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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6화 (16/558)

제16화

한 손으로 쥐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창대. 나무가 아닌 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이었으나 중간중간 붉은빛이 감돌았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붉은색을 눈으로 좇으며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창대에 손이 닿았다. 연마재로 잘 다듬은 매끈한 질감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칠었다.

보기와 달리 투박한 창대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표면 작업을 일부러 덜 한 건가요?”

“나한테 묻지 말고 네가 생각해 봐라.”

타챠가 말했다.

가하란은 아빠의 작업 도구를 만지듯 신중하게 창대를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바짝 붙이고 손가락을 최대한 펼쳤지만, 한 손에 쥐는 건 불가능했다.

손이 큰 아빠도 힘들지 않을까.

“어른이 돼도 이걸 한 손에 쥐는 건 힘들 것 같아요.”

“인간족 중에 그걸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자는 드물 거다.”

일단 이 골목에는 없는 게 확실했다. 아빠보다 큰 손을 가진 이웃은 없으니까.

쥐었으니 이제 들어볼 차례였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끙,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반쯤 편 무릎이 바들바들 떨렸고, 나중에는 머리가 핑핑 돌았다.

“…드는 건 안 되겠네요.”

모험담에 나오는 멋진 용사들처럼 창을 들어보고 싶었으나 꿈쩍도 안 했다.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 걸까. 짐작조차 안 됐다. 이런 걸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다니는 타챠가 놀라울 뿐이다.

“천을 풀어 봐도 되나요?”

창대는 볼 만큼 봤으니 이제 칭칭 감긴 천 안쪽을 확인할 차례였다. 감겨 있는 형태로 보건대 큼직한 날이 숨어 있을 것이다.

“봐도 좋다.”

허락이 떨어졌다. 비에 젖어 묵직해진 푸른색 천을 천천히 풀었다.

둘둘 말린 천을 다 풀어내니 담요로 써도 될 만큼 컸다. 직사각형 형태의 천. 끝단 박음질이 섬세했다.

창날 보호용으로 쓰이기에는 아까울 정도였다.

천에서 시선을 떼고 날을 살폈다.

뭉툭한 날이 눈길을 끌어당겼다. 잘 벼렸다고 할 수 없는 날이었다.

그렇다고 관리를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창대와 달리 부드러운 표면에 기름도 잘 먹였다.

바닥에 엎드려 날을 확인했다.

이가 나간 흔적도, 갈려 나간 흔적도 없었다. 사용감은 제법 있는데.

처음부터 무디게 만든 건가?

날의 용도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날카로워야 베기 쉬우니까.

아니면 벨 용도가 아니라 으깨는 용도로 만든 걸까?

길쭉한 형태의 망치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괴력을 발휘하는 도마뱀 전사라면, 손에 쇳덩이만 쥐여 줘도 훌륭한 무기가 될 터였다.

날에 손가락을 대고 살짝 움직여 보았다. 역시, 베이지 않는다. 과일 껍질도 못 깎을 것 같다.

“경비병 아저씨들이 쓰는 창과는 다르네요.”

“어떻게 다르지?”

“날이 뭉툭해요. 하지만 관리를 안 한 건 아니에요.”

“얼추 맞았다. 하지만 아직 겉핥기다. 좀 더 살펴봐라. 육안이 아닌 영혼의 눈으로.”

타챠의 목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귀가 갑자기 이상해진 건 아닐 텐데.

놀라서 타챠를 바라봤다. 타챠는 고갯짓으로 창을 가리킬 뿐이었다. 얼른 살펴보라는 듯이.

“전사의 혼을 지녔다면 보게 될 것이다.”

앞에 놓인 이 거대한 창대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걸까, 가하란은 눈에 힘을 주고 살폈다.

마치 아빠가 내준 숙제 같았다. 아빠는 종종 재미난 문제를 내곤 했다.

종류는 다양했다. 숫자에 관한 것, 그림에 관한 것, 이야기에 관한 것 등등.

그중 뚜렷한 인상을 남긴 건 얼마 전에 본 복잡한 그림이었다.

아빠는 마력선 도안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거병을 만드는 데 쓰이는 중요한 도안이라고 받아들였을 뿐.

선과 선이 엉켜서 만들어낸 기이한 형태.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복잡한 그림을 보고 또 봤다.

봐서 뭘 해야 하는지, 그 안에서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이끌렸다. 보고 있으면 시선을 잡아끄는, 생각을 인도하는 무엇인가가 그 안에 있었다.

눈동자를 움직이고, 때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선의 시작과 끝을 확인했다.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림에 몰두할 때였다. 막힘없이 선을 좇던 눈이, 손가락이 순간 멈췄다.

멈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이질감이, 머리를 굳게 만드는 막막함이 행동을 정지시켰다.

설계도 우측 하단.

답답함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같은 곳을 계속 봤다.

얻는 건 없었다. 착각인가 싶어 다른 곳을 훑어봐도 결국 그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결국 아빠에게 도안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 부분이 이상하게 답답하다고.

아빠라면 이유를 알려줄 것 같았지만, 그 뒤로 별 얘기가 없었다.

말해주지 않는 걸 보면 별 의미 없는,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리라.

“보이는 게 없다면 없다고 말해라.”

가하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떠오른 옛날 일은 잊어버리고, 다시 창에 집중했다.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밝혀내고 싶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감춰진 것을 발견해 내는 건 도시를 탐험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니까.

창대에 뭔가 있는 건가?

아니면 창날에?

눈동자를 바삐 움직이며 구석구석 살필 때였다. 불현듯 바닥에 깔린 푸른 천이 눈에 들어왔다.

