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이 정도 무게의 제국 금화면 무얼 할 수 있을까.
자유 시민권을 사는 건 물론이고, 성도에 집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일까? 4등 귀족과 거래해 작위를 넘겨받을 수도 있을 터였다.
신분을 바꾸고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올 수 있는 돈. 눈이 돌고도 남을 가치. 범죄와 타협할 수 있는 액수.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루카도 이 금액을 제시하며 ‘이번 일’을 사주했다면 흔들렸을 것이다. 걸리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금빛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올란트는 달랐다.
동생은 돈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목숨을 거는 부류는 아니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삶의 방식을 조율할 줄 아는 현명한 동생이었다.
올란트가 용의선상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반박했고 상부를 설득하려 했다. 그럴 리 없다고. 올란트는 착실한 기술자일 뿐이라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선두에 섰다. 누구보다 먼저 동생의 집을 수색했다.
무고한 동생을 이 손으로 풀어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올란트의 집에서 거금이 나왔다. 높은 임금을 주는 거병관리국 산하 제철소지만, 이만한 금액을 모으는 건 불가능했다.
“관리가 안된 금화였다면 도박해서 딴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깨진 금화였다면 아득바득 모아서 구비한 거라고 여겼을 거고.”
루카는 주머니를 열어서 금화를 보여주었다. 제국은행에서 금방 발행해 낸 듯한 양품의 금화를.
“시중에 유통된 금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품도 아니야. 혹시나 해서 은행에 확인해 봤다.”
“그렇겠죠.”
“이런 건 정치자금에서나 볼 법한 거지.”
“아마 그러겠죠.”
“말해봐라. 이 돈의 출처가 어디지? 난 아직까지 널 믿고 있다. 널 진범으로 몰기 위한 계략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분명 다른 놈이 가져다 놓았을 테지.”
“제가 인복이 많네요. 하지만 형님. 그거 제 거 맞아요.”
“뭐?”
“받은 거예요. 근데 잊고 살았어요. 제가 받은 돈이지만, 손댈 수 없는 돈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
올란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돈의 출처를 해명하지 않으면 전 어떻게 될까요?”
“언제까지 감출 수는 없다. 이 돈을 부하들도 같이 봤으니까. 난 상부에 보고해야 하고, 이걸 본 상급자들은 널 진범으로 확정 지을 거다.”
반드시 피를 봐야 하는 사건이었다. 면책 따윈 없다. 범인을 확보하고 사정을 설명해도 목이 날아갈 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상태였다.
“‘거병 모듈’이 밀반출됐을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당시 제철소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번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테지. 함구하면 그 끝은 죽음뿐이다.”
국가 전쟁에 사용되는 전략 병기.
최고 등급의 보안을 요구하는 거병 모듈을 누군가가 밀반출하려 했다.
미수에 그쳤지만 시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뒤집힐 일이었다.
게다가 신형 ‘오토마타’의 마력선 도안이 일부 새어 나갔다는 추측도 나왔다. 계획도시 둔이 세워지고 난 이래로 최악의 사태였다.
아직 상황 파악이 끝난 게 아니라 정확한 피해 범위는 알지 못했다.
몇몇은 ‘밀반출 시도’가 아니라 핵심 모듈이 이미 둔 밖으로 나갔다고 주장 중이었다.
둔의 수뇌부는 지금 혼란 한가운데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군부는 군부대로, 거병관리국은 거병관리국대로 서로 책임을 묻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이번 사건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는 행정처만 그나마 여유로울 뿐.
물론 여유롭다고 해서 긴장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다른 두 곳에 비하면 낫다는 거니까.
정말로 모듈을 비롯한 설계도와 도안이 둔 밖으로 나갔다면…….
군인 몇 명이 둔 도심을 휘젓고 다니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엄이 선포될 것이다.
이미 성도로 연락병이 출발했다. 죽을 기세로 말을 갈아타고, 봉화까지 피울 테니 보름 정도면 소식이 전해질 터였다.
거병과 연관된 일이었다.
황가는 물론이고 의회도 움직일 것이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성도에서 ‘그들’이 올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특수감찰단이 파견될 거다. 거병과 관련된 일이니 반드시 오겠지.”
이름만 언급해도 등줄기에 서리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황제가 임명한 판결의 칼.
모든 관료가 두려워하는 대상.
1등 귀족의 권한을 쥔 감찰단장이 이곳 둔에 당도하는 순간, 둔 관료들의 목이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게 한두 명에서 그칠지, 아니면 수십 명으로 확대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판단과 결정은 특수감찰단 단장의 몫이니까.
“특수감찰단. 이런 문제로 엮일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네요.”
“올란트,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 지금부터 확실하게 네 무죄를 증명해놔야 감찰단 눈에서 벗어날 수 있어.”
루카는 감찰단의 업적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작자들은 아니나, 솜털 같은 죄도 찾아내 벌하는 자들이다.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들이지.”
“착실한 관료군요.”
“하이에나들이다. 같은 동료들 등에 칼을 꽂는 놈들.”
“죄를 짓지 않고 법을 준수하며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는 없잖아요. 형님처럼 말이죠.”
“나라고 없겠냐. 특수감찰단이 조사를 시작하면 뭐라도 나올 거다.”
루카는 주머니를 거칠게 흔들었다. 금화가 맑은 쇳소리를 냈다.
“그러니 빨리 말해. 이 돈의 출처가 어디냐? 이렇게까지 말을 돌리는 널 처음 본다. 제발, 날 실망시키지 마라.”
