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화 (5/558)

제5화

핀들론이 가하란을 등 뒤로 숨겼다. 목을 움켜쥐는 듯했던 군인들의 시선이 사라졌다. 가하란은 까끌까끌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b150에 있는 올란트의 집을 찾고 있습니다.”

앞에 선 군인이 말했다. 왼쪽 어깨에 푸른 견장이 보인다. 거친 행동과 달리 말투는 차분했다.

“무슨 이유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핀들론 역시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하란은 두 어른의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자세한 건 알려드릴 수 없으니 이해 바랍니다.”

“위에서 하시는 일이니 부당한 처사는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핀들론이 손가락을 들어 가하란의 집을 가리켰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곳이 올란트의 집입니다.”

고개를 한번 끄덕인 군인이 집을 향해 턱짓했다. 뒤에 선 군인들이 집으로 들어갔다.

툴이 이빨을 드러내는 게 보였다. 가하란은 재차 툴을 불렀다. 지금은 얌전히 있어야 할 때다.

얌전해진 툴을 보던 군인이 신분을 밝혔다.

“둔 독립3군 소속 부대장 루카입니다.”

“이 골목에 거주 중인 자유 시민 핀들론입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루카의 눈길이 가하란에게 향했다.

“어르신 뒤에 있는 그 아이가 올란트의 자식이 맞습니까?”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핀들론이 재차 앞을 막아섰다. 가하란은 핀들론의 등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위험하다는 둔의 군부가 왜 우리 집을 수색하는 걸까. 어젯밤 아빠가 제철소에서 돌아오지 않은 건 일 때문이 아닌 걸까?

“이 아이에게도 용무가 있는 겁니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 사건과 무관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단지 개인적으로 전할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핀들론이 고개를 돌려 가하란을 보았다. 가하란은 긴장을 안으로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는 건가요?”

먼저 물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루카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시선을 맞췄다.

일직선상에서 본 루카의 눈은 무섭지 않았다. 고압적인 느낌도 없었다. 오히려 걱정과 위로가 담겨 있었다.

“넌 모르겠지만, 네가 어릴 때 난 널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네 아버지는 지금 약간의 오해가 생겨서 집에 못 오게 됐고.”

“무슨 일이죠?”

“그건 말해줄 수 없단다.”

“아빠는 괜찮은 건가요?”

“아직은 괜찮단다.”

아직은.

그 한마디에 함축된 수많은 의미를 가하란은 알 수 있었다. 그때 집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무언가 넘어지고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였다. 놀라서 집을 쳐다봤다. 돌아간 고개를 루카가 붙잡아 앞으로 돌렸다.

“철저하게 해야 네 아버지의 오해를 금방 풀 수 있어. 다소 거칠 게 보일 수도 있지만,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니다.”

믿어도 되는 걸까. 가하란은 루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흔들림 없이 올곧은 눈. 아빠를 닮은 눈동자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죠? 오해를 풀 수 있다면 뭐든 할게요.”

“듣던 대로 잘 자랐구나. 침착하고 영리하고. 하지만 네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단다.”

루카가 쪽지를 넘겨주었다.

“나는 이 쪽지에 대해 모른다. 무슨 뜻인지 알겠니?”

가하란은 얼른 쪽지를 펼쳐봤다. 익숙한 필체가 그곳에 있었다.

-아들. 걱정 말고 옆집 할아버지네 가 있어. 금방 갈 테니까.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 이 쪽지를 준 사람은 아빠 친구니까 인사 꼭 하고.

아빠가 보낸 것이다. 가하란은 내용을 읽은 담은 쪽지를 구겨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쳐준 루카가 무릎을 폈다. 몸을 일으킨 루카는 다시 냉정한 군인의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아빠의 친구.

그렇다면 믿어도 될 것이다.

문이 벌컥 열렸다. 군인들이 몇 없는 집안 살림을 들고나왔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서랍들 속에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아빠가 애지중지하는 도구들도 있었다.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빠가 알면 얼마나 속상해할까.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부대장님!”

