”

“만신에게. 네가 아는 모든 신에게.”

타챠가 창을 땅에 꽂았다. 바람이 불어오고 푸른 깃발이 나부꼈다.

가하란을 손을 맞잡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위에 있을 이름 모를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한 번만 도와달라고.

정말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그래도 들어달라고.

“저게 뭐야?”

어른들이 서쪽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하란도 시선을 돌렸다.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에 검은 점이 찍혔다. 점의 개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윽고 점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매?”

가하란은 긴 날개를 펴고 높게 우는 매들을 바라봤다. 머리 꼭대기에서 마치 춤을 추듯 대열을 이뤄 하늘을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수십 마리의 매가 저렇게 모이다니.

“왔군.”

타챠가 말했다.

뭐가 왔다는 걸까?

매의 긴 울음소리가 골목 전체를 휘어잡을 때였다.

“길 좀 터줘요!”

론 아저씨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등에는 하얀 모자를 쓴 노인이 업혀 있었다.

의술사가 온 것이다.

“벤 씨, 오셨군요.”

루카가 의술사를 맞이했다.

“환자는 어디 있나?”

“이쪽으로 오시죠.”

가하란은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루카가 막아섰다. 오지 말라는 단호한 손짓에 가하란은 지면에 발을 붙여야 했다.

“할아버지를 안 아프게 해주세요!”

문 뒤로 사라지는 의술사를 향해 외쳤다. 목소리가 들렸을까. 가하란은 알 수 없었다.

* * *

“병동으로 옮겨야 하네.”

잠든 핀들론을 보며 벤이 말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루카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징후가 안 좋아. 외과적인 치료보다는 마나에 기대야 하는데, 그마저도 소용없겠지.”

“늦은 겁니까?”

“좀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일찍 찾아왔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걸세.”

손댈 수 없는 인명이라는 건가. 노환은 마나로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제국의 권력가들은 무병장수했겠지.

“군부에서 관리하는 병동으로 옮기겠습니다.”

“거긴 민간인이 입원할 수 없을 텐데?”

벤이 말했다.

“사정을 봐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군부 병동이라면 의학의 첨단이니까.”

불러둔 마차가 집 앞으로 도착했다. 들것에 핀들론을 옮겨 조심스럽게 마차에 실었다.

“아저씨. 할아버지는 이제 괜찮은 건가요?”

가하란의 질문에 루카는 일단 웃음으로 대답했다.

확신을 줘선 안 된다. 핀들론은 상태가 안 좋았고, 아마 죽게 될 확률이 높았다.

지금 희망을 주면 나중에 더 힘들어질 것이다.

다른 애들 같았다면 다 덮어두고 괜찮다, 살 것이다, 위로했겠지만 이 아이한테는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려라.”

“저도 가면 안 될까요? 네? 할아버지 옆에 있고 싶어요.”

간절한 부탁이었다.

제 아빠만큼이나 의지한 사람이 핀들론이라고 들었다. 피보다 더 진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일단 타라.”

벤과 가하란을 마차에 태운 후 타챠를 바라봤다.

“난 여기 있겠다.”

“그렇게 하시죠.”

타린족 전사는 나름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타린족 전사는 땅에 꽂은 창대 옆에 서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루카도 마차에 올라타기 전 위롤 쳐다봤다. 거대한 매 한 마리를 필두로 매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핀들론 집 상공에 저러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타린족 전사가 부른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불러낸 것인가.

매의 울음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구슬픈 소리였다. 곧 찾아올 죽음을 애도하는 것 같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출발하게.”

마부에게 말했다. 마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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