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말씀 마저 나누시죠. 전 정리할 게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첼은 일어서는 루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여기서 보고 들은 걸 사령관님께 전해도 상관없으니 편할 대로 하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히 일어선 루카가 짧은 경례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네 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는 것 같구나.”
“편이 아니라 친구예요, 할아버지.”
“그래, 친구.”
첼은 냅킨으로 입을 훔쳤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야죠. 달라질 건 없어요.”
“이런 일이 또 벌어질 수 있다. 너도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겼으니 방비를 해둬라.”
원치 않는 고난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게 삶이었다. 권력이란 방파제가 없는 손자는 약한 파도에도 휩쓸려 사라질 것이다.
“새겨들을게요.”
“적어도 지금 사는 골목에서 떠나는 게 좋을 거다. 둔이라고 한들 그런 곳은 치안이 안 좋을 테니.”
“오히려 그런 골목이 안전해요. 좀도둑조차 무시하거든요.”
“웃지 못할 농담이구나.”
첼은 실제로 본 적 없는 증손자를 상상하며 말했다.
“자라는 환경은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네가 구김살 없이 자라난 것도, 배짱이 생긴 것도, 지식을 얻은 것도 환경요인이 크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보다 중요한 것이 주변 환경일지도 모르지.”
“부정하진 않을게요. 세나티아 의원님의 배려와 도움, 그리고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지금의 절 만들었죠. 성도란 환경 역시 무시할 수 없고요.”
손자가 앞에 놓인 빈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전 그곳에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아요.”
얻은 것과 잃은 것.
첼은 손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전 아버지처럼 될 수 없어요. 할아버지도 그걸 알기에 절 놓아주신 거겠죠.”
“넌 내 뒤를 이을 재목이었다. 그 재능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었고.”
“할아버지. 전 올란트로 살아가고 싶지, 도구로 살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그때도 그렇게 말했지.”
손자가 빈 그릇에서 눈을 뗐다. 얼굴이 살짝 붉게 변해 있었다.
“할아버지의 인생을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욕보는 것도 아니고. 할아버진 그 모든 걸 그 두 손으로 일궈 내셨잖아요. 세나티아 의원님과 함께.”
손이라는 말에 첼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지금은 죄다 빠져나갔지만, 한때 이 손에는 열정이라는 게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는 멋진 삶을 사셨어요. 지금도 살아가는 중이시고요. 주체적이죠.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을 뿐이에요. 주어진 길이 아닌 제가 원하는 길을 택하고 싶었어요.”
“그때도 말했지만 낯선 길도 걷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 끝에 도달하면 내가 걸어온 길이 되는 거다. 설령 타인이 제공한 방향이라 해도 받아들이고 나아가다 보면 내 것이 될 테고.”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손자를 데리고 돌아가고 싶었다. 주인께서도 뛰쳐나간 망아지를 기꺼이 받아들여 줄 터였다.
올란트는 재능이 있었다. 본인은 구역질 난다고 했지만, 녀석은 사람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뜻만 있다면,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게 가능한 놈이었다.
“이 대화가 어떻게 끝날지, 할아버진 알고 계시겠죠?”
“그 고집은 여전하구나.”
첼은 입에 맴도는 수많은 말을 가슴 아래로 내려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설득할 수 있는 놈이 아니군.
“재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
“좋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만나고 싶지만, 눈이 높아져서 그런지 잘 안되네요.”
머쓱하게 웃는 손자였다.
“자식에겐 아비의 등만큼이나 어미의 손길도 중요하다.”
“세핀느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가하란을 안고 있었어요. 그 온기가 제 아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전 믿고 있어요. 가하란을 만나 본다고 하셨죠?”
“조만간 볼 거다.”
“만나보면 알게 되실 거예요. 얼마나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컸는지. 그러니 염려 놓으셔도 돼요.”
그 옛날 코흘리개 시절과 다름없이 환하고 맑게 웃는 올란트였다.