담담하게 수색을 지켜보던 루카가 눈을 찌푸렸다. 군인 중 하나가 가죽 주머니를 들고 다가왔다.

저게 뭐지? 가하란도 처음 보는 주머니였다. 손질이 잘된 고급 모피가 묵직하게 부풀어 있다.

동여맨 끈을 풀고 안을 살핀 루카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어디서 발견했지?”

“서랍 밑바닥에 여닫을 수 있는 작은 문이 있었고 거기서 찾았습니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특별히 의심될 만한 건 없습니다. 그 돈 외에는요.”

돈. 가하란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 돈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걸까? 자유 시민은 돈은 가지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생긴 걸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핀들론이 물었다.

“말했다시피 자세한 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구금이 더 길어질 것 같군요.”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올란트 그 친구, 그릇된 일을 저지르고 살 위인이 못 됩니다.”

“압니다. 저도 그 친구가 얼마나 순진한지. 하지만….”

루카가 조심스럽게 주머니 안을 보여줬다. 가하란도 까치발을 세워 안을 확인했다.

황금. 금빛이 주머니 안에 넘실댔다. 가하란은 저 금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제국중앙은행에서 발행한 금화.

신용의 상징인 재화.

단순한 셈으로 따져도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금액이었다.

거기다 흠집이 나거나 뒤틀린 금화가 아니었다. 윤이 나는, 관리가 잘된 상품의 금화였다.

저런 건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특히 이런 골목에서는.

가하란은 루카의 얼굴을, 그리고 핀들론의 얼굴을 살폈다. 둘 다 경직돼 있었다.

일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두 사람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루카가 주머니를 챙겼다.

“가하란.”

“네.”

“네 아빠가 이 주머니를 평소에 보여준 적이 있니?”

“아니요. 처음 보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뒤 반사적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아빠 돈이 아닐 거예요. 뭔가 이상해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나온 이상 넘길 순 없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아저씨는… 아빠와 친구 맞죠?”

가하란은 똑똑히 보았다.

루카의 눈 밑이 꿈틀대고 목울대가 크게 출렁대는걸. 싸늘한 표정이 삽시간에 풀리고 온화하면서도 서글픈 얼굴이 됐다.

“나는 그놈을 세상 누구보다도 믿는다. 그러니 확인할 것이다. 이 돈의 의미를.”

루카는 따뜻했던 기운을 거두고 군인 특유의 날 선 느낌으로 돌아갔다.

“그만! 부대로 돌아간다.”

루카가 군인들에게 외쳤다. 집에서 나온 군인들이 대열을 맞춰 섰다.

열린 문틈으로 집 안 꼴이 보였다. 엉망이었다. 치우려면 몇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안 됐다. 애초에 치울 수나 있을까.

억울했다. 화도 났다. 그걸 표출할 수 없다는 점이 참담했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걸 얼굴 근육에 힘을 바짝 줘서 참았다.

우는 건 포기하는 거였다. 인정하는 거였다. 가하란은 믿었다. 이 불쾌한 오해가 금방 풀릴 거라고.

“아저씨.”

가하란은 몸을 돌린 루카를 불렀다. 루카가 고개만 살짝 돌려 가하란을 보았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말해봐라.”

“아빠한테 저는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집에서 툴하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주마.”

“고맙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돌아간다, 라는 말과 함께 루카가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군인들이 향하는 길목에 구정물이 뿌려졌다. 한참 떨어진 곳이라 맞지는 않았다. 군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밖에 누가 있는 줄 모르고.”

벤어 아줌마였다. 억센 곱슬머리를 쓸어 올리며 군인들을 쳐다봤다.

그 목소리를 시발점으로 이웃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오고,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웃들이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도와주지 못해서, 숨어서 미안하다는 듯이.

“뭐 하는 짓이지?”

군인 중 하나가 창을 슬며시 들며 말했다. 골목 이웃들이 움찔하며 집으로 들어갔지만, 몇몇은 여전히 군인들을 노려봤다.

