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사흘이 지났다. 아빠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 거라며 웃어주던 이웃분들도 점차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얼추 치웠지만 망가진 가구는 손쓸 도리가 없더라.”
웰턴이 말했다. 가하란은 사흘 만에 돌아온 집을 천천히 훑었다.
아빠와 같이 만든 식탁이 없어졌다. 몇 벌 안 되는 옷을 걸어두던 옷걸이도, 중요한 도구를 넣어두던 서랍도 없다.
“바닥에 있던 걸 최대한 모아봤는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웰턴이 바닥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켰다. 가하란은 바구니 덮개를 열었다.
눈금자가 반으로 부러져 있었다. 각도기도 비틀려 있었다. 아빠가 아끼는 세공끌은 끝이 뭉툭해져 버렸다.
하나하나 살펴보며 상태가 괜찮은 것들을 추려냈다. 생일 선물로 받은 거병 모형이 눈에 밟혔다. 꺼내서 하나 남은 서랍 위에 올려두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챙겨주셔서.”
“고맙긴. 내가 그때 그 군인들을 막았어야 했는데.”
주먹으로 허공을 몇 번 치던 웰턴이 머쓱하게 웃었다.
“역시 혼자 지내는 것보다 우리 집으로 오는 게 낫지 않겠어? 너무 휑한데.”
“정리해둬야죠. 아빠가 돌아왔을 때 편히 쉴 수 있도록.”
웰턴은 대답 대신 가하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불러.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도와줄 테니까. 혼자 고민할 필요 없어, 알겠지?”
“네. 그럴게요.”
웰턴이 손을 툭툭 털며 몸을 돌렸다.
“이따가 점심때 우리 집으로 와. 점심 같이 먹자.”
“네. 늦지 않게 갈게요.”
머뭇거리던 웰턴이 조용히 집을 빠져나갔다.
모든 소리가 한순간 사라진 집은 기이할 정도로 낯설었다. 분명 여기서 계속 살아왔는데.
가하란은 벽에 손을 대고 천천히 걸었다. 좁은 집 구석구석에 상처가 생겼다.
군인들이 뒤집고 지나간 흔적을 모두 지우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걸음이 멈춘 건 아빠 방 앞이었다. 귀퉁이가 부러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깨끗하게 치워진 방. 그래서 더 이질적인 방. 원래 이곳은 복잡해야 했다.
바닥엔 쓰임새를 알 수 없는 도구와 그림이 놓여 있고, 각종 쇳덩이가 책상 위를 장식해야 했다.
주저앉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가까스로 참았던 외로움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찔끔 나왔다. 허겁지겁 손으로 훔쳤지만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다들 걱정했을 테니까.
‘곧 풀려날 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사흘 전 밤에 루카가 찾아와 한 말이었다. 긴 대화가 오고 간 건 아니었지만 가하란은 안심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여주던 손이, 믿어달라며 바라보던 눈이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해 주었으니까.
그럼에도 사흘째 아빠가 돌아오지 않으니 다시 불안감이 샘솟았다.
골목을 비집고 들어온 얘기에 의하면, 도시의 출입 절차가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도심 검문 역시 강화됐고 불시에 찾아와 조사하는 일 역시 잦아졌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1등 귀족 살해 협박이 있었네, 둔 은행이 털렸네, 행정처 기밀 문서가 사라졌네 등등 소문만 무성할 뿐.
아빠가 붙잡혀 간 것 역시 소문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가하란은 방구석에 놓인 책상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자리. 아빠는 희미한 쇳내를 풍기며 항상 저곳에 앉아 있었다. 작업에 몰두하는 그 등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아빠 빨리 올 거지?”
흐릿하게 번진 시야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가하란은 비틀린 책상 서랍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깨진 액자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마법사들에게 비싼 돈을 내야 얻을 수 있는 사진.
쨍한 색채로 물든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위로 뻗는 아빠와 그 옆에 오도카니 서 있는 엄마가 보였다.
가하란은 사진이 찢어지지 않게 깨진 유리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액자의 받침대를 세우고 책상에 올려뒀다.
사진 속 엄마는 오늘도 침착해 보였다. 아빠는 종종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네 엄마는 잘 웃지 않았지만, 웃을 땐 정말 예뻤단다. 물론 안 웃을 때도 예쁘지만.’
