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17화 (17/558)

제17화

“뭐?”

타챠가 고개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틀며 물었다.

“여기, 여기 있는 개미가….”

말을 걸어온 개미를 가리킬 때였다.

가하란은 눈을 찡그리며 귓가에 손을 댔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을 헤집었다.

-또 말을 놓네.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 놈아. 내가 너희들 셈법에 따르면 살아온 날짜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압축된 소리가 머리 안쪽에서 팽창하는 기분이었다.

삐, 하는 이명이 들려왔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사물의 형태가 흐릿해졌다. 어지러움이 몸을 덮쳤다.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옆으로 쓰러질 때였다.

큼지막한 손이 몸을 붙들어 주었다. 타챠였다.

“가하란!”

핀들론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머리가 아파요. 소리가, 소리가 너무 많아요.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개미의 음성이 머리를 주물렀고, 핀들론의 다급한 말소리와 툴이 컹컹 짖는 소리는 귀를 괴롭혔다.

-조용히 해봐. 저 인간 아이가 아파하잖아.

-알 게 뭐야. 어차피 전부 뿌리에서 와서 뿌리로 돌아갈 운명인데.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할 거나 하자고.

-저러다 죽으면 어째요? 산의 일족과 친해 보이는데.

각기 다른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주입됐다.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세상은 점점 하얗게 변해갔다. 무차별적으로 머리를 때리던 소리가 이제 거대한 소음이 됐다.

말들이 뒤죽박죽 섞여 이젠 알아들을 수도 없다. 괴물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소리에 밀려 모든 것들이 떠내려간다. 생각과 감정, 느끼는 모든 것들, 거기에 시간까지.

“인간족 꼬마야.”

타챠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흘려보낼 건 흘려보내라. 이해하려 하지 마라. 그건 헛된 욕심이다.”

제가 뭘 어쩌면 되죠?

휘청거리는 자아를 붙들고 간신히 질문을 던졌다. 말로 전한 건 아니지만, 타챠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런 막연한 기대감에 부응하듯 타챠가 말했다.

“지금 들리는 모든 것들은 본래 네가 들었던 것들이다.”

아니요. 전 이런 소리를 들은 적 없어요.

“듣고 무시했을 뿐, 너는 다 듣고 있었다. 다른 인간족들도 마찬가지지.”

너무 어지러워요. 알아들을 수가 없어. 무시할 수도 없어요.

“생각을 놓아라. 이해하려 하지 마라. 어지러운 상태가 네 본래 위치다.”

여전히 세상은 하얀색이었다. 아니, 검은색이었다. 소리로 된 파도는 범람하고 또 범람해 가하란의 정신을 침범했다.

이명이 짙어졌다. 이젠 두렵다는 감정조차 소리에 집어삼켜졌다.

가하란은 직감했다.

사라지고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거대한 것에게 파묻혀 생각 한 톨조차 남기지 못하고 없어질 거란 걸.

그건 싫었다.

아직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아빠에게 도구 쓰는 법을 배워야 했고, 테리 형과 둔을 떠나 탐험을 나서야 했다. 제니와 함께 시장을 구경 가는 것도 놓칠 수 없었다.

타챠의 목소리도, 핀들론의 음성도, 콜의 숨소리도 사라졌다.

온갖 곳에서 들리던 소리도 점차 옅어졌다.

압도적인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하란은 과거 어느 날 보았던 나뭇잎을 떠올렸다. 빗물에 쓸려 의지와 상관없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 결국 사라지고 마는 나뭇잎을.

그렇게 되긴 싫어.

뭐라도 움켜쥐어야 했다. 손의 감각도 없고 뭘 움켜쥐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가하란은 필사적으로 꿈틀댔다.

정적에 휘말려 이젠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였다. 손가락 끝에 무엇인가 걸렸다.

되살아난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손가락 한 마디에서 손바닥으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범위가 늘어났다.

“난 아직 여기에 있고 싶어요!”

목소리가 나왔는지 아니면 착각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려 했고 손끝에 걸린 물체를 움켜쥐었다는 것이다.

손아귀에 들어온 건 까끌까끌한 털이었다. 익숙한 질감이었다. 아빠가 수염을 길게 기른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리라.

-여기까지 떠밀려 온 인간은 흔치 않은데.

다시금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어왔다.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걸까?

걱정과 다르게 목소리는 온화했다. 뇌를 쥐어짜던 개미들의 음성과 달랐다. 포근하고 안심이 된다.

-한 번에 많은 걸 보려고 했구나. 그러니 여기까지 휩쓸려 내려오지. 인간족 꼬마야, 넌 눈이 좋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욕심을 내지 마. 일단 뜨인 눈은 반드시 성장하기 마련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전 욕심 같은 걸 낸 적 없어요.”

이번엔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

-그래? 그러면 정령세계에 어떻게 발을 들이밀었지?

“정령세계요?”

-잠깐만. 너, 좀 특이하구나.

목소리가 그쳤다.

다시 찾아온 고요함이 살짝 불안했지만 겁을 먹진 않았다. 몸으로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근처에 있다는 걸.

근처?

그걸 자각하고 난 뒤에 변화가 생겼다.

앞이 보였다. 여전히 하얀색으로 도배된 세상이지만 볼 수는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이상한 것들이 둥둥 떠다니는 중이었다.

이상한 것. 이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기이한 형태였다.

날개 달린 꽃잎 같기도 하고, 발이 달린 사과 같기도 했다. 방금 눈앞을 지나간 건 머리에 불타는 조약돌을 인 지렁이였다.

불탄다?

색이 돌아왔다. 붉고 푸르고 노란색들이. 거리감도 생기고 깊이감도 구별됐다.