“됐다. 반응하지 마라. 심기를 건드린 건 우리니까.”

루카가 말했다. 주변에 들릴 정도로 크게. 간접적인 사과라고, 가하란은 생각했다.

고압적일 수밖에 없는, 절대로 굽힐 수 없는 둔의 군인. 가하란은 루카를 보며 둔의 군인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깨달았다.

루카의 지휘하에 군인들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노려보던 이웃들이 크게 한숨을 내쉰 건 군인들의 그림자가 골목에서 사라진 후였다.

웰턴이 가장 먼저 가하란에게 달려왔다.

“대충 들었어. 너희 아빠 괜찮은 거야?”

“모르겠어요.”

웰턴이 엉망이 된 집을 쓱 보더니 말했다.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

뒤이어 다가온 이웃들도 다들 자기 집으로 오라며 신경 써 주었다.

“애는 내가 맡을 테니 자네들은 일들 보게. 아니지, 일단 집부터 정리해야겠군. 도와주겠나?”

핀들론이 중재하고 어른들이 움직였다. 번잡함 속에서 툴이 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다가왔다.

불안해 보이는 눈이었다. 가하란은 툴을 끌어안으며 군인들이 사라진 골목 끝을 보았다.

아빠, 괜찮은 거 맞죠?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이었다.

* * *

올란트 무스크.

처음 그 친구를 만났을 때 루카는 올란트가 내뿜는 유쾌한 기운에 사로잡혔다.

지옥에서도 악마와 친분을 나누며 즐겁게 보낼 인간. 올란트는 그런 인간이었다.

친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가족이라 칭해도 모자람 없는, 믿음직한 동생이었다.

그리고 지금.

루카는 신용하는 동생을 창살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독하게도 운이 없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형님, 얼굴이 왜 그래요. 밥 굶고 다닌 사람처럼.”

올란트가 말했다.

“네가 할 소리냐.”

루카는 올란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이곳저곳이 멍들어 있었다.

정중히 대해달라는 부탁은 먹혀들지 않았다. 부대장이란 직급도 이번 ‘사안’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몸은 좀 어떠냐?”

“다들 신사적으로 대해줘서 괜찮습니다. 전 손톱 뽑고 발가락 몇 개 자를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그치다니. 정말 다행이죠.”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냐?”

“웃어야죠. 울 수는 없으니까.”

유쾌한 웃음 속에 통증 어린 신음이 감돌았다. 루카는 철창 열쇠 구멍을 보았다.

당장에라도 철창을 열고 다친 동생을 꺼내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편히 움직일 수 있도록 구속구라도 풀어주고 싶었다.

“형님. 금방 끝날 일이니까 걱정 마요. 전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요.”

“안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루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른 감금실을 보았다. 그 안에도 사람들이 붙들려 있었다.

‘의심’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붙들려 이곳에 왔고, 피멍이 들도록 구타를 당했다.

진범을 가려내야 한다는 윗분들의 조급함과 못 잡아내면 처벌받는다는 아랫것들의 합작품이었다.

진범.

그 모호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 오늘도 이곳은 비명으로 가득했다.

“올란트.”

“그렇게 이름으로 부르니까 낯부끄럽네요. 평소처럼 야, 너, 동생아, 이렇게 해요.”

“네 집을 수색했다.”

올란트가 잠깐 침묵 후 말했다.

“엉망이 됐겠네요.”

“그렇지.”

“제 아들한테 쪽지는 전해줬죠?”

“씩씩하더군. 이해력도 빠르고. 걱정할 필요는 없겠더라.”

“절 닮아서 그래요.”

짧게 웃던 올란트가 앞을 보며 물었다.

“형님이 그런 표정으로 찾아온 걸 보면 집에서 나와선 안 될 게 나온 듯하네요. 말씀해 보세요.”

루카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아직 아무한테도 보고 안 했다. 내가 먼저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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