기억의 티끌조차 남아 있지 않은 엄마지만, 낯설지 않은 건 아빠 덕분이다.
언젠가 꿈에서 낮게 깔리는 자장가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게 엄마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 가하란은 알 수 없었다.
단지 엄마 목소리였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들을 치워내고 집 안을 정리했다. 툴은 식탁이 있던 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가끔 컹컹거렸다. 툴도 아빠가 그리운 모양이다.
“가하란, 안에 있어?”
현관 쪽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제니였다. 가하란은 손등으로 다시금 눈가를 닦아냈다. 울었다는 걸 들키긴 싫었다.
“나 여기 있어.”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현관 앞에서 쭈뼛거리고 서 있던 제니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천장을 훑고 내려오는 눈동자에 당혹감이 스쳐 간다. 가하란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집이 깨끗해졌지?”
“어, 어.”
“다 치우고 나니까 이렇게 넓더라고. 툴하고 막 뛰어도 될 정도로.”
제자리에서 몇 번 뛰다가 그만두었다. 그렁그렁한 제니의 눈을 봤기 때문이다.
“괜찮아?”
제니가 말했다. 반쯤 우는 중이었다. 정말 눈물이 많은 애다. 덕분에 나도 울고 싶어진다.
“괜찮아. 아빠도 금방 돌아오신다고 했고, 집도 뭐 정리하면 돼. 그러니까… 울지 마. 진짜 별일 아니야.”
동그란 눈에 담긴 눈물이 곧 쏟아질 기세였다. 무슨 말을 해도 저 눈물은 밑으로 흐를 것이다. 제니는 울음을 잘 참지 못하니까.
코를 훌쩍이던 제니가 눈을 찡그렸다. 울음을 삼킨 것이다. 펑펑 울 줄 알았는데.
“이거 아빠가 가져다주래.”
작은 바구니를 받아 천을 들췄다. 안에 든 건 음식이었다. 식어도 괜찮은 종류로 조금씩 싸주었다.
“잘 먹을게.”
“아빠가 언제든 오래. 아니, 지금 같이 갈래?”
“나중에 갈게. 아빠 오고 나면.”
물끄러미 쳐다보던 제니가 성큼 다가오더니 가하란을 안아주었다.
울음을 참는 제니도, 이렇게 덥석 안는 제니도 처음이었다.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이게 제니가 선택한 위로이자 격려라는 걸 깨달았다.
“다 괜찮을 거야.”
뒤로 물러서서 씩 웃는 제니였다. 눈두덩이 벌겋게 변했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중이리라. 그게 고맙고 한편으로는 귀여웠다.
아빠는 말했다. 대신 울어주는 사람에게 감사하라고.
“고마워.”
“응?”
“그냥.”
툴이 다가왔다. 두 발을 치켜들고 제니에게 안겼다. 제니는 살갑게 웃으며 툴을 끌어안았다.
“얘는 더 커진 거 같아.”
“몇 달 뒤에는 우리보다 더 커질 거야.”
한동안 툴과 씨름하던 제니가 작게 숨을 토해내며 물러섰다. 검은 앞치마에 툴의 회색 털이 덕지덕지 붙었다.
“나중에 또 올게. 여관이 갑자기 바빠져서 나도 할 일이 많아졌어.”
“그래?”
“사람들이 도시 밖으로 나가기 힘들어졌나 봐. 여관으로 사람이 몰렸어. 롤닌 아저씨가 그러는데, 상단들도 발이 묶여서 큰일이래.”
말을 끝낸 제니가 우물쭈물했다. 할 말이 더 없나 궁리하는 것 같았다.
가하란은 제니의 어깨를 붙잡아 현관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얼른 가 봐. 여관 바쁘다며.”
“그렇게 엄청 바쁜 건 아니고….”
“나 진짜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가. 너무 늦으면 아저씨가 걱정할지도 몰라.”
등을 살며시 밀었다. 현관을 향해 두어 걸음 밀려난 제니가 고개를 쓱 돌렸다.
“혼자 자기 무서우면 바로 우리 집으로 와. 알겠지?”
“알았어.”
“아니면 오빠보고 여기로 오라고 할까?”
“내가 갈게.”