몸의 감각이 완전히 돌아왔다. 가하란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곳’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살폈다. 하얀색 털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무의식중에 움켜쥐었던 게 이 털인가.

이상한 세계였다.

두려움도 잠시, 경이로움에 압도되어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이곳이 ‘정령세계’라고 했다. 들어본 적 없는 곳이다. 정령은 들어봤어도 그들이 사는 세계가 따로 있다니.

손에 걸리는 털을 가볍게 쥐었다.

이 세계는 바닥에 풀 대신 털이 자라나나?

그렇게 빳빳한 털들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이리저리 움직일 때였다.

-간지러운데.

“네?”

-간지럽다고. 뭐, 나쁘진 않아. 인간족을 등에 태워 본 건 오랜만이라서.

등에 태워?

침을 꿀꺽 삼키며 바닥에 손을 댔다. 까슬까슬한 흙이 아니었다. 말랑말랑하면서도 탄력성을 지닌, 동물의 가죽 같았다.

여기가 등이라면….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 할 때였다. 누군가 잡아끈 것처럼 몸이 세워졌다. 그대로 이끌려 지면에서 발이 떨어졌다.

날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점차 확장되는 시야에 넋을 놓았다.

“정령세계….”

층층이 나뉜 하늘은 온갖 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층마다 서로 다른 생명체들이 날아다니고, 뛰는 게 보였다.

저게 다 정령인 건가?

높이, 더 높이 몸이 솟구쳤다.

가하란은 감탄하며 주변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신비로웠다. 꿈에서도 못 본 광경이었다.

이건 상상 따위가 만들어낸 세계가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인 것이다.

-이건 뭐야?

눈앞을 지나가던 작은 새가 말했다. 괴상한 언어였는데, 이해는 됐다.

“저기, 정령이신가요?”

-정령? 아, 층 너머에서 온 놈이구나.

작은 새는 가하란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저기요, 라고 불러봤지만 새는 돌아보지 않았다.

앞을 지나다니는 다른 정령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잠깐 구경하다가 제 갈 길을 갔다.

-너희들은 우릴 못 보지만, 우린 너희들을 자주 봐. 여기까지 내려온 인간족은 신기하지만 거기까지지. 인간 자체는 놀라울 게 없는 동물이니까.

온화한 음성에 가하란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와.”

흰색 털로 뒤덮인 동산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털로 덮인 귀, 짧은 꼬리, 그리고 위를 쳐다보는 붉은 눈.

거대한 쥐였다. 방금 전까지 저기에 누워 있었던 건가.

쥐의 눈동자는 딱 한 번 우연히 보게 된 루비를 닮아 있었다. 반짝이는 붉은 눈이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네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 온 거니까, 이번 한번은 돌려보내 줄게.

“네?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하나요?”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니요, 돌아가고 싶긴 해요. 근데….”

가하란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땅을 보며 말했다.

“여길 더 구경하고 싶어요. 탐험해보고 싶어요.”

-겁이 없구나.

“겁은 나요. 그래도 보고 싶은걸요. 여긴 너무 멋진 곳이에요.”

-심상세계가 독특한 꼬마네. 내 파트너만큼이나.

몸이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거대한 쥐조차 이젠 손바닥보다 작아졌다. 정령세계가 작아질수록 귀로 들려오는 소리가 커졌다.

이건, 핀들론 할아버지 목소리인가?

-눈이 뜨였다고 한들 여긴 오래 있을 곳이 못 돼. 느꼈겠지? 네 영혼이 점점 흐릿해지는 걸.

가하란은 거대한 흰색 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가던 그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한번 구경한 걸로 만족해. 두 번째는 정말 욕심이고, 욕심을 부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다음에 오게 되면, 또 찾아와도 될까요?”

-다음에 오면 난 아마 여기 없을 거야. 바쁘거든. 그리고 기억해둬. 다른 ‘층’에서 온 영혼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다는 걸.

거대한 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꽃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몸을 웅크리며 양옆으로 갈라져 사라지는 불꽃을 보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쥐가 보호해 줬다는 걸.

식은땀이 났다. 동시에 자각했다. 이곳에서 난 벌레보다 못한 존재라는 걸.

거대한 쥐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을 거라는 걸.

-이젠 좀 무섭지?

“네.”

-다시는 오지 마.

“…그건 모르겠어요.”

-너도 참 고집이 세구나.

허리가 확 꺾였다. 잡아끄는 힘이 거세졌다. 거대한 쥐가 이제 티끌보다 작게 변했다.

다채로운 색으로 물든 세계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곧바로 어둠이 찾아들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가하란은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혹시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들렸을까? 아니면 늦은 걸까?

어둠과 빛이 버무려지며 의식이 부상하는 게 느껴졌다. 몸의 온기가 돌아오고 익숙한 소리가 되살아났다.

“가하란! 정신이 드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 때, 아득히 먼 곳에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산테.

가하란은 눈을 번쩍 떴다. 주변이 뿌옇게 보였다.

“얘야, 괜찮니?”

몸을 흔들며 묻는 할아버지였다. 가하란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 후 천천히 주변을 보았다.

담담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타챠가 보였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옆을 지키는 툴이 보였다.

돌아온 것이다.

아빠와 함께 살던 집으로.

“저 혼자만 본 건가요?”

핀들론에게 질문했다.

“뭘 말이냐?”

“정령세계요. 정말 멋진 곳이었는데.”

“얘야, 너 괜찮은 거 맞니? 타챠! 대체 애한테 뭘 한 건가?”

타챠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했다.”

그걸 시작으로 두 어른은 다투었다. 점점 의식이 몽롱해진다. 가하란은 언쟁을 시작한 어른들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기절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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