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여름 더위가 좀처럼 가시질 않는군요.”
“그래도 작년보다는 숨을 쉴 만해서 다행입니다.”
첼은 디온 사령관이 준 냉차를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차가운 차가 더위를 잠깐 잊게 해주었다.
“어떻습니까? 저번에 내드린 차보다 좀 낫지 않습니까?”
디온이 물었다.
“맛은 이번 게 좋고 향은 저번 게 좋군요.”
“아쉬운 일이죠. 혹시나 해서 잎을 반씩 섞어 보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나서 버려버렸죠.”
“맛이란 게 오묘합니다. 장점만 따오고 싶은데 잘 안 되니까요.”
“예. 오묘한 녀석이죠.”
디온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첼은 디온의 얼굴을 살폈다. 사흘 전보다 눈 밑이 어두웠다.
“여전히 잠을 못 주무시나 봅니다.”
첼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불면증이 쉬이 낫질 않는군요. 의술사가 처방해준 약도 별 소용이 없고.”
힘없이 웃어 보이는 디온이었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불면증도 나아질 것 같지만, 아무래도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군요.”
“사건 조사는 진전이 있었습니까?”
거병 모듈 밀반출 시도.
다른 곳도 아니고 제국 거병 기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둔에서 벌어진 일이다.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첼은 믿지 않았다. 보안 관리가 성도 ‘싱크탱크’에 준하는, 그보다 더 엄격한 곳이 둔이었다.
밀반출 시도가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덮을 수 없는 사건이다.
더 큰 문제는 사건 정황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용의자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용의자의 자택과 주변 인물을 계속 조사하고 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직 없군요.”
디온 이마에 골이 파였다. 둔을 10년째 지켜온 노장에게도 이번 시련은 힘든 모양이었다.
“제철소 전수조사는 마무리됐습니까?”
첼의 질문에 디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름 놓았다는 듯 가뿐한 숨이었다.
“자재보관소를 비롯해 모든 모듈 검사가 어제 새벽에 끝났습니다. 다행히 실물이 둔 밖으로 나간 건 아니더군요.”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제 오토마타 마력선 도안이나 제작설계도 유출을 의심해 봐야 하는데, 이쪽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거병은 기성품처럼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었다. 제작설계도가 분명 존재하지만, 제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에스트로의 해석이 더 중요했다.
물론 실물이 유출된 것보단 낫다는 거지, 제작설계도 유출도 심각한 보안 문제였다.
“치프들은 지금….”
“군에서 보호 중입니다.”
보호라 말했지만 감시에 가까운 상태이리라. 인적자원이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사령관의 지시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성도에서 특수감찰단이 올 테니 준비를 잘해둬야죠.”
디온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밀반출보다 그쪽이 더 신경 쓰인다는 듯이.
“감찰단장은 유능한 사람입니다. 이번 사건에도 도움이 되겠죠.”
첼은 쉬지 않고 떠드는 감찰단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얼핏 보면 경박해 보이는 인물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는 진중한 인간이었다.
“수완이야 누구나 다 인정하죠. 황제께서 직접 택한 자이니 누가 그 능력을 의심할까요. 단지, 융통성 없는 일 처리가 갑갑할 뿐이죠.”
사령관이 차를 들이켰다.
“말이 나온 김에 부탁 하나만 드릴까 합니다.”
“감찰단장을 설득해 달라는 부탁이라면 저도 들어드리기 힘듭니다. 의회 원로들도 학을 뗀 친구라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몇 번 경험해봐서 누구보다 잘 압니다. 무마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알죠. 하지만 사건의 규모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총집사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면 말이죠.”
첼은 연한 미소를 지었다.
“스콜라 생도들과 함께 반쯤 관광차 이곳에 왔는데 뜻하지 않게 일이 생기는군요.”
“세나티아 가와 이곳 둔. 언제나 좋은 관계로 남고 싶습니다. 의회 어른들께서도 그걸 바라실 테죠.”
“의원님께선 언제나 둔의 안녕을 기원하고 계시죠. 물론 사령관님의 건강도 걱정 중이시고.”
첼은 중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성도와 연락할 수 없는 지금 판단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잠깐 고민 후 입을 열었다.
“감찰단장과 따로 만나 보도록 하죠.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거병과 관련된 일인 만큼 깊게 파고들기로 작정했을 테니.”
“필요한 사람과 필요한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깊게 파고드는 것 정도는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랫선에서 마무리 짓는 쪽으로 권유해 보죠.”
사령관이 짙은 웃음과 함께 어깨에서 힘을 뺐다.
디온 사령관은 도와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빚을 지워두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앞뒤 꽉 막힌 감찰단장이 말을 들어줄지는 의문이지만, 시도해서 손해를 보는 건 없으니까.
“그리고.”
디온이 상체를 앞으로 살짝 내밀며 말했다.
“손자분 처우는….”
“지금과 같이 적법한 절차와 형식에 맞춰 대해주시면 됩니다. 죄가 있다면 처벌하시고, 무죄가 증명되면 그때 풀어 주시지요.”
멍든 손자의 얼굴이 잠깐 눈앞에 스쳐 갔지만, 첼은 감정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되도록 손대지 말고 조사하라 말해뒀지만, 기조라는 게 갑자기 바뀌지 않는 것이라. 그렇다고 지목해서 특별 대우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취조부에 잡혀 있는 동안에는 고생깨나 할 겁니다.”
“군부의 방식을 제가 뭐라 할 순 없겠죠.”
첼은 깍지를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올란트, 제 소중한 핏줄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들을 잃고 나서는 그 녀석에게 더 큰 기대를 품었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게 할아비의 심정이죠.”
