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타챠.
그게 도마뱀 전사의 이름인 것 같았다. 생소한 이름을 입 안에서 굴리다가 내뱉으려 할 때였다.
타챠의 눈이 가하란을 향했다.
“내 이름을 말할 생각이라면 그만둬라. 나는 내가 인정한 자들에게만 이름을 알렸고, 영혼이 엮이는 걸 허락했다.”
“아저씨는 되고 이름을 부르는 건 안 되나요?”
“타린… 산의 전사에게 이름은 귀중한 것이다. 물론 네 멋대로 내 이름을 부를 수 있겠지. 그건 네 자유니 막을 순 없겠지만, 내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거다. 난 기분이 상할 때마다 주먹을 휘두르는 버릇이 있고.”
두꺼운 팔을 가볍게 휘젓는 타챠였다. 가하란은 턱까지 올라왔던 이름을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가서 열어줘라.”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다급한 노크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할아버지, 지금 열어 드릴게요.”
잠금쇠를 풀고 문을 밀었다. 비옷을 입은 핀들론이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별문제는 없는 것 같구나.”
“네. 그리고 손님은 안에 계세요. 타… 아니,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집 안을 가리킬 때였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핀들론 뒤쪽에 낯선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에 맨 넥타이는 눈에 확 들어왔다.
청색 넥타이. 행정처 관료 같았다. 아닐 수도 있지만.
“고맙네. 자네 덕에 올 수 있었어.”
“아닙니다. 부탁하실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빗속에서 인사를 마친 남자가 몸을 돌렸다.
핀들론이 비옷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벽에 기대앉아 있던 타챠가 몸을 일으켰다.
“늙었군, 핀들론.”
“우리는 일찍 늙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보단 자네,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변하지 않았다니? 난 전사로서 매일 발전하는 중이다. 그 맹한 눈은 여전하군. 내 영혼을 보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이 단련된 육체를 못 알아보다니.”
“그 재미없는 입담은 여전하군.”
“품격 높은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도 여전해.”
타챠가 손을 내밀었다. 핀들론은 타챠의 손가락 두 개를 붙잡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불을 땔까요?”
여름이라고 해도 비가 오는 밤이었다. 타챠는 괜찮을지 몰라도 할아버지는 추위를 탈 것이다.
“부탁해도 되겠니?”
“그럼요.”
주방 쪽문을 열고 나갔다. 쌓아둔 마른 장작을 챙겨 벽난로로 갔다. 아빠가 만든 벽난로는 성능이 좋아서 거실이 금방 따듯해질 것이다.
부싯깃을 밑에 깔고 불을 지폈다. 불꽃이 타오르고 동시에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연합왕국에서 원하는 걸 얻었나?”
“원하는 걸 얻었다면 난 산으로 돌아갔거나 땅에 묻혔겠지. 전사로서 말이야.”
무슨 얘기일까. 가하란은 불길이 장작에 옮겨붙은 걸 확인하고 슬그머니 핀들론 옆으로 움직였다.
“저도 같이 들어도 될까요?”
놓치기 아까운 자리였다. 타린족 전사의 여행기라니. 밤을 새워서라도 듣고 싶었다.
“타챠. 이 아이를 옆에 두어도 되겠나?”
핀들론이 물었다. 타챠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네가 그리하고 싶다면.”
핀들론이 눈짓했다. 가하란은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식탁 밑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던 툴도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여전히 혼자인 것 같군.”
타챠가 말했다. 핀들론은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답했다.
“이 나이가 되면 인간은 누구나 혼자가 되지. 그렇게 말하는 자네도 여전히 혼자인 것 같은데?”
“난 산의 영령과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부족으로 돌아가면 내 품에 안길 여자가 적어도 넷은 넘고.”
“외롭지 않아 좋겠군.”
옅게 웃는 핀들론이었다. 가하란은 잠시만요, 하고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음식을 준비하고 주전자에 물을 받았다.
“드시면서 얘기하세요.”
음식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전자는 벽난로 안쪽에 걸어두었다.
