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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12화 (12/558)

제12화

“…그래서 네 아빠가 그날 주점에 있는 사람들에게 술을 사야 했지. 지금도 그 가게에 가면 사람들이 네 아빠를 알아보고 말을 걸곤 한다. 오늘은 술 안 사냐고.”

루카는 말꼬리에 웃음을 붙이며 이야기를 끝냈다.

“시간이 꽤 지났구나.”

루카 말에 가하란은 시계를 보았다. 벌써 2시간이 흘렀다. 아빠에 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혼자 자는 거 무섭지 않니?”

“툴하고 같이 있어서 괜찮아요.”

발치에 엎드려 있던 툴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루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하던 툴도 지금은 얌전히 굴었다.

“듬직한 친구구나.”

“저보다 어리지만 듬직하긴 해요.”

루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보마.”

“내일도 오시나요?”

“시간이 나면.”

루카가 네모난 철판을 내밀었다. 가하란이 손에 움켜쥘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다.

“갖고 있어라. 혹시라도 집에 문제가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걸 들고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와라.”

아저씨가 있는 곳.

가하란은 철판에 각인된 문양을 보았다. 펼쳐진 책 위로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검.

둔 중심지에서 볼 수 있는 군부의 상징이었다.

“군부에서 사용하는 인식패다.”

“제가 군부에 가도 되는 건가요? 다른 어른들은 절대 가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

“그걸 갖고 오면 괜찮을 거다. 별 이유 없이, 장난삼아 찾아오는 건 곤란하지만… 너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

루카와 함께 현관으로 걸어갔다. 툴이 꼬리를 살랑이며 따라왔다.

루카가 문을 열었다. 열기가 남아 있는 밤바람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가하란은 순간 아저씨, 하고 붙잡을 뻔했다. 혼자 있는 집은 쓸쓸하고 무서우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네 아빠는 곧 돌아올 거다.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지만 잘 해결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정말요?”

“그래. 내가 약속하마.”

루가는 손에 든 군모를 반듯하게 눌러쓰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하란은 루카의 등을 계속 바라봤지만, 루카는 뒤돌아보지 않고 골목에서 사라졌다.

아빠였으면 아마 몇 번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아빠와 루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해진 걸까.

다음에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툴. 다음에 아저씨 오면 반갑게 맞아줘.”

수북한 털 사이에 손을 넣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식탁을 치우고 촛불을 켰다. 수없이 읽어서 너덜너덜해진 책을 들고 침대에 앉았다.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지만, 워낙 비싸다 보니 사 달라는 말을 못 꺼냈다. 나중에 급여를 받게 되면 그때 직접 사리라.

곰삭은 표지를 넘기자 저자의 인사말이 나왔다. 눈 감고도 욀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읽은 문장.

“세상은 넓고도 좁다.”

가하란은 인사말 첫 줄을 소리 내 읽었다.

누군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을 꼽으라면, 가하란은 주저 없이 인사말 첫 줄이라고 말할 것이다.

툴이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책을 읽을 때면 언제나 옆구리 사이로 파고들어 고개를 비죽 내밀었다.

동그란 툴 머리에 팔을 살짝 기대고 책장을 넘겼다.

책 안에는 높은 산이 있고, 짠 내 나는 바다가 있으며, 복잡한 도시가 녹아들어 있었다.

가하란에게 이 책은 위대한 모험서였다.

“툴, 알파치는 어떤 사람일까?”

미식가이자 여행가인 ‘알파치’. 아빠 말에 따르면 알파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여자라고 했다.

하긴, 보통 사람이 50년간 여행을 다니며 수기를 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두툼한 책 첫 페이지에 로페나에서 만난 어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책 끝부분에 가면 그때 만난 어부의 손녀가 나온다.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그 초록빛 눈동자도.

어부가 한 말이 책에 인용돼 있는데, 글귀만 보면 알파치는 늙지 않는 것 같았다.

궁금해서 아빠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냐고.

아빠의 대답은 명쾌했다.

‘세상은 넓으니까 그런 사람도 있을 거야. 어쩌면 역사 속 드래곤일지도 모르지.’

가하란은 책을 잠시 덮고 상상했다.

알파치가 만약 드래곤이라면, 드래곤은 또 어떻게 생겼을까?

먼 옛날에는 드래곤, 용이라는 것들이 인간 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날씨를 바꾸기도 하고, 하늘과 땅을 뒤집기도 하며,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는 신비한 생명체.

입을 통해 전해지는 생김새는 워낙 다양해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아빠는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을 거라 믿었고, 루드 아저씨는 큰 지렁이를 상상하면 된다고 했다.

사람보다는 큰 지렁이가 좀 더 멋지지 않나, 하고 가하란은 생각했다.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가하란은 툴을 보며 말했다.

‘하늘석’에 용이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된다면, 거기서 드래곤을 보게 된다면 준비한 질문을 잔뜩 쏟아낼 것이다.

정말 드래곤인가요? 정말 비를 뿌릴 수 있나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 엄마도….

월월, 툴이 갑자기 고개를 쳐들며 짖기 시작했다. 와락 일그러뜨린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군인들이 집을 수색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툴을 끌어안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괜찮다고 다독여도 성난 이빨이 도드라질 뿐이었다.

왜 이러는 거지?

덩달아 걱정되고 살짝 무서워질 때였다. 침을 뚝뚝 흘리며 으르렁대던 툴이 이번에 침대 밑으로 숨어들었다.