“그렇다면….”
첼은 사령관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사령관님이나 저나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걸. 핏줄은 소중하나 세나티아 가는 그보다 더 중요합니다. 올란트 그놈, 죄짓고 살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손대선 안 될 일에 손을 댔다면… 마땅한 처분을 받아야겠죠.”
세나티아 가에, 주인께 누가 될 일은 사전에 차단해야 했다. 설령 손자의 목숨이 달려 있다 해도.
사소한 문제였다면 이 손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건은 손으로 가린다고 해서 가려지는 크기가 아니었다.
거병과 직결된 문제라면 1등 귀족이라고 해도 재판을 면치 못할 테니까.
“만약 손자분이 이번 사건과 어떤 형태로든 엮여 있다면….”
“제 손자는 오래전 집을 나와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처리할 것입니다. 올란트는 세나티아 가와 아무 상관 없는, 둔의 시민으로 처분을 받아야겠죠.”
“총집사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첼은 찻잔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가업을 잇지 않고 자유를 택한 만큼 책임을 져야죠. 물론 그 아이도 제게 바라는 것이 없을 겁니다. 선택이란 게 무엇인지 잘 아는 놈이니까요.”
“말씀하신대로 총집사님과 의원님에 관한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더군요.”
“고집이 세거든요.”
사령관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첼은 모자를 집어 들었다.
“식사하고 가시죠. 질 좋은 꿩을 준비해 뒀습니다.”
디온의 권유는 반가웠으나 첼은 정중히 거절했다.
“점심은 손자 놈과 먹으려고 합니다.”
“그게 낫겠군요.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편한 곳에서 따로 식사하시죠.”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시역으로 루카 부대장을 붙여드리죠. 그게 편하시겠죠?”
첼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루카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
첼은 사령관을 힐긋 쳐다봤다.
성도가 제국의 심장이라면 이곳은 제국의 두뇌였다. 그곳을 10년간 담당해온 디온은 사자이며 동시에 여우였다.
“훗날 정치계로 넘어오시게 된다면 그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디온 사령관님.”
“하하, 전 군부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정치는 제게 어울리지 않죠.”
디온과 악수 후 루카에게 다가갔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첼 님.”
“따분한 인사는 됐네. 모르는 사이라면 모르되, 자네와 난 이제 잘 아는 사이 아니던가.”
첼은 모자를 살짝 눌러쓰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언제든 말하게. 사흘 전처럼 격식을 차려줄 테니.”
“지금이 편합니다.”
루카가 앞장섰다.
“가시죠. 올란트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카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향했다. 지난번 손자를 만났던 곳보다 한 층 더 내려갔다.
공기가 서늘해졌다. 퀴퀴한 냄새 사이로 익숙한 기름 냄새가 흘렀다. 병장기 유지보수에 쓰이는 기름이었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이곳에 출입하는 군인은 없을 겁니다.”
빈 복도를 걸으며 루카가 말했다.
철창 너머로 차곡차곡 쌓인 병장구를 바라보며 얼마나 걸었을까. 루카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문패가 없는 방이었다.
“관리자들이 휴게실로 쓰는 방입니다. 정리는 해뒀으나 워낙 험하게 쓰는 방이라 조금 더럽습니다.”
“이런 곳에서 고급 살롱 같은 대우를 바라진 않네. 편히 먹고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지.”
루카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 올란트가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조리된 꿩고기를 보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오셨어요?”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손자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저는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뒤로 물러서는 루카에게 첼이 말했다.
“자네도 들게. 둘이서 먹기에는 양이 많군.”
“아닙니다.”
“내가 사령관실로 올라가 허락을 받고 오면 그때 앉을 텐가?”
차분했던 루카 얼굴에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첼은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게, 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루카가 앉는 사이 첼은 손자를 바라보았다. 사흘 전에 봤을 때보단 몰골이 괜찮았다. 검푸른 멍도 사라졌고, 푸석거리던 얼굴에서 생기가 돌았다.
“살 만한가 보구나.”
“이 정도 버티는 건 일도 아니죠. 그보다 어쩐 일이세요. 바쁘실 텐데.”
“바빠도 너와 밥 한 끼 먹을 시간은 낼 수 있다.”
첼은 꿩의 가슴살을 크게 떼어내 손자 그릇에 덜어주었다.
“제가 할게요.”
“됐으니 먹기나 해라. 부대장, 자네도 들고.”
할 말은 많았지만 우선 음식을 입에 넣었다. 허공에 흩어져 사라질 말보단 기름진 음식이 손자한테 도움 될 테니까.
음식을 어느 정도 비운 후에 첼이 입을 열었다.
“네 집으로 가구를 보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신경 쓰일 일을 벌여놓고 그렇게 말하는 건 무책임하구나.”
“할아버진 언제나 제 입을 부끄럽게 만드세요.”
올란트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가하란은 잘 있나요?”
“아비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잘 버텨내고 있다는구나.”
“얼른 나가서 안아주고 싶네요. 생일 축하도 제대로 못 해줬는데.”
“제철소 조사는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고 하니 죄가 없다면 금방 풀려날 거다.”
“죄가 없다면 말이죠.”
첼은 빵에 버터를 바르며 말했다.
“없는 죄를 만들어 네 목에 붙이는 일은 없을 거다. 그건 내가 막을 테니까. 단, 어떤 식으로든 이번 문제와 연관돼 있다면 너를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제 아들한테.”
첼은 손자의 눈을 들여다봤다.
어릴 때와 똑같이 앞만 보는 눈동자였다. 흔들림 없고 올곧은 눈.
“그거면 됐다.”
첼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