달갑지 않은 웃음으로 잠시 버티던 올란트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께 받은 겁니다. 말 안 듣는 손자 놈에게 주신 회초리이자 격려예요.”
“조부님께 받았다라. 너는 내게 많은 걸 말해줬지만, 가족에 대한 건 항상 뭉뚱그렸지. 네가 ‘무스크’라 이름을 댔으니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깊게 묻지 않았고.”
올란트 무스크.
출신 성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자들이 주로 쓰는 이름이 ‘무스크’이다.
과거를 잊거나, 과거를 이겨내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은 군상들.
이곳 둔에서도 ‘무스크’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흔하디흔하면서도 다채로운 사정을 지닌 이름.
“이 정도 돈을 조달할 수 있다면 보통 분은 아니시겠지. 게다가 네 표현대로 이 금액이 회초리 수준이라면 어떤 신분일지 상상이 안 된다.”
이만한 돈을 격려금으로 줄 수 있는 양반이라. 루카는 올란트의 입을 직시했다.
대답이 필요했다. 무죄를 입증할 대답이, 감찰단 조사선상에서 벗어날 확답이.
“조부님의 존함이 어떻게 되지? 내가 아는 분이야? 둔에 계신 거고?”
“되도록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여기서 입 다물고 있으면 우리 아들을 못 보겠죠.”
올란트가 턱을 들었다. 약간의 쑥스러움과 죄송스러움이 눈빛에 담겨 있다.
“할아버진 성도에 계세요. 성함은 첼.”
“첼?”
흔한 이름이었다. 성도 길바닥에서 ‘거기 첼 씨’라고 외치면 서너 명은 돌아볼 것이다.
“네가 이렇게까지 머뭇거리는 걸 난 처음 본다.”
“말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할아버지께 죄송하기도 하고, 제 뚝심이기도 했으니까요.”
올란트가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첼이라고 하면 모르시겠지만, 세나티아 의원님과 연관 지으면 한 분이 떠오를 거예요. 바로 그분이에요. 저한테 그 돈을 주신 친할아버지가.”
루카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세나티아 의원.
그리고 첼.
두 이름이 합해져 나온 결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올란트의 말이 사실이고, ‘그분’의 손자라면… 여기에 가두고 그를 구타한 군인들은 지옥 문턱에 발을 걸친 셈이었다.
“정말이냐?”
“아시잖아요. 제가 말 안 하는 건 있어도 형님께 거짓말은 안 한다는 걸.”
“미치겠군.”
루카는 철창에 몸을 기댔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구금되기 전에 말했다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가업이 싫다고 뛰쳐나온 못난 놈이, 자기 편해지자고 할아버지 이름 팔 수는 없죠. 무엇보다 이런 일로 할아버지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올란트가 몸을 꼼지락거리며 철창으로 기어왔다. 구속구가 절그럭 소리를 냈다.
“일단은 형님만 알고 계세요.”
“그럴 수 없다. 같이 보고해야 해. 네 조부님은 그래야만 하는 분이시다. 거병 모듈 밀반출도 문제지만… 너도 만만찮은 문제가 됐어.”
“하하, 좋지 않네요.”
루카는 이마를 짚으며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들은 정보가 번뜩 떠올랐다.
“네 조부님께서 곧 둔에 도착하신다. 아니, 이미 들어와 계실지도 모른다.”
“예? 할아버지께서요?”
“스콜라 생도들과 함께 오셨을 거다. 정확한 일자는 기밀이라 나도 모르지만, 생도들은 이미 들어와 있으니 어쩌면….”
“큰일이네요. 할아버지께 이런 꼴을 보여드리고 싶진 않은데.”
올란트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일단 상관에게 알려야 했다. 죄의 유무를 떠나서 올란트를 빼내야 했다.
처우를 개선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이제 귀족 도련님이라 불러야 하나.”
“형님. 그런 끔찍한 말 마세요.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네요. 전 그냥 올란트입니다. 올란트 무스크.”
“네가 그렇게 말해도 주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거다. 당장 상부에서 난리가 나겠지. 일단 난 상관에게 보고를….”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감금실 복도 끝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취조 중이니 아무나 들이지 말라는 말을 부하에게 해뒀다.
취조부장이 온 걸까? 아니면 군부가 아닌 거병관리국 쪽 인물?
어두컴컴한 복도 끝에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노인이었다. 루카는 노인 뒤편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군부 인사가 아닌데 홀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건….
노인이 다가온다. 걸음걸이가 반듯했다. 백발을 단정하게 다듬은 신사.
다년간 군부에서 생활해오며 몸에 밴 감각이 경보를 울렸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저 노인에게 예의를 다하라고.
루카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렇다고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진 않았다.
이곳을 지키는 군인으로서 노인의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반쯤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절차를 넘길 순 없었다.
“독립 3군 소속 부대장 루카입니다.”
먼저 말을 걸었다. 노인은 정중한 어투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와 미안합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지 않는데,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나긋하지만 항거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알량한 권력가들의 일침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런 자들의 음성은 모기 날갯짓과 같아 윙윙거리며 금방 사라질 뿐이었다.
허나 앞의 노인은 달랐다. 육성 하나만으로 저급한 자들과 다름을 알려주었다.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하나, 바깥에 계신 분들이 만류하는 바람에 이렇게 몸만 왔습니다. 나는 첼이라고 합니다. 의회에서 잡무를 조금 맡고 있죠.”
의회에서 잡무라, 루카는 마른침을 삼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둔에서도 보기 힘든, 제국의 심장인 성도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거물이 눈앞에 온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