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기운은 누구나 가진 것이다.”
“그러면 저도 기운이란 게 있나요?”
“있다. 다르게는 마나라고도 표현하지. 인간족에게는 이쪽이 좀 더 알기 쉬우려나?”
“마나. 들어는 봤어요.”
땅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다는 미지의 힘.
마나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을 마법사, 마나를 기술과 접목한 걸 마법공학이라 부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 마나가 없는걸요?”
마법사는 아주 특별하다고 들었다. 아빠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보고 깜짝 놀랄 마법을 쓰는 마법사는 정말 드물다’는 것이다.
마법이란 말에 호기심을 느끼고 테리와 함께 여러 가지 실험을 해봤지만, 마법은커녕 마나의 털끝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런 마나가 나한테 있다?
“뿌리의 숨을 받고 태어난 이상 누구나 기운, 마나를 갖고 있다. 단지 감각하는 게 어려울 뿐이지.”
“어떻게 하면 느낄 수 있어요?”
“모른다.”
“네?”
단호한 대답이었다.
“기운을 느끼고 나아가 그 힘을 빌리는 건 가르침의 영역이 아니다. 스스로 깨우쳐야 하는 거지.”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마뱀 전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집중해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아저씨는 어떻게 깨우쳤나요?”
“내 기억이 시작된 순간에 이미 난 알고 있었다. 산의 전사들은 영령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지. 그렇기에 인간족과 달리 계기가 필요 없다. 우리는 숨을 마시는 것처럼 기운을 느끼고, 나아가 이용하지.”
긴 혓바닥으로 눈을 닦으며 말하는 전사였다.
“숨을 참아봐라.”
가하란은 숨을 한껏 들이켠 후 입을 다물었다. 손으로 코를 막고 최대한 숨을 참아봤다.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귀를 때리고 더는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 때, 푸하 하고 숨을 토해냈다.
“살아가는 모든 것에게 숨이 필요한 것처럼, 마나 역시 필요하다. 기운이 마르면 생을 다하는 거지. 못 느낀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저도 언젠가는 기운을, 마나를 느낄 수 있을까요?”
“알 수 없다. 어떤 인간족은 빵을 만들다가 기운을 깨우쳤다. 또 어떤 인간족은 글을 옮겨 적다가 마나를 감지했다. 그들은 바란 적 없지만 기운을 알게 된 거다.”
도마뱀 전사는 손을 움켜쥐며 이어서 말했다.
“마나를 깨닫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인간족 전사를 수없이 만나 봤다. 하지만 그들 중 기운을 느끼고 사용법을 터득하는 건 극소수였지.”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건가요?”
“노력은 중요하다. 시도조차 안 하면 가능성은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어떤 식으로 노력해야 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 가르칠 수도 없다. 운 좋게 방향이 맞아 노력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평생 다른 우물만 팔 수도 있지.”
“노력해도 얻지 못한다면 슬플 거예요. 하지만… 그 과정만큼은 분명 즐거울 거예요.”
가하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빠는 말했다. 결과는 과정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넌 전사의 소질이 있구나.”
“정말요?”
“정신적으로는 썩 나쁘지 않다. 하지만 육체적으론 허약하군. 인간족이니 어쩔 수 없나?”
도발적이고 깔보는 듯한 어투였으나 기분 나쁘진 않았다.
사실에 기반한 말이니까.
무엇보다 난 전사보다는 기술자가 되고 싶다. 거병을 만들어내는 마에스트로가.
“불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쇠를 내려칠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돼요. 전사도 좋지만 전 기술자가 되고 싶거든요.”
“기술자?”
호기심을 보이는 도마뱀 전사였다. 가하란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네! 전 거병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고 싶어요. 치프가 꿈이에요. 나아가 마에스트로가 돼서 제 손길이 닿은 거병을 만들고 싶어요.”
“그 무식한 파괴 도구가 뭐 그리 좋다고.”
가하란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거병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에요. 지키는 게 목적이라고 했어요.”
“지키는 게 목적이라고? 누가?”
“아빠가요.”
“그럼 네 아빠는 틀린 대답을 해준 거다. 아니면 거짓말을 한 거겠지.”
“아니에요. 거병은 수호신이라고 다른 사람들도 말했어요.”
도마뱀 전사가 고개를 쳐들었다. 크하하,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크게 웃는다.
“인간족 꼬마야.”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가하란을 부르는 전사였다.
“거병을 실제로 본 적이 있냐?”
“봤어요. 가까이서 본 건 아니지만.”
“어디서 봤지?”
“여기서요. 둔 중앙 거리. 차량에 실려 가던 도중에 잠깐 일어서는 걸 봤어요.”
1년 전에 본 거병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잠시 움직였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압도당했다.
땅을 딛고 선 거대한 수호신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그날 아빠가 말해준 거였다. 거병은 도시를 지키는 방패이자 수호신이라고.
“이 안전한 곳에서 거병이 꿈틀대는 걸 봤다는 거군.”
“뭐가 다른가요?”
도마뱀 전사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나는 전선에서 그 끔찍한 도구가 움직이는 걸 보았다. 대지를 짓밟고 움직이는 쇳덩이. 전진만이 탄생의 이유인 병기. 오직 파괴를 목적으로 인간족이 만들어낸 지랄맞은 도구지.”
싸늘하게 식은 전사의 목소리였다. 구역질이 난다는 듯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목덜미에 돋아난 비늘들이 위로 솟구치는 게 보였다.
아빠의 의견과 정반대되는 말이었다.
반발심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말을 삼켰다.
