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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8화 (18/558)

제18화

이형(異形)의 정령들과 함께 하늘을 바닥 삼아 걸었다. 친절한 정령들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고, 고민 없이 걸음을 뗐다.

걷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이 즐거움이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슴이 가득 차오를 때였다.

바닥이 꺼졌다.

몸이 하염없이 추락했다.

손을 붙잡고 걸어주던 정령들이 무심한 시선을 보내며 몸을 돌렸다.

날개는 없고 몸은 무거웠다. 추락은 끝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땅이 보였다.

지면에 눈동자가 닿기 전 가하란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쿵 소리와 함께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에 부딪힌 걸까.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옆을 보았다.

타챠의 강철 같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깼군.”

타챠가 손을 거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늘을 걷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게 꿈이었단 사실을 자각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툴이 다가와 무릎에 턱을 괴지 않았으면, 몇 시간이고 멍하게 있었을 것이다.

가하란은 툴의 턱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살살 긁어주었다.

불현듯 거대한 쥐가 떠올랐다. 산보다 크던 몸, 빳빳하던 흰털, 말랑말랑하면서도 탄력 있던 가죽, 그리고 빛나던 붉은 눈.

다 꿈인 걸까?

하하, 하고 맥 빠지는 웃음이 나왔다. 정령세계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대체 어디까지가 꿈일까?

정령을 본 것도 착각이었나?

그런 특별한 일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걸까?

“누워라.”

“네?”

“아직 누워 있을 때다.”

“괜찮아요. 저 멀쩡해요.”

“몸은 멀쩡하겠지. 하지면 영혼은 그렇지 않다.”

타챠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차가운 손이다. 밀리는 힘에 저항할 수 없어 침대에 다시 누웠다.

눕고 나니 몸 여기저기가 뜨겁다는 걸 깨달았다. 몸살인 걸까.

“열병이다.”

“네?”

“위대한 영령의 자취가 너한테서 느껴진다. 아마도 그분을 뵙고 왔겠지.”

위대한 영령? 가하란은 눈동자를 타챠 쪽으로 굴리며 물었다.

“위대한 영령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열병은 또 뭐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혼이 층 너머에 존재한다. 네가 만난 분은 우리 산의 자식들을 돌봐주는 분이지.”

“제가 만난 분이요?”

반문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짧은 대화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전 꿈을 꾼 게 아닌가요?”

“꿈이 아니다. 넌 잠깐이지만 층을 넘었어.”

“그 거대한 쥐도 그랬어요. 절 보고 층 너머에서 온 놈이라고. 아저씨, 층은 뭐죠?”

“질문은 나중에. 나와 얘기할 심력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군.”

타챠의 손이 다시금 이마를 밀었다. 이번에는 버텨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타챠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뜨거운 콧바람이 가하란의 앞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열병은 잘 다스려야 뒤탈이 없다. 그러니 그 입 다물고 지금은 눈을 감아라.”

딱딱한 말투였지만 안에 담긴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하란은 칭얼대지 않기로 했다. 몸이 아픈 건 사실이니까.

얌전히 베개에 머리를 댔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안다.”

“알려주실 건가요?”

“내가? 왜?”

“물어볼 사람이 아저씨밖에 없어요. 아니, 아저씨는 사람이 아니지만….”

“종족 구분은 상관없다. 신경 쓰지도 않고.”

미열이 가슴팍에서 올라와 머리 전체를 휘어잡았다. 몸이 반쯤 물에 잠긴 느낌이었다. 기분 나쁜 부유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답답해요.”

“열병 와서 그런다.”

“머리도 어지러워요.”

“열병 때문이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아요.”

“열병.”

가하란은 실눈을 뜨고 타챠를 봤다.

“아저씬 제가 귀찮은가요?”

“귀찮다. 난 인간족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

“왜요?”

“그렇게 질문을 던져대니까. 왜, 왜, 왜. 끝도 없지.”

