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아침인가?
가하란은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보았다. 설마 또 이틀 동안 기절한 건 아니겠지?
숨을 고르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온몸에 감돌던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뻐근했던 팔다리도 가뿐하고.
이불을 걷고 상체를 세웠다. 허리가 찌릿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비스듬히 열린 나무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저씨는 어디 있지? 툴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심 또 조심. 중심을 잡고 선 다음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봤다.
불편한 곳은 없었다. 몇 걸음 걷다가 발을 굴러 살짝 뛰어봤다. 좋아, 안 아프네.
가하란은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 걱정하고 있을 할아버지, 그리고 아저씨에게 이젠 괜찮다고 말해줘야 했다.
“아저씨?”
거실이 비어 있다. 여름의 후틋한 공기만 피부에 닿을 뿐이다. 숨바꼭질은 아닐 테고. 애초에 그 큰 덩치를 숨길 정도로 집이 크지도 않다.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현관문으로 걸어가 밖을 내다봤다.
둥글게 만 장갑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툴이 날아가는 장갑을 향해 뛰었다.
가하란은 멀어지는 툴을 지켜보다가 장갑을 던진 타챠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타챠는 살짝 벌어진 콧구멍을 확 닫으며 고개를 틀었다.
가하란은 빙긋 웃으며 다가갔다.
“아저씨.”
“왜.”
“툴하고 놀아주시는 거예요?”
“어찌나 귀찮게 굴던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장갑을 꽤 힘차게 던지던데, 가하란은 빤히 타챠를 바라봤다.
“뭐?”
“아저씨는 역시 좋은 분이세요.”
“시끄럽다. 그보다 몸은?”
“이제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보란 듯이 제자리에서 뛰었다. 방에 있을 때보다 몸이 가벼웠다. 열병이 끝난 모양이다.
“영혼은 튼튼하군….”
예정보다 빨리 나은 것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저씨가 당황하는 건 처음 봤다.
다시는 보기 힘들 거란 생각에 타챠의 얼굴을 열심히 뜯어봤다.
“몸은 허약하지만.”
얼굴에 스몄던 감탄이 사라지고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오는 타챠였다.
말하는 사이 툴이 장갑을 물고 돌아왔다. 툴의 꼬리가 바쁘게 좌우로 움직였다.
가하란은 곁눈질로 타챠의 꼬리를 보았다.
툴만큼은 아니지만 아저씨의 꼬리도 위아래로 춤을 췄다. 툴하고 닮은 것 같아요, 라는 말이 잇새로 빠져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 말을 하면 타챠는 분명 화를 낼 것이다.
“할아버지는요?”
“아직 자고 있을 거다. 인간족은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고 하던데, 그 친구는 달라. 오히려 잠이 늘었군.”
“이상하네요.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걷는 걸 좋아하시는데. 신문이 오는 날에는 더 빨리….”
가하란은 도중에 입을 닫았다. 골목으로 신문을 든 남자애가 뛰어오고 있었다.
목적지는 핀들론의 집일 것이다. 이 골목에서 신문을 보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핀들론 씨! 신문 가져왔어요!”
신문을 머리 위로 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남자애였다. 잠귀가 밝은 할아버지라면 지금쯤 깨어나셨을 텐데.
의문을 품고 한 걸음 뗄 때였다. 타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신문 배달부가 뒤로 다가온 타챠를 보며 굳어버렸다.
누구라도 타린족 전사를 처음 보게 된다면 놀라서 얼어 버리리라.
“비켜라.”
타챠가 거칠게 말했다. 뒤따라간 가하란은 멈춰 선 배달부를 옆으로 살짝 당겼다.
“핀들론!”
타챠가 소리쳤다. 골목이 떠들썩해졌다. 지붕에 앉아 종알대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이웃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었다.
소란 속에서, 핀들론의 집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열겠다.”
타챠는 거침없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아니, 뜯어냈다. 비대한 어깨를 접으며 타챠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하란도 움직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타챠의 거친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할아버지!”
침대에 누운 핀들론은 얼굴이 창백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런 건 배운 적이 없었다.
아빠도 알려주지 않았다.
“물을 가져와라. 흙 한 줌도.”
타챠가 말했다. 가하란은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걸로 뭘 할 건지는 묻지 않았다.
밖으로 뛰쳐나왔다. 할아버지가 가꾸는 작은 텃밭에서 흙을, 물동이에서 물을 떠 방으로 돌아갔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타챠가 창을 갖고 돌아왔다. 제사할 때 쓴다는 도구.
“무슨 일이야?”
바로 옆집인 룽네 아줌마가 바로 달려왔다.
“할아버지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누구도 들이지 마라.”
타챠가 룽네를 보며 말했다. 설명은 이따가 듣겠다며, 룽네가 밖으로 나갔다.
“아저씨. 할아버지 괜찮은 거죠?”
“모른다. 노화한 육신이 한계에 도달한 거라면 손쓸 방법은 없다. 다른 이유라면 시간은 벌 수 있겠지.”
타챠가 엄지를 물에 적셔 핀들론 이마에 가져다 댔다.
“흙은 가슴에 올려둬라.”
가하란은 흙이 흩어지지 않게 잘 모아서 핀들론 가슴에 올려두었다.
타챠가 왼손을 뻗어 창대를 잡았다. 둘둘 말린 푸른 깃발이 꾸물거리더니 스스로 펼쳐졌다.
가하란은 양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머리를 뒤집어놓은 개미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령의 속삭임은 흘려보내라. 너는 이제 가능할 것이다.”
아저씨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귀에서 손을 뗐다. 어차피 귀로 듣는 소리도 아니었다.