타챠가 뼈가 붙어 있는 고깃덩이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으득으득 뼈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자네가 돌아온 걸 보니 15년 전쟁이 정말 끝을 맺었나 보군.”
“전쟁이야 5년 전에 끝났다고 봐야 하지. 전선을 돌아다녀도 전투를 겪지 못했어. 격전을 치러온 대전사들을 만나고 싶었지만, 내가 본 건 시간 때우기에 바쁜 군인들뿐이었지.”
타챠는 지루했다는 듯이 크게 하품했다.
“4년 전부터는 제국 변경을 돌아다니며 대전사들을 찾아다녔다. 강자들은 많았지. 하지만 내게 패배를 알려준 대전사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게 중요한 걸까?
“몇 년 동안이나 전쟁터를 돌아다니신 건가요?”
대화가 잠시 멈췄을 때 가하란이 끼어들었다. 타챠는 왼팔에 턱을 괴며 말했다.
“9년 정도 돌아다녔다.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리에 루론 바다마을에서 부랴부랴 움직였었지.”
가하란은 살짝 긴장하며 질문을 이어 나갔다.
“전쟁터는 어떤 분위긴가요?”
“이곳과 다를 바 없다. 항상 참혹하지도, 항상 즐겁지도 않지. 전쟁 양상이 바뀔 때야 분위기가 극변하지만.”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봤으나 뚜렷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막연한 공포만 가득할 뿐.
“인간족 꼬마야. 궁금하다면 네 발로 직접 가서 보는 게 좋을 거다. 지금은 시체 썩는 내가 덜 나겠지만, 판네 산맥으로 가보면 여전히….”
타챠의 말을 중간에 자른 건 핀들론의 기침이었다. 타챠가 입을 씰룩거리다가 음식에 손을 뻗었다.
“가하란. 전쟁은 일어나선 안 될 끔찍한 일이란다. 또한 전쟁터는 위험한 곳이고. 혹여나 호기심으로 그런 곳에 갈 생각 말아라. 종전 선언이 됐다고 한들 위험한 건 매한가지니까.”
다그치는 듯한 핀들론의 눈빛에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관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핀들론. 새끼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차피 세상은 저 꼬마를 휩쓸고 지나갈 거다. 죽을 때까지 품에 안고 키울 생각이 아니라면 사실을 알려주는 게 바람직하지.”
타챠가 말했다.
“그건 자네들 방식이겠지. 우린 자네들처럼 육신이 강하지도, 정신이 굳건하지도 않아. 특히 어릴 땐 더욱 그렇지. 그래서 어른의 지도와 보호가 필요한 거고.”
“교육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대상에 따라 교육 수준은 바뀌어야 하지. 이 꼬마는 전사의 기질을 가졌다. 육신은 허약하지만 영혼은 쓸 만하지.”
갑작스레 날아든 칭찬에 가하란은 부끄러움을 담아 웃었다. 하지만 이어진 타챠의 말이 웃음기를 거두어갔다.
“물론 부실한 그릇에 담긴 영혼은 꼬꾸라지기 마련이니 조심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만.”
가하란은 자신의 팔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제니만큼이나 하얗고 얇은 팔. 짓궂은 말을 좋아하는 몇몇 어른들은 커서 남자구실도 못 할 거라고 웃곤 했다.
가볍게 놀리는 말이란 걸 알면서도 속상할 때도 더러 있었다.
“뭘 하면 체력을 기를 수 있을까요?”
타챠에게 질문을 던졌다.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번쩍 들어 올릴 것 같은 도마뱀 전사라면 남다른 비법이 있지 않을까?
“부딪치고 깨지는 것. 육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네가 공을 들인 만큼 발달하지.”
“부딪치고 깨진다는 게 어떤 말이죠?”
“일단 대지의 혼과 하늘의 숨이 깃든 높은 산에 올라 온몸으로 자연을 받아들이며….”
“이보게, 친구. 과거에도 몇 번을 말했지만, 자네들 방식은 우리 인간이 버텨낼 수준이 아닐세.”