타챠가 깍지 낀 손을 머리 뒤에 댔다. 몸을 벽에 기대며 다시 말했다.

“나이 먹은 놈들의 질문은 겉으론 어려워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간단하다. 잇속이 모든 질문에 답이 되니까.”

“잇속이요?”

“무엇이 더 내게 득이 되는가. 늙은것들의 질문은 언제나 그렇듯 실익을 기반에 둔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지. 어린놈들의 질문에는 이해관계가 포함되지 않아. 현상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지. 그건 본질을 탐하는 질문이자,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어려운 말들이 줄줄 이어서 나왔지만,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희 아빠가 그랬어요. 모르는 건 계속 물어보라고. 어릴 때는 물어보는 게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고.”

“어린놈들의 특권이지. 현인들은 너희들 질문에 친절히 답해줄 것이다. 덕을 쌓은 어른들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난 아니다. 난 귀찮은 건 질색이야.”

“아까는 대답해 주셨잖아요.”

타챠가 눈을 씰룩였다.

“말했다시피 그건 비를 피하게 해준 대가일 뿐이다. 받은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지.”

곁에 있던 툴이 꼬리를 흔들며 타챠에게 다가갔다. 툴은 익숙하다는 듯이 타챠의 두꺼운 허벅지에 몸을 올리고 길게 하품했다.

가하란은 똑똑히 보았다. 기우뚱하며 허벅지에서 떨어질 뻔한 툴을 타챠가 꼬리로 받아내는 걸.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웃음이 나왔다.

“왜 웃냐?”

“아저씨는 역시 착한 사람이에요.”

“열병 때문에 머리가 잘못됐나 보군. 빨리 눈 감고 자라. 앞으로 사흘은 더 가만히 있어야 할 거다.”

“사흘이나요?”

“최소 사흘이다. 네 영혼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보름 동안 침대에서 보내야 할 거다.”

“그건 싫은데….”

“잡담 그만하고 눈 감아라. 아니면 감겨줄까?”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말하는 타챠였다.

“눈 감고 있을게요.”

이럴 땐 얌전히 말을 들어야 했다.

숨을 고르고 긴장을 풀었다. 열기가 바늘처럼 몸을 찔렀다. 이 아픔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나마 다행인 건 통증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사흘 후엔 테리와 제니를 만날 수 있겠지?

“아! 맞다.”

흐리멍덩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타챠가 한심하게 쳐다봤다.

“말을 더럽게 안 듣는구나.”

“죄송해요. 저기, 할아버지는요?”

“할아버지? 핀들론 말하는 거냐?”

“네. 지금 어디 계세요?”

기절할 때 할아버지의 떨리는 눈동자를 봤다. 지금도 잔뜩 걱정 중이리라.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틀 동안 네 옆에 붙어 있었다. 네가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겠다는 걸 억지로 돌려보냈지.”

“네? 이틀이요?”

“그래. 이틀.”

“아니에요. 그럴 리가… 저 진짜 잠깐 눈 감았을 뿐인데.”

“그게 열병의 무서운 점이다. 심하게 앓으면 반병신이 될 수도 있지. 이틀 만에 눈을 뜬 걸 감사해라. 그리고 내 친구에게도 감사하고.”

타챠는 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친구, 핀들론은 이제 늙었다. 호기롭게 세상을 탐험하던 청년은 사라지고, 황혼을 벗으로 삼아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인이 됐지. 인간의 삶은 지독하게 짧다. 허약하게 태어나 더 허약한 상태가 되어가지.”

강인한 전사의 눈동자가 서글퍼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툴이 혀를 내밀어 타챠의 얼굴을 핥았다.

위로해 주는 것이다. 툴은 타인의 감정을 금방 알아채는 영리한 친구니까.

타챠는 툴이 핥는 걸 막지 않으면서 계속 말했다. 진중한 대화 내용과 달리 보이는 광경이 약간 우스웠다.