“거병은 수호신 같은 게 아니다. 용도에 맞게 설계된 끔찍한 기계일 뿐이지. 거기에 전사의 혼 같은 건 깃들지 않았다.”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은 알겠어요. 하지만 우리 편일 땐 수호신이잖아요. 우리를 지켜주니까.”
“그게 틀렸다는 거다. 넌 거병이 어떤 식으로 운용되는지 전혀 몰라.”
도마뱀 전사가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너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거병이 뭘 어떻게 지켜준다는 거지?”
“그 커다란 몸으로, 팔로 우릴 지켜줄 거예요. 나쁜 놈들이 공격해오면 그걸 막아내는 거죠. 거대한 방패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던 전사가 슬쩍 팔을 뻗었다. 서랍장 위에 놓아둔 거병 모형이 전사 손에 들어갔다.
“거병이군.”
“아빠가 만든 거예요.”
“손재주가 뛰어나군.”
전사가 바닥에 거병 모형을 내려놓았다.
“네 말대로라면 적들이 진군해 올 때, 거병이 이런 식으로 너흴 보호해 준다는 건가?”
가하란은 눈앞에 놓인 거병을 보았다. 등은 보인 채 굳건하게 서 있는 거병을.
“네. 뚫리지 않는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어요.”
“틀렸다. 거병은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 않아.”
“그러면 설명해 주세요. 나쁜 사람들이 이 도시를 공격할 때 거병이 어떻게 하는지.”
도마뱀 전사가 거병 모형을 들어 올렸다.
“아주 간단하지. 이 전략병기는 방어 목적으로 절대 쓰이지 않는다. 오로지 전진할 뿐이지.”
도마뱀 전사가 거병 모형을 살며시 쥐었다.
“가령 네가 지켜야 할 도시고, 내가 나쁜 놈이라면 거병은….”
거병 모형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긴 도마뱀 전사가 가하란을 흘깃 보았다.
“이런 식으로 적진을 향해 나아간다. 거병은 멈추지 않아. 전선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니까.”
“거병이 앞으로 뛰쳐나가면 우리는 누가 지켜주죠?”
“너희 스스로 지켜야지. 아니면 도망치든가. 거병은 오직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단순한 파괴 병기는 앞에 놓인 걸 섬멸하는 것만 생각하지. 그게 유일한 작전이고.”
가하란은 상상해 보았다.
불바다가 된 도시를 등지고 앞으로 뛰쳐나가는 거병을. 도와달라는 외침을 무시하고 적을 향해 진격하는 거대한 전사를.
그건 오랫동안 품어온 거병의 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닐 수도 있잖아요.”
“거병은 오직 다른 거병을 대적하기 위해 운용된다. 혹은 승리한 공성전에 투입될 뿐이지. 방어 목적으로 거병을 움직인다? 난 지난 전쟁 때 여러 차례 거병을 목격했지만 방어 목적으로 쓰인 건 본 적이 없다.”
고저가 없는 목소리.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기에 별 감흥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가하란은 거병 모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빠는 거병이 우리를 지켜줄 거라고 말했다. 나쁜 놈들이 나타나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막아줄 거라고.
“무엇보다 네가 말하는 나쁜 사람이 뭔지 궁금하군. 알아둬라. 거병이 투입되는 전쟁이라면 좋고 나쁨은 아무 의미가 없다.”
도마뱀 전사가 거병 모형을 반 바퀴 돌렸다. 등을 보였던 거병이 이제 가하란을 향해 섰다.
“시점만 바꾸면 네가 나쁜 놈이 될 수도 있다. 전쟁에서 선악은 모든 게 끝난 후에 정해진다. 연합왕국과 제국, 둘 사이를 전전하는 우리가 봤을 때 양측은 다를 바가 없다.”
전사가 손등으로 거병을 툭 밀었다. 바닥을 쓸며 코앞으로 다가온 거병을 가하란은 양손으로 쥐었다.
“아저씨는 거병이 있어선 안 될 물건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다. 나는 수행에만 집중할 뿐. 인간족 방식에 관심 둘 이유가 없지.”
가하란은 거병을 만지작거렸다.
가족을, 친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아니라 그저 파괴만을 목적으로 삼는 병기.
“바꾸면 어떨까요?”
“뭘?”
“거병이요. 사람을 지키는 멋진 수호신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할 수 있다, 없다는 내가 답할 영역이 아니다. 그건 인간족 전체의, 아니, 우두머리들의 의견에 따라 갈리는 거니까.”
“어른들을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마뱀 전사가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괜찮은 농담이었다. 인간족 꼬마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어려울까요?”
“답을 구하지 말고 실행해 봐라. 물론 성공률은 낮겠지.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거병 운용법은 못해도 이백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정형화됐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고.”
도마뱀 전사가 창을 들어 무릎에 올려두었다.
“거병에 대해 더는 해줄 말이 없다. 내가 본 건 그게 전부니까.”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병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당사자가 더는 할 말이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기운이 뭔지는 대강 설명이 됐으니, 이제 산의 자식에 대해 말해주겠다.”
복잡한 마음을 정돈하고 다시 귀를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타린족과 대화할 수 있겠는가.
섭섭한 마음보다 기대감이 아직은 더 컸다.
“너희 인간족이 우리를 부를 때 타린족이라 하지만, 우린 우리 스스로를 산의 아이, 산의 자식이라 부른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린 태어날 때부터 산의 영령과….”
말을 늘어놓던 도마뱀 전사가 고개를 현관 쪽으로 돌렸다. 귀라 생각되는 부분이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온 것 같군.”
“네? 누가요?”
“내 오랜 친구가.”
그리고 잠시 후.
빗소리를 뚫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 안에 있니? 타챠가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