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그게 다인가?
디온 사령관이 눈 주변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루카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예. 제가 보고 들은 건 이제 전부입니다.”
“중요한 얘기는 자네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 했겠지. 따로 기대한 건 없으니 실망할 것도 없군.”
의자에서 일어난 사령관이 창문을 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더운 날이었다.
루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재빨리 훔친 다음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보게, 부대장.”
“예. 사령관님.”
“내가 자네한테 사적인 부탁을 한다면, 자넨 들어준 건가?”
“부탁하실 필요 없습니다. 상관의 명령은 따라야 하는 것. 그게 군부의 준칙입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디온 사령관.
군부에 몇 없는 일등사령관 자리를 20년 넘게 지켜온 노장 중의 노장.
혁혁한 공을 세운 군인으로도 유명하지만, 군부 내에서는 파벌 싸움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정치계만큼이나 난잡한 군부의 권력 다툼을 수십 년간 몸으로 받아내고도 흔들림 없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
권력자가 부탁을 들먹일 때는 대개 골치 아픈 일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올란트.”
사령관이 이름 하나를 꺼냈다. 루카는 긴장한 채 뒷말을 기다렸다.
“총집사님의 손자와 각별하다는 얘기를 들었네.”
“흔한 술친구입니다.”
“술친구보다 가까운 사이는 드물지.”
사령관이 창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올란트의 집을 수색해 출처 불명의 금화를 찾아냈다고 하더군.”
“예.”
“일반 시민은 감히 만져보지 못할 큰 금액이지. 그런 돈이면 밀반출에 협력하고도 남을 거야.”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말에 루카는 서둘러 대꾸했다.
“그 건에 대해서는 구두로 보고를 드렸습니다. 금화는 올란트의 조부, 첼 님께서 주신 것으로….”
사령관이 등을 돌린 채 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루카는 입을 다물었다.
창밖으로 무리 지어 날아가는 새가 보였다. 사령관의 뒤통수가 새의 움직임을 쫓아 조금씩 움직였다.
정적과 함께 찾아온 긴장감이 더위를 앗아갔다. 틱틱거리는 초침 소리를 듣고 있을 때였다.
디온 사령관이 말을 꺼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 돈은 출처가 불명확한, 아주 의심스러운 자금이 아니었던가?”
“…사령관님.”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총집사님의 손자가 그런 일에 연루되다니. 생활고에 시달려 손대선 안 될 일에 손을 대고 만 거야. 참으로 슬프군.”
디온 사령관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으나 금방 정리가 됐다.
혼란 속에서 튀어나온 결론은 정말 끔찍한 것이었다.
“사령관님. 돈의 출처는….”
“루카 부대장. 자네가 생각했을 때 인생에서 기회가 몇 번이나 온다고 생각하나?”
사령관이 몸을 돌렸다. 살짝 내려앉은 눈꺼풀 안쪽으로 사납게 번뜩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루카는 단번에 알아챘다.
사령관은 총집사의 뒤를 치려는 건가? 그거로 무엇을 얻는다고?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황제 폐하께서 이 일을 아시게 된다면 어떤 심정이실지. 의회 역시 실망감을 금치 못할 것이야.”
사령관이 말했다.
에둘러 말한 짧은 문장 속에서 루카는 핵심을 찾아냈다.
디온 사령관은 의회와 거리를 두고 황제와 손을 잡기로 했구나.
정치적으로 중립을 선언하고 10여 년을 버텨온 노장이 마침내 거처를 결정한 것인가?
루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령관이 결단을 내린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성도에 피바람이 불었다.
칼을 들고 피를 뿌린 건 황제였고, 칼끝에 스러져 나간 건 1등 귀족 가문이었다.
1등 귀족 아잔탄스 가.
반역을 꿈꿨다는 죄목으로 하루아침에 1등 귀족 하나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성도가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었으나 여파는 크지 않았다. 밑에 사람은 알 수 없는 고도의 정치 논리가 작용한 것이리라.
손익을 정확히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었다.
제국 심장에서 벌어진 조용한 전쟁에서 황제가 승리했다는 점이다.
위쪽 세계의 정치 구도가 어떻게 재편성됐는지, 루카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권력의 최정점인 사령관이라면 실상을 파악했을 것이다. ‘튤립 전쟁’이라 불리는 이번 사태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 테지.
사령관은 황제에게 바치는 선물로 세나티아 의원을 택한 걸까?
황가와 의회가 대립각을 세우고 제국을 이끌어 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의회 최고 어른을 이번 사건과 엮어 의회의 입김을 약화시킨다면, 황제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질 터였다.
“생각이 많은 친구였군. 신중한 것도 나쁘진 않지.”
늙은 군인의 눈길이 목을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기회란 화살과 같아 되돌아오지 않지. 그러니 현명한 선택을 하게. 루카 부대장, 자네는 그 자리에서 멈출 사람인가? 아니면 더 위로 올라갈 사내인가?”
대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을 지킨 짧은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족들의 얼굴이, 바뀔 직함이, 달라질 노년이.
“보고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자네가 작성한 보고서는 결국 내 책상으로 오르게 될 걸세. 서류에 날인을 할지, 아니면 쓰레기통에 버릴지 결정하는 것도 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건가?”
“그게 군인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죄송합니다.”
“군인의 자존심이라. 루카 부대장, 자네는 낭만주의자였군.”
사령관이 의자에 앉았다.