감싸개로 쓰기에는 박음질이 깔끔하게 된 천. 눈길이 천으로 옮겨갔다.

천에 두 손을 올려두고 몸을 숙였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천을 뜯어봤다.

뻣뻣한 질감, 사선으로 그어진 결. 그러다가 이상한 사실을 눈치챘다.

비에 흠뻑 젖어서 묵직해진 천이었는데, 어느새 말라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하란은 천을 앞뒤로 들추며 더러운 부분이 있는지 살폈다. 꼼꼼히 살핀 결과 천은 신기할 정도로 깨끗했다.

“아저씨. 이거 어제 빨았나요?”

“그런 적 없다.”

“수선한 적은요?”

“없다.”

“최근에 산 건가요?”

“내가 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나와 함께한 물건이다.”

아저씨는 전쟁터를 9년 정도 돌아다녔다고 했다. 최소 9년, 아니, 그 이상 사용된 천이 이렇게 깨끗할 수도 있나?

빳빳하게 펼친 천 어딜 살펴도 해진 곳이 없다. 빨지도, 수선한 적도 없는 천이 이렇게 깔끔할 수 있나?

비밀은 창대가 아닌 이 천에 있을지도 모른다.

뭘까? 이 신비로운 천과 창대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어.”

짧은 탄성이 본능적으로 나왔다.

창대와 천을 잇는 고리가 눈을 사로잡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창대와 천. 분명 성질이 다른 물건인데, 고리로 연결된 부분을 보니 마치 하나의 물건처럼 느껴졌다.

무릎으로 기어가 고리를 가까이서 봤다.

창대와 같은 재질의 쇠로 만들어졌다. 천은 그 고리에 감겨….

“어?”

이상한 게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하얀색을 띤 무엇인가가 고리와 천의 경계 부근에서 움직였다.

가하란은 손을 내밀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만져보기 위해서.

고리에 손이 닿았다. 따뜻했다. 차가워야 할 쇠가 따뜻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놀라서 손을 뗐다.

이제는 확실히 보인다. 고리 주변에 하얀 것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개미?”

빛나는 개미였다. 눈을 찌푸려야 겨우 보일 정도로 작은 개미들이 고리와 천을 잇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대체 뭐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펴 고리에 가져다 댔다. 모래 알갱이처럼 작은 개미들이 고개를 홱 틀었다.

더듬이 밑에 있어야 할 눈이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생김새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친숙한 느낌이었다.

“이리 와 봐.”

작게 속삭였다. 망설임은 없었다.

고리와 천을 이어주던 수백, 어쩌면 수천 마리의 개미가 조금씩 움직였다.

몇십 마리가 먼저 손가락에 올라탔다. 솜털로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손가락을 고리에서 떼어내고 눈앞으로 가져왔다. 손톱을 작은 동산 삼아 개미들이 움직였다.

그러다 당황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가하란은 타챠를 바라봤다.

“뭐가 보이지?”

“개미요. 작은 흰개미.”

“제대로 봤군. 제구(祭具)를 지키는 작은 친구들이다. 봤으면 이제 내려줘라. 본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면 불안해하니까.”

가하란은 얼른 손가락을 내렸다. 작은 개미들이 재빠르게 고리로 옮겨가 천을 붙잡았다.

“아저씨. 이 개미들은 뭐예요? 그리고 제구는 또 뭐고요? 너무 신기해요.”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싶었다.

이런 걸 보게 될 줄이야.

이게 바로 마법인 걸까?

“제사에 쓰이는 도구다.”

“제사? 무기가 아닌 건가요?”

“무기로도 쓰지. 본래 용도를 말하는 거다.”

“이 개미들은요?”

“산의 친구들. 흔히 정령이라고들 부르지.”

정령.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봤다. 불을 부린다는 유명한 정령술사의 일화는 가하란이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였다.

다루는 사람은 꽤 많지만, 정령을 직접 보는 건 힘들다고 했는데.

가하란은 몸을 바짝 숙여 바삐 움직이는 개미들을 지켜봤다.

“아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 친구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어느 곳에나요?”

고개를 들고 집 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하지만 제구에 붙어 있는 개미들처럼 눈에 밟히는 정령은 없었다.

“눈이 뜨였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걸음마도 못 뗀 아기가 뛸 수 없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다른 정령들도 볼 수 있죠?”

“그 역시 기운을 깨우치는 것과 동일하다. 정답으로 이끄는 길 따윈 없다.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가 찾아낼 뿐이지.”

아쉬운 대답이지만 흥분이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마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정령은 이렇게 발견해 냈으니까.

“신기해요.”

“인간족은 가까이 있는 것들을 못 보는 경향이 있지.”

“그러게요.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못 보고.”

종일 지켜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말을 걸어도 되나요?”

“네 부름엔 답하지 않을 거다. 이제 막 눈을 뜬 영혼에 대답해줄 정도로 한가한 친구들은 아니니까.”

“바빠 보이긴 해요. 그러면 인사만 할게요.”

가하란은 고리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말했다.

“안녕. 내 말이 안 들리겠지만,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그때였다. 흰색 개미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말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더듬이가 황금색인 개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웅얼대는 소리가 머릿속에 전해졌다. 귀로 들리는 게 아니었다.

단어가 제멋대로 날뛰다가 어느 순간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조합됐다.

-어린놈이 얻다 대고 반말이야. 확 그냥!

컬컬한 목소리에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저기, 아저씨.”

“왜?”

“저… 혼났어요.”

타챠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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