머리가 지글지글 끓으며 통증이 일어났다. 하지만 처음 경험했을 때처럼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 이해하려 하지 말자, 무시하자, 욕심을 부리지 말자.
타챠의 말과 거대한 쥐, 산테가 해줬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그러자 정령들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이윽고 바람 소리처럼, 새소리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쟤 안 미쳤네.
-안원(安原)에 다녀온 거 같은데?
-자질은 없어 보이는데. 누가 돌봐준 거지?
-눈만 뜨인 거야. 우리랑 엮일 일 없어. 그러니까 무시하고 우리 친구나 돕자고.
제대로 들린다. 두통도 없다.
기쁨도 잠시 가하란은 바닥에 무릎을 댔다. 앓는 소리조차 없이 차갑게 식어가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
따뜻했던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진 걸까.
죽음, 그 막연한 단어가 선명한 형태로 머리를 스쳐갔다.
더는 만날 수 없게 되는 거,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없게 되는 거,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거.
골목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핀들론이 해준 말이었다.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디 가지 마요. 할아버지 얘기를 더 듣고 싶어요.”
세상에는 위대한 신이 많다고 들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할아버지를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산의 영령이시여. 당신의 아이를 보살피시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걸 늦춰 주시옵소서.”
타챠의 말이 끝나자, 푸른 깃발이 펄럭이며 위로 솟구쳤다. 주변 공기가 무섭게 요동쳤다.
정령의 속삭임이 커졌다.
이젠 흰색 개미뿐만 아니라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까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집이 이형의 정령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다들 탸챠와 핀들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될 거 같아?
-아니. 저 인간족은 끝났어. 산의 일족이 빌어도 고칠 수 없어. 저건 우리 손을 떠난 문제야.
-층의 법칙을 따라야겠지. 죽을 때가 됐으면 죽어야 하는 게 이곳의 섭리야.
-그 섭리를 거스르는 놈들도 몇 있더라. 인간족이면서.
-그것들은 인간 껍데기를 둘러썼을 뿐, 속은 인간이 아니잖아.
몇몇은 즐겁다는 듯이, 몇몇은 어서 죽으라는 듯이, 또 몇몇은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주절주절 떠들었다.
특히 베개 쪽에 있는 정령은 할아버지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얼른 죽어, 라고.
아래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가하란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유를 찾고 해결 방법을 생각할 뿐, 타인을 증오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저 정령은, 웃고 떠드는 저 정령은 너무나도 미웠다.
저 정령의 입을 틀어막을 방법이 있다면 고민하지 않고 쓰고 싶을 정도로.
“그만해요.”
가하란은 정령을 보며 말했다. 크게 말하면 타챠에게 방해될 것 같아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빨리 죽으란 말이야.”라며 실실대던 정령이 입을 다물었다.
찢어진 책을 닮은 정령.
눈동자가 없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날 보고 있다. 그것도 기분 나쁘다는 듯이.
가하란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누군가를 이토록 순수하게 미워한 적은 처음이다.
“꼬마야.”
타챠가 말했다. 날 선 감정을 타이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흘려보내라.”
“아저씨도 들은 거예요? 저 책이 말하는 걸?”
“들었다.”
“그러면….”
“다름을 알아라. 저것들과 넌 다른 층에 있다. 층이 다르다는 건 모든 게 다르다는 뜻이다. 이해하려 하지도 말고, 이해시키려 들지도 말아라.”
“하지만 쟤가 할아버지한테….”
타챠가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하늘로 치솟던 푸른 깃발도 동시에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나는 물론, 너도 어제 닭의 사체를 입에 넣고 즐겁게 씹어 넘겼다. 넌 그 닭이 질렀던 비명을, 그 살덩이에 남아 있던 슬픔을 듣지 못했을 뿐이다.”
순간 어깨가 딱딱해졌다. 열병이 다시 도진 것처럼 몸이 아팠다.
“다르다는 건 그런 것이다. 저것들은 우리와 다르다. 생명을 대하는 자세도,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다. 나도 다를 바 없고.”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공포를,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두려움을 느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가 가하란을 노려봤다. 숨이 콱 막혔다.
“다르다는 걸 아는 자네가 왜 그리 흥분하는 건가.”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핀들론이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할아버지!”
몸을 옥죄던 공포를 털어내며 할아버지에게 가까이 갔다.
“많이 놀랐나 보구나.”
등을 다독여주는 손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따스했다.
“타챠.”
“왜?”
“애한테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걸 자네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만 말하고 쉬어라. 네 상태는 지금….”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핀들론이 마른기침을 토해낸 후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고맙네. 덕분에 한결 낫군.”
할아버지의 숨이 거칠다.
가하란은 잔에 물을 담아 건넸다. 조심스럽게 물을 마신 핀들론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의술사를 찾아가 봐라. 인간의 육체는 인간이 가장 잘 알 테니.”
“충고 고맙네. 그래도 늙은 보람이 있어. 자네가 날 걱정해주는 날도 오고 말이야.”
“저급한 농담은 그만둬라.”
“자네가 하는 농담보다야 훨씬 나은데. 질투하는군.”
웃던 핀들론이 계속 기침했다. 마지막 기침 때는 가슴이 크게 들렸는데, 입에서 피가 나왔다.
“할아버지. 피, 피가….”
“타챠. 가하란을 내보내. 봐서 좋을 게 없으니까.”
타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하란은 안 나가겠다고 버텼으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뒷덜미가 들린 채 결국 집 밖으로 나왔다.
“영감님은요?”
밖에 있던 룽네가 물었다. 다른 어른들도 걱정하는 눈으로 집을 바라보았다.
“의술사가 필요하다. 실력이 아주 좋은 의술사가.”
타챠가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