꼬리를 말고 몸을 바짝 숙이며 낑낑댔다. 그렇게 화를 내더니, 이번엔 잔뜩 겁을 먹었다.

툭툭. 처마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비 때문에 예민해진 건 아닐 것이다.

툴은 비가 오는 날에 신나서 방방 뛰는 애지, 겁먹고 숨어드는 애는 아니니까.

몸을 바닥에 붙이고 침대 밑으로 숨어든 툴을 살폈다. 툴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으로 현관을 보고 있었다.

아니, 현관 너머의 무엇을 바라보는 듯했다.

가하란은 침과 함께 긴장감을 삼켰다. 군인이 들이닥쳤을 때 툴은 열심히 짖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다.

이번엔 내가 용기를 낼 차례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툴을 두려움에서 건져내야 했다.

“여기 있어.”

툴에게 속삭인 후 현관으로 걸어갔다.

빗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빗방울이 지붕을 후려쳤다.

현관문 앞에 서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때, 빗소리를 뚫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질척대는 흙이 거칠게 튀는 소리였다. 동시에 무거운 물건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도 났다.

밖에 누가 있는 건 분명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누가 이 앞을 지나가는 걸까?

여긴 골목 끝이었다. 여기까지 걸어왔다면 목적지는 세 곳뿐이었다.

맞은편 핀들론 할아버지네와 그 옆 룽네 아줌마네, 그리고 이곳.

가하란은 현관문에 난 감시창 덮개를 열었다. 작게 뚫린 창밖으로 어두컴컴한 골목이 보였다.

도시가 물에 잠기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을 덮은 비 한가운데, 무엇인가가 보였다.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 큰 ‘그것’은 길쭉한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콰강, 빛이 먼저 번쩍이고 천둥이 뒤따랐다. 시야가 한순간 트였고, 가하란은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비늘로 덮인 길쭉한 얼굴. 천으로 칭칭 감은 거대한 창. 몸에 걸친 비옷 바깥으로 길게 삐져나온 꼬리.

인간이 아니었다.

거대한 덩치와 번들거리는 눈.

찰나의 빛이 사라지고 그것은 다시 어둠에 잠겼으나, 뇌리에 각인된 인상은 더욱 선명해질 뿐이었다.

가하란은 떨리는 숨을 참으면서 그것을 계속 관찰했다.

공포보다는 앎의 욕구가 조금 더 컸다. 언젠가 저런 종족에 대해 들어본 것 같은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침침한 골목을 눈으로 살피며, 캄캄한 머릿속을 뒤적거릴 때였다.

눈이 마주쳤다. 세로로 찢어진 큼지막한 눈동자가 가하란을 직시했다.

두려움이 목덜미를 잡아당겼지만, 이상하게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가하란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큼직한 눈동자를 바라봤다.

입술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밀려들었던 공포가 차츰 옅어졌다.

익숙하지 않은 외관을 가졌지만, 그것만으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저 눈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집으로 쳐들어왔던 군인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위축되는 건 사실이나 기피할 대상은 아니었다.

적어도 가하란이 보기엔 그랬다.

다시 한번 번개가 번쩍였다. 이번엔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도마뱀. 앞에 서 있는 건 거대한 도마뱀이었다. 아니, 두 다리로 걷고 두 팔이 달린 도마뱀이라면….

“타린족!”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던 단어가 그제야 떠올랐다. 아빠는 말했다. 이 땅 위를 살아가는 건 ‘인간족’뿐만이 아니라고.

싸움을 사랑하는 산의 전사들.

전투를 업으로 삼고, 패배를 배우기 위해 무승(武僧)으로 살아가는 자들.

도마뱀 전사가 시선을 거둬갔다. 골목을 두리번거리는 게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더니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팍이 동산처럼 부풀어 올랐다.

가하란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곧이어, 도마뱀 전사의 입이 열렸다.

“핀들론! 옛 친구가 만나러 왔다!”

빗소리를 지워버리는 목청이었다.

도마뱀 전사 주변으로 떨어지던 비가 한순간 음파에 밀려 튕겨져 나갔다.

몸을 들썩이게 하는 음성이 골목을 메아리치다가 사라졌다.

골목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다들 놀라서 얼굴을 내민 것이다.

가하란은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몇몇 이웃들도 집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도마뱀 전사는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두꺼운 꼬리를 휘적거리며 기다릴 뿐이었다.

물건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는 저 꼬리에서 난 거였구나, 가하란은 진흙을 긁는 꼬리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입술을 떼기 무섭게 도마뱀 전사가 쳐다봤다. 빗소리 때문에 안 들릴 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지금 집에 안 계세요.”

“핀들론이 없다고?”

“네. 일 때문에 잠깐 나가셨을 거예요.”

“너, 핀들론의 핏줄이냐?”

“아니요. 저는 여기 살고, 할아버진 맞은편에 사세요. 이웃이죠.”

“그렇군.”

불 꺼진 집을 바라본 도마뱀 전사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화해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위압감은 들지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아빠가 말하길 타린족은 거칠지만, 도리를 아는 종족이라고 했다. 예의를 지키면 예의로 대해주는 자들.

“거기서 기다리시게요?”

“곧 오겠지.”

“오늘은 아마 안 돌아오실걸요?”

도마뱀 전사의 눈이 찌푸려졌다. 가하란은 귀 뒤쪽을 살짝 긁으며 물었다.

“저희 집에서 기다리실래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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