이제 처벌을 받게 되는 걸까. 보직 변경? 아니면 좌천?
모아둔 돈이 얼마였는지 셈하고 있을 때였다.
“자넨 위로 올라갈 위인은 못 되는군. 올라가려면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게 가장 편한 법이거늘.”
탐탁잖다는 어투였으나 왜인지 사령관은 웃고 있었다. 비웃는 건 아닌 듯한데.
“사실 타인을 밟고 오르는 것보다 더 편한 방법이 있긴 하지. 위에 있는 자가 이끌어주는 것.”
사령관이 왼쪽을 바라며 말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사령실 내부에 마련된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첼이었다.
노신사는 모자를 벗으며 루카에게 다가왔다.
루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권력가를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 손자는 사람을 믿음으로 대하지만 난 그러지 못한다네. 캐내고 떠보고 의심한 끝에 곁을 내주지만, 그마저도 완전하게 신용하는 건 아니지.”
첼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올란트와 식사를 마치고 떠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글로 접한 자네와 실제 자네가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는지, 나는 알아야 했네. 위기관리는 아는 것에서 시작하니까.”
첼이 앞에 서며 물었다.
“기분이 어떤가.”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불쾌합니다.”
첼이 낮게 웃으며 디온 사령관을 보았다.
“이런 친구가 아직도 군에 남아 있군요.”
“어딜 가나 한 명씩은 있나 봅니다. 자기 밥그릇보다 남의 안위를 챙기는 미련한 자가.”
“저나 사령관님이나 이런 미련한 친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인생이죠.”
첼이 모자를 눌러썼다. 얇은 챙 아래로 흐뭇하게 웃는 눈이 보였다.
“앞으로도 내 손자를 잘 부탁하겠네.”
사령관에게 인사를 건넨 첼이 사령실을 나섰다. 루카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장난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남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으니 유쾌할 리 있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풀리며 복잡했던 머리가 말끔해졌다.
“저는 통과한 겁니까?”
빤히 쳐다보는 사령관에게 질문했다. 상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만, 지금은 입 다물고 있기 힘들었다.
“아직 모르지. 총집사께서 말씀하셨듯 저분은 곁을 주는 사람이 아니야. 쓸모가 있다면 남기고 아니면 떠나보내지.”
“전 정치에 관심이 없습니다. 맡은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아쉽게도 인간은 정치하는 동물 아니던가. 자네 의지는 상관없네. 고깝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정치놀음이 싫으면 그만한 권력을 지녀야 하는데, 자넨 해당 사항이 없지.”
사령관이 손짓했다. 루카는 뒷짐을 풀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오늘부터 자넨 독립 3군이 아니라 사령관 부속실로 옮겨질 걸세. 명령체계는 나와 자네, 둘뿐이고. 물론 당분간 공식발령은 안 날 테니 독립3군 소속을 유지하겠지만.”
명령체계가 간결해질수록 권력에 가까워진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사령관을 보필하는 자리.
수석부관과 같은 직급인 건가?
위에서 이끌어주면 쉽게 올라갈 수 있다는 걸 직접 체험하는 중이었다.
“자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네. 총집사를 보필하는 것. 그분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그분이 내게 전하라는 걸 전하면 되네.”
결국 심복이 되라는 뜻이다.
독립군 부대장직을 수행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거절할 생각은 말게. 이건 제안도 아니고 명령도 아니니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그 정도로 해두지.”
노장의 눈이 예리해졌다.
속을 떠보는 여우의 눈이 아니었다. 통보를 무시하면 목덜미를 물어뜯을 맹수의 시선이었다.
“그만한 대우는 해줄 테니 걱정치 말고. 총집사님 눈에 든 인재라면 나 역시 기껍게 받아들일 테니까.”
“만약 첼 님께서 군부 이익에 반하는 일을 진행하신다면….”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한들 자네가 알아차릴 수 없으니 괜한 걱정 말게. 총집사께서 내 뒤를 치기로 작정했다면, 일단 한 대 맞아줘야지. 그 뒤에 내 식으로 계산을 끝내면 될 일이고.”
농담이 농담처럼 안 들렸다.
거절할 수 없는 일을 떠안았으니, 이제 남은 건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었다.
두 거물 사이에서 멍청하게 굴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테니까.
“우선 올란트의 아들을 챙기게. 총집사께서 직접 찾아가지 않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해보게. 손에 들어온 기회를 놓치지 말고.”
루카는 사령관을 향해 군례를 올리고 사령실을 빠져나왔다.
* * *
하염없이 별을 올려다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을 차지한 가구들이 여전히 낯설었다.
아빠는 괜찮은 걸까, 왜 아무런 말도 없이 가구를 집으로 보낸 걸까.
이상할 정도로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일이라도 몰래 제철소를 찾아가 볼까?
이웃 어른들은 얌전히 기다리는 게 낫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가하란. 안에 있냐?”
현관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루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은 벌떡 일어나 뛰듯이 현관으로 갔다.
“아저씨.”
“여기 혼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른들하고 같이 있지 않고 왜….”
다그치듯 말하던 루카가 도중에 말을 멈췄다. 낮은 한숨과 함께 거친 손이 가하란 어깨 위에 올랐다.
“저녁은?”
“점심을 많이 먹어서 그렇게 안 배고파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제때 챙겨 먹어야 한다.”
그제야 루카 손에 들린 바구니가 보였다. 루카가 바구니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닭고기 좋아하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