“아직도 애구나.”
“그런가요?”
첼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부대장이 내게 돌려준 거다.”
“돌고 돌아 본래 주인을 찾아갔네요.”
주머니 안에 든 금화는 단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고집불통 손자는 자기 손으로 기반을 잡고 살아온 것이다.
도구가 아닌 올란트로 살겠다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돌려줘도 안 쓸 생각이겠지?”
“제 돈이 아니니까요.”
“쓰라고 너한테 준 돈이다.”
“아니요. 잠시 맡아둔 돈이에요. 언젠가 할아버지께 돌려드리려고 했어요. 가하란이 좀 더 크고, 성도까지 여행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같이 가 인사하자고 아내와 약속했죠. 지금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됐지만….”
“이 돈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올 거다.”
“저 모아둔 돈 꽤 돼요.”
“이거보단 적을 텐데.”
올란트는 곤란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적죠. 그 안에 든 돈을 모으려면 전 죽은 뒤에도 제철소에서 일해야 할 거예요.”
“너에게는 큰돈이지만, 나한테는 아니다. 너한테는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네 아들한테는 필요할지도 모르는 돈이지. 받아두는 게 어떻겠냐?”
첼은 주머니는 식탁에 올려두었다. 손자는 짤랑거리는 소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람 손은 두 개고 원하는 걸 모두 쥘 수는 없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이었죠.”
손자가 말했다.
첼은 과거를 떠올렸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쳐다보던 손자를, 가르쳐주는 대로 금방 흡수하던 똑똑했던 아이를.
“그 돈을 포기했기에 전 자유를 얻었어요. 그러니 욕심 부리지 않을 거예요.”
첼은 끼고 있는 반지를 매만졌다. 손자는 다시금 죄송합니다, 라며 머리를 숙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주머니를 다시 챙겼다.
“더는 안 물으마. 대신 이건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
“할아버지 것이니 누굴 주든 상관없어요.”
“그렇다면 이 돈은 가하란에게 주마.”
“네?”
첼은 손자를 보며 한껏 웃었다.
“네 말대로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그래도….”
“증손자를 위해 호의로 베푸는 돈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담지 않겠다. 나한테 있으나 마나 한 돈이니, 귀여운 증손자에게 용돈으로 주면 딱이겠군.”
“용돈치고는 너무 과한데요.”
얼빠진 미소를 짓던 올란트가 팔짱을 꼈다.
“근데 가하란 그 녀석, 그 돈을 쉽게 받지는 않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제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똑똑하거든요. 또래 애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모가 자식을 과대평가하는 건 만국 공통이지.”
올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짱 낀 손을 풀고 허공에 손짓하며 말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버릇이다. 신나서 말할 때면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질 못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제 아들, 이해력이 남달라요.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언어나 숫자, 그림과 음악 등등 온갖 것에 자질이 있어요.”
“애가 하품하는 것도 부모 눈에는 대단해 보이지.”
“저도 그런 건가 싶어서 침착하게 그 애를 관찰했어요. 가하란은 제가 하는 걸 곧잘 따라 하곤 했죠. 노래를 흥얼거리면 옆에 와서 비슷하게 흉내 내고, 도면을 그릴 때면 그 작은 손에 목탄을 쥐고 비슷하게 따라 그렸죠.”
손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자식 자랑하는 부모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첼은 잠자코 얘기를 들어줬다.
“어느 날 마력선 도안을 살피고 있을 때였어요. ‘최초의 오토마타’에서 비롯된 공개 소스였죠. 아들이 다가와 제게 물었죠. ‘아빠, 이게 뭐예요?’라고.”
올란트가 손깍지를 꼈다. 흥분을 억누르기 위한 자세처럼 보였다.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설명해 줬어요. 쉽게 풀어서 말해준다고 했으나 마력선 자체가 쉬운 개념이 아니잖아요. 당연히 이해 못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첼도 관심이 생겼다.