핀들론이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눈이 내려앉은 산에서 버틸 수 있겠니?”
눈발이 휘날리는 산에서 맨몸이라. 발가락이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아니요.”
“절벽에서 떨어지고 돌밭에서 구르는 건?”
“힘들 것 같아요.”
“이 친구들이 몸을 단련하는 방법이 바로 그런 거란다. 우리가 쓰는 체력단련과 개념 자체가 다르지.”
고개가 타챠 쪽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 말대로 저런 비늘이라면 돌밭을 굴러도 괜찮을 것이다.
“인간족의 거죽은 너무 야들야들하지. 쓸데없이 말이야.”
타챠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기초훈련도 못 버티는 육체로는 다른 방도가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단련을 못 하는 건 아니지. 인간족 중에서도 훌륭한 전사가 많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계에 계속 도전하지.”
타챠가 손가락을 세워 가하란의 가슴을 쿡 찔렀다. 손가락 하나로 미는데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겨우 중심을 잡고 타챠를 바라보았다.
“우선 너 자신을 이겨라. 어제의 너를 이기고, 오늘의 너를 이겨라. 인간족은 목숨이 짧은 만큼 치열하게 배우고 터득하지.”
심장 부근을 누르던 타챠의 손가락이 천천히 떨어졌다. 가하란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물론 노력한다고 해서 아무나 위대한 전사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전… 위대한 전사보다는 훌륭한 기술자가 될 거예요. 물론 체력도 기를 거고요. 아빠가 그랬거든요. 쇠를 만지는 건 꽤 힘든 일이라고.”
검을 들고 싸우는 멋진 기사도 꿈꿨었지만, 가슴 중심에 자리 잡은 건 아빠와 같은 기술자였다.
“뛰어난 대장장이 역시 강인한 영혼이 필요하지.”
그렇게 말하며 빈 그릇에 손을 내미는 타챠였다. 꽤 많았던 음식이 대화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사라졌다.
타챠가 눈을 꿈뻑거리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더 없냐?”
“네?”
“음식 말이야. 있으면 더 가져와라.”
뻔뻔한 부탁이었지만, 성격과 잘 어울려서 이상하게 얄밉지는 않았다.
핀들론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해해라. 이 친구가 유독 뻔뻔하단다. 수행을 떠난 타린족이 여행객들에게 음식을 요구하는 경우는 잦지만, 이 친구처럼 철판을 까는 경우는 드물어.”
“공짜로 얻어먹은 적은 없다. 언제나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고 해두겠네.”
대화만으로도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었다. 핀들론은 언제나 점잖게 웃었는데, 타챠 앞에서는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만큼 편하다는 뜻이리라.
“더 가져올게요.”
“내가 다 미안하구나. 철없는 친구 때문에.”
“아니에요, 할아버지. 안 그래도 저 혼자 먹기 힘들 정도로 음식이 많았어요. 다들 챙겨 주셨거든요.”
주방에서 음식을 한가득 가져왔다. 타챠 앞에 그릇을 내려놓기 무섭게 음식이 사라졌다.
“천천히 드세요.”
“천천히 먹고 있다.”
저게 천천히 먹는 거구나. 대식가들도 타챠 앞에선 꼬리를 말아야 할 것이다.
사과를 통째로 입에 넣던 타챠가 왼손으로 거대한 창을 가리켰다.
“쇠 만지는 기술자가 꿈이라고 했지?”
“네.”
“그럼 이걸 봐봐라. 식견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테니. 그걸로 음식값을 치른 거로 하자.”
눈길이 창으로 향했다.
푸른 천으로 칭칭 감긴 창.
궁금하긴 했다.
얼마나 무거울지, 어떤 쇠로 만들어졌을지.
“그걸 만지면서 느끼는 게 있다면, 나름 재주가 있는 거겠지.”
“특별한 창인가요?”
“질문하기 전에 우선 움직여라.”
타챠가 창을 번쩍 들어 가하란 앞에 내려놓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