현관 앞에서 몇 번을 뒤돌아보던 제니가 손을 천천히 흔들었다. 가하란도 씩 웃으며 손 인사했다.
다시 텅 빈 집에 혼자 남았지만 아까처럼 쓸쓸하진 않았다.
“툴. 아빠가 올 때까지 우리가 여길 지키는 거야.”
폴짝 뛰는 툴을 데리고 집 정리를 마저 했다. 망가진 도구들은 버리지 않고 잘 모아뒀다. 아빠라면 분명 고쳐서 쓸 수 있을 것이다.
“안에 계십니까?”
누구지? 가하란은 경계하며 고개를 내밀었다. 모르는 어른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노아 가구점입니다. 올란트 씨 댁 맞죠?”
가구점이라니. 가하란은 슬쩍 현관문을 열었다. 밖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짐수레도 눈에 들어왔다. 가구가 실려 있었다.
“집에 어른 없니?”
남자가 물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세요?”
“여기로 배달 신청이 왔거든. 넌 올란트 씨의….”
“아들이에요.”
“그럼 됐네. 너희 아버지 이름으로 계산이 다 끝났단다. 잠깐만 비켜주겠니?”
작업복을 입은 다른 남자들이 짐수레에서 가구를 내렸다. 윤기가 흐르는 표면에 마감이 잘된 가구들.
“이게 다 뭐니?”
“무슨 일이야?”
이웃 어른들이 다 모여들었다.
다들 어리둥절한 눈으로 집 안을 장식해가는 가구를 보았다.
“자, 이거.”
순식간에 가구 배치를 끝낸 남자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확인서였다.
“아버지 오시면 그거 보여드리면 된다. 하자가 생기면 언제든 보수 가능하니까 찾아오시라 하고.”
“저기, 정말로 이걸 우리 아빠가 주문한 건가요?”
“대금이 그 이름으로 들어왔으니까 맞겠지? 아무튼 노아 가구점을 이용해줘서 고맙다. 아버지께도 이 말을 전해주렴.”
짐수레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에 쓰던 것들과 비슷하네. 품질은 훨씬 좋지만.”
“그러게. 정말 올란트가 주문한 건가?”
어른들이 가구를 살피며 말했다.
가하란은 확인서를 꼼꼼히 읽어봤다. 가구를 주문하고 비용을 치른 건 정말 아빠였다.
어떻게 된 거지?
“일단 기다려 보자꾸나.”
핀들론이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주름진 손을 꽉 붙잡으며 방을 차지한 가구들을 바라보았다.
* * *
첼은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맸다. 수십 년간 반복해온 동작이지만 단 한 번도 허투루 해본 적이 없었다.
핀으로 고정하고 조끼를 입는 사이, 노크를 마친 수행원이 방으로 들어왔다.
“가구 설치를 끝냈습니다.”
“적당한 걸로 보냈는데, 자네가 보기엔 어떻던가?”
첼은 거울을 통해 하브의 얼굴을 보았다. 솜털이 남은 어린 청년은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더 생활수준이 안 좋았습니다. 보내신 가구도 그 골목에서는 고가품이었습니다.”
“내가 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거군.”
손자의 고집은 세월 따위에 무뎌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이는 어떻던가?”
“건강이 염려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만, 지쳐 보이긴 했습니다.”
“아빠를 닮아 뚝심이 있나 보군. 혼이 빠져라 울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증조부를 닮아 그런 것일지도 모르죠.”
하브의 말에 첼은 슬며시 웃었다.
“자네 아첨도 할 줄 알았나?”
“거슬렸다면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첼은 침착한 청년의 눈을 보며 말했다.
“거슬리진 않았네. 다만, 다음부턴 좀 웃으면서 하게. 그래야 듣는 상대도 웃으면서 받아주지.”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러면서 슬쩍 미소를 짓는데, 영 안 어울렸다. 다른 건 다 잘하는 친구인데.
“이상합니까?”
“연습하게. 웃는 것도 근육이 하는 거라 연습하면 나아질 테니.”
“오늘부터 연습하겠습니다.”
“되도록 사람 없는 곳에서 하고.”
첼은 모자를 쓰고 문을 열었다.
“군부로 가지. 디온 사령관을 다시 봐야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