“자기 앞가림도 버거울 나이인데 널 간호하겠다고 나서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돌려보냈지.”

“다행이네요. 할아버지가 힘든 것보단 제가 아픈 게 나으니까.”

웃음 지으며 말했다.

“옆에서 지켜본다고 열병이 호전되는 것도 아니다. 자리를 지키는 건 무의미하지. 열병은 스스로 이겨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아저씬 제 곁에 있어 주시네요.”

“말했잖냐. 내가 자리를 뜨면 그 미련한 친구가 아득바득 여길 찾아올 테니, 버티고 있는 수밖에.”

타챠의 손가락이 가하란 목덜미에 닿았다. 서늘한 비늘 감촉이 너무나 좋았다. 열기가 식는 기분이었다.

“확실히 전사의 기질이 있어. 더 빨리 털고 일어날 수도 있을 거다.”

“빨리 일어나고 싶어요. 그러고 나서 아저씨 얘기를 들을 거예요.”

“정말로 끈질긴 놈이야.”

가하란은 씩 미소 지었다. 타챠가 이불을 끌어 올려 가하란의 얼굴까지 덮어버렸다.

“그만 웃고 자라.”

“네.”

“대답도 그만하고.”

“알겠어요.”

“넌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족 꼬마다.”

“전 그래도 아저씨가 좋아요.”

끙, 앓는 소리를 내는 타챠였다. 몰래 이불을 내려 타챠를 살폈다.

눈을 감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엿보인다.

“아저씨.”

“한 번만 더 그 입이 열린다면 그땐….”

“고마워요.”

가하란은 얼른 말을 전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사이로 뚫고 들어온 희미한 빛에, 타챠의 낮은 웃음소리가 실려 있었다.

* * *

첼은 하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맡은 임무를 착실하게 해내는 젊은 수행원. 그 유능함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결과 보고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확인하지 못했다?”

“예.”

하브는 간결하게 답했다. 죄송하단 말을 꺼내지 않는 게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겉치레용 사과는 시간 낭비일 뿐이니까.

“내가 무리한 일을 지시한 건 아닐 텐데.”

가하란의 상태를 살피고 와라.

이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증손자는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골목에 살고 있었다.

지금껏 몇 번이나 그 아이를 관찰하고 돌아온 하브가 왜 이번엔 실패했을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타린족 전사가 있었습니다.”

“타린족 전사?”

“예. 푸른 깃대를 들고 다니는 걸 보면 검은 심장 부족 같습니다.”

“특이하군.”

젊을 때 몇 번 타린족 전사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전투를 업으로 삼은 자들. 좋게 말해 무승이고, 나쁘게 말하면 싸움에 미친 놈들이었다.

계획도시 둔에는 타린족이 즐길 만한 유흥이 없을 텐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둔에 지인이 있다고 합니다. 이름은 핀들론이고 가하란과 이웃입니다.”

“얄궂게 됐군. 그 타린족 전사와 내 증손자가 같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왜 같이 있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군.”

“주변인들을 통해 알아보려 했으나 정보를 내주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래?”

“다들 가하란을 지키기 위해 입조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외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 것 같지도 않고요.”

손자가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사실이 떠올랐다. 가하란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컸다고.

첼은 옅게 웃었다.

“문제가 생겼다면 그 이웃들이 뭔가 조치를 취했겠지.”

“계속 관찰하겠습니다.”

“하나만 물어보겠네. 타린족 전사의 눈을 속이고 증손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겠나?”

툭 던진 질문에 하브의 표정이 굳었다. 감정 조절을 잘하는 젊은 친구인데, 이 정도로 당황하는 걸 보면….

“죄송합니다.”

하브 입에서 사죄의 말이 나왔다. 약간의 가능성도 없다는 뜻. 첼은 고갯짓을 했다.

“아닐세. 타린족 전사라면 그 누구라도 힘들겠지.”

첼은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그러면 적임자를 불러야겠군. 루카, 그 친구 얼굴을 봐야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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