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노인, 첼의 눈길이 철창으로 향했다. 올란트 얼굴에 당혹감이 일었다.
구금이 확정돼 군인들에게 인계됐을 때도 쾌활하게 웃던 놈인데.
루카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복잡한 기류를 잡아냈다. 눈치 없는 꼬맹이를 이 자리에 데려다 놓아도 알아차릴 것이다.
“이 못난 놈과 독대를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첼이 말했다.
상대는 둔의 수뇌부조차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첼. 이 단순한 이름 뒤에 ‘세나티아 의원’이 붙는다면 모든 게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이 뭐냐고 물으면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누군가는 황가를, 누군가는 1등 귀족을, 누군가는 군부를, 누군가를 중앙행정처를, 누군가는 싱크탱크를.
하지만 관료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높은 확률로 ‘의회’라 말할 것이다.
제국의 뿌리인 황가와 의회.
합심과 반목을 반복하며 제국을 성장시켜 온 두 집단.
세나티아 의원은 제국 권력 중추라 할 수 있는 의회의 ‘최고 어른’ 중 하나였다.
제국의 패권을 움켜쥔 황제와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그런 세나티아 의원의 오랜 지기이자, 세나티아 가의 총집사를 맡은 것이 첼이었다.
첼은 세나티아 가의 대소사는 물론 의회 주요 안건에도 참석하는 핵심이었다.
‘내가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다그쳐주는 벗.’
세나티아 의원이 첼을 가리켜 한 말이었고, 관직에 몸담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었다.
취조부 방문절차 위에 서 있는 것이 첼이다. 첼이 보안형식을 무시한다고 해서 책임을 물을 자는 없을 터였다.
루카는 힘겹게,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독대는 불가능합니다. 감시역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정중히 부탁해도 안 될까요?”
루카는 발가락에 힘을 꽉 줬다.
차라리 명령조로 말했다면 덜 불안했을 것이다. 부탁이라니. 저분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처세술을 발휘할 때였다. 앞에 있는 노신사 말 한마디에 내 군복이 벗겨질 수도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감금실 밖으로 나가면 편할 것이다. 첼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면 되는 것이다.
머리는 알고 있으나 입 밖으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외부 인사는 이곳에서 독대가 불가능합니다. 따로 요청이 있다면 가능하지만, 저는 아직 그러한 명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홀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죠?”
“압니다. 취조부장이 허락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비킬 수 없다는 거군요.”
“취조부 책임자가 허락했다고 하나 전 다른 부대 소속입니다. 또한 면담 규칙은 책임자 권한 위에 있습니다. 그러니 따로 받은 명령이 없으면 준칙을 따라야 합니다. 모호한 협의로 제 의무를 저버릴 순 없습니다.”
“그렇군요.”
“독대를 원하신다면 제가 상부에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물론 저와 같이 이곳을 나가셔야 합니다.”
첼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는 루카 가슴에 달린 명패를 보았다.
“루카 부대장. 듣던 대로군요.”
듣던 대로? 의문으로 머리가 가득 찰 때였다. 첼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둔의 소식을 종종 접했습니다. 저기 못난 손자가 어떻게 사나, 할아비로서 걱정이 되니까요. 무심한 손자 놈은 연락이 뜨문뜨문하니 내가 알아보는 수밖에 없죠.”
소식을 종종 접했다는 말이 내 속옷 개수까지 다 알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 건 왜일까.
루카가 바짝 긴장하는 동안, 첼이 철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손자에게 좋은 형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언제 한번 봐볼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부끄럽군요.”
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은 올란트에게 닿아 있다.
“너는 항상 어려운 길만 택하는구나.”
“바른길이라고 해주세요, 할아버지.”
“하고 싶은 일 하겠다며 뛰쳐나갔으면 즐겁게 살고 있어야지, 여기서 뭘 하는 게냐?”
“의심받을 만한 일이 생겼고, 그래서 조사를 성실하게 받는 중이에요. 저는 죄를 짓지 않았으니 금방 풀려날 거고요. 그러니 걱정 마셔요.”
첼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철창 가까이 갔다. 손에는 곱게 접은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이 안으로 손을 넣어 손자 놈 얼굴을 닦아주는 것도 준칙에 어긋납니까?”
첼이 물었다. 루카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 규칙은 없다고.
손수건이 올란트 얼굴에 닿았다. 엉겨 붙은 피가 손수건에 쓸려 후드득 떨어졌다.
루카는 바닥에 떨어지는 먼지와 피가 올란트를 구타한 군인의 목처럼 보였다.
기억해야 했다. 노신사가 몸담은 곳은 권모술수의 정점인 의회라는 걸.
잔인해지기로 결심한다면 누구보다 잔혹하게 손을 쓸 것이다.
“네가 여기에 있으면 가하란 그 아이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웃분들이 잘 챙겨주고 있을 겁니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좋은 사람은 드물다. 다들 쓸모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할 뿐이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제 이웃을 믿어요.”
“물질 없는 믿음은 고된 방식이지. 증손자마저 널 닮을까 걱정이 된다.”
올란트가 환하게 웃었다.
“할아버지. 제 아들은 저보다 더 멋진 놈입니다. 어린놈이 정을 주는 법을 알아요. 골목에서 얼마나 사랑받는지 몰라요. 관계가 꼭 물질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조만간 봐야겠구나.”
올란트가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만나시게요?”
“걱정하지 마라. 네 뜻대로 관계를 밝힐 생각은 없으니까.”
첼이 더러워진 손수건을 품에 넣었다.
“그래도 언젠가 그 아이한테도 선택권은 줄 거다. 너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내 밑으로 들어와 세나티아 가를 뒷받침할지.”