거병은 거병기사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운동지각 보조장치, ‘오토마타’의 도움을 받아야 그 거대한 전략 병기를 움직일 수 있었다.
마법공학의 정수 중 하나인 오토마타. 그 오토마타의 신경계를 시각화한 것이 마력선 도안이다.
쉽게 설명한다고 해도 어린애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닐 터였다.
“가하란은 제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어요. 사람의 뇌와 비슷하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어느 정도 납득하는 얼굴이었죠.”
“그리 놀랄 일은 아니구나.”
“이야기가 조금 더 남았어요. 설명이 끝나고 아들이 도안에 관심을 보였어요. 공개 소스라 아들에게 마음껏 보라고 넘겨줬죠.”
손자가 깍지 낀 손을 풀고 식탁을 움켜쥐었다.
“며칠이 지나고 아들이 제 방을 찾았어요. 전 도안을 준 걸 까맣게 잊고 있었죠. 도안을 갖고 온 아들이 그걸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어요. 왠지 모르게 이 부분이 답답하다고.”
“답답하다?”
첼은 귀를 완전히 열었다. 증손자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관심이 생겼다.
“가하란이 도안에 표시해 놨더라고요. 복사품이라 마음껏 낙서해도 되는 거였죠. 전 도안을 받고 가하란이 표시한 부분을 살펴봤어요. 근데 솔직히 모르겠더라고요. 마력선 도안은 저도 배워 나가는 단계니까요.”
손자는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빠르게 설명해줬다.
표시된 도안을 챙겨 거병관리국 연구소 지인에게 보여줬고, 거기서 놀라운 답을 들었다는 것이다.
“복사가 잘못된 거였어요. 오래된 공개 소스라 찍어낸 틀에 문제가 있었던 거였죠. 연구소에 있는 도안과 대조해보니 바로 알겠더라고요.”
“가하란이 그걸 알아봤다고?”
올란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안을 봐준 선배가 그러더군요. 용케 어그러진 부분을 알아봤다고.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오류를 찾아낸 게 아들이라고 자랑할 뻔했지만, 잘 참아냈죠.”
오토마타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몇 번 마력선 도안을 본 적이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선과 그 선들이 서로 얽히며 일궈낸 기이한 모형.
문외한이 보면 낙서로 보일 법한 것이 마력선 도안이다. 그 복잡한 마법 체계 안에서 정확히 오류를 잡아냈다는 건 우연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증손자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본 걸까?
무엇을 봤기에 답답하다, 라고 말한 걸까?
“저는 기대감에 부풀면서도 동시에 걱정이 됐어요. 뜻하지 않은 재능은 때론 불행을 가져오니까요. 그때부터 제가 한 일은 아들이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거였어요.”
“도안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게냐?”
“네. 잊히도록 내버려 뒀어요. 언젠가 다시 물을 생각이었지만, 당장은 이르다고 판단했으니까요.”
“그 애도 기술자를 꿈꾸고 있다 했지?”
첼은 반지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이제 일곱 살이 됐고.”
“예. 그래서 이번 생일에 그 애가 원하는 걸 물어보려 했어요. 정말 기술자를 꿈꾸는지, 아니면 다른 걸 바라는지. 대답이 변하지 않았다면 제가 조금씩 가르칠 생각이었죠. 오토마타에 관한 것도 같이.”
첼은 손자의 말을 곱씹다가 모자를 손에 쥐었다.
“네 말대로라면 그저 씩씩하기만 한 아이는 아니로구나.”
모자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설레발인지, 아니면 진짜배기인지.”
“탐나시더라도 몰래 데려가시면 안 돼요.”
“그건 보고 결정하마.”
첼은 빙긋 웃는 손자를 흘겨보며 문을 열었다.
“몸조리 잘해라. 네가 나올 때까지 가하란은 내가 지켜보마.”
“금방 나갈 겁니다. 그때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첼은 정중히 인사하는 손자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