“가하란은 기술자가 꿈이라고 못 박았어요. 그 꿈을 꾸기엔 세나티아 가는 너무 빡빡해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너와 달리 이 할아비를 더 좋아할지도.”
“그건 아닐 겁니다. 제 아들은 절 더 좋아해요.”
주고받는 말들이 장난스러웠다.
첼은 가업을 버리고 떠난 손자를 원망하지 않는 것 같고, 올란트도 첼을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친근한 조손이었다.
“이놈이 언제까지 여기에 붙들려 있을까요?”
첼이 루카를 향해 몸을 틀었다.
“혐의가 모두 풀렸으니 곧 나가게 될 겁니다.”
혐의가 있다고 해도 풀려날 것이다. 지금쯤이면 상관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다. 감금실 내부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첼이 누굴 탓할지 걱정하면서.
“그거 다행이군요.”
첼은 올란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출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노파심에서 말하는 거지만 저놈과 나와의 관계는 함구해 주세요. 보고 의무는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사령관은 이미 알고 있으니.”
“알겠습니다.”
루카도 두어 걸음 떨어져 첼을 따랐다. 감금실 끝 철문이 열리고 복도가 보였다.
곧게 뻗은 복도 양옆으로 군부의 주요 인사가 줄지어 서 있었다. 앞에 선 사령관실 수석부관이 첼에게 경례를 올렸다.
첼이 손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난 군인이 아닌지라 부담스러운 군례는 됐습니다.”
수석부관이 곧바로 자세를 풀었다.
“사령관님께서 좋은 차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둔에서 구할 수 있는 좋은 차라. 기대가 되는군요. 디온 사령관은 건강하십니까?”
“염려해주신 덕분에 건강하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수석부관이 옆으로 비켜섰다. 동시에 복도 벽에 붙어 있던 행정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첼 뒤쪽으로 붙었다.
그 모습을 보며 루카는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노신사가 쥐고 있는 권력의 부피를.
한 걸음 뗀 첼이 도중에 멈춰 섰다. 시선이 루카에게 향했다.
“다음에도 안내를 부탁하죠. 취조부뿐만 아니라 이곳저곳 보고 싶으니.”
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루카는 뒷짐을 지고 가슴을 펴며 턱을 살며시 당겼다.
제국식 군례로 답하자 첼이 미소 지으며 발길을 옮겼다.
“자네 소속이…….”
첼이 사라지자마자 취조부장 유렐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독립3군 소속 루카입니다.”
“루카 부대장이었군. 첼 님께서 따로 하신 말씀이 없던가?”
취조부장의 눈동자가 살며시 떨렸다. 루카는 첼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시설과 용의자들을 살피고 간단한 질문을 몇 개 하셨습니다. 이번 밀반출 사건을 걱정하시는 듯했습니다.”
“그럴 테지. 둔이 뒤집힐 수도 있는 사태니까. 그 외에는? 특별히 보고할 건 없나?”
루카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답했다.
“없습니다. 첼 님께선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군부 이곳저곳을 시찰 다니실 모양이야. 세나티아 의원께서 따로 주문한 건지,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인지 모르겠군. 아무튼 수고했네.”
루카는 멀어지는 유렐에게 경례를 올린 후 벽에 기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입조심해야지.”
교대하는 경비병을 바라보다가 다시 감금실로 돌아왔다. 올란트가 곧바로 질문했다.
“할아버지는요?”
“사령관님을 만나러 가셨다.”
“오랜만에 뵙는데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골치 아픈 일이 끝났다는 듯이 바닥에 누워 살며시 웃는 올란트였다. 체포된 것보다 할아버지와 면담한 게 더 힘든 모양이다.
“너를 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전혀 모르겠다. 그런 집안에서 뛰쳐나와 여기서 쇠나 주무르고 있다니.”
“정치는 제 체질이 아니었거든요. 할아버지를 따라 몇 번 사교회도 가봤는데, 구역질이 났어요. 거긴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거든요. 거기 계속 있었다간 나 자신이 싫어질 것 같아서 뛰쳐나왔죠.”
“용케 놓아주셨군.”
“제 고집을 못 꺾는다는 걸 할아버지도 잘 아니까요. 그리고 세핀느가 할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죠. 화까지 내면서.”
세핀느. 올란트의 아내로 조용한 여자였다. 올란트가 지글지글 끓는 해라면 세핀느는 고요한 달이었다.
딱 한 번 봤지만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런 사람이 화를 냈다라.
“그러고 보니 곧 기일이었던가?”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그 전에는 나갈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야죠. 그 사람이 좋아하던 향초도 준비해 뒀으니, 찾아가 피워줘야죠.”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올란트가 몸을 뉘었다.
“좀 쉬어야겠어요.”
“그래. 첼 님께서 사령관님께 사정을 설명할 테니 곧 나갈 수 있을 거다.”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제 고지식한 면이 누구 닮은 거겠어요. 할아버진 원리원칙을 중요시해요. 아닐 때도 종종 있지만.”
루카는 챙겨둔 주머니를 내보이며 말했다.
“네가 나올 때까지 이건 내가 보관하마. 네 아들, 가하란한테 전할 것이 있으면 말하고. 네가 여기 있는 동안 최대한 내가 보살펴 줄 테니.”
“고맙습니다, 형님. 제 아들놈, 바르고 의젓하지만 그래봤자 일곱 살이니 이 상황이 무서울 거예요. 형님이 좀 챙겨주세요. 아마 괜찮다고 하겠지만. 그 녀석… 꼴에 사내놈이라고 남들 앞에선 안 울거든요.”
“애 달래는 건 특기가 아니지만 최대한 안심할 수 있도록 해보마.”
“부탁드릴게요.”
올란트가 눈웃음을 지었다. 루카는 쉬라는 말을 남기고 감금실을 빠져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