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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화 (4/558)

제4화

요리가 산처럼 쌓여 있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렸다. 꽤 먹은 것 같은데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툴,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

가하란은 돼지고기를 크게 뜯어 툴에게 주었다. 툴이 먹는 걸 지켜보다가 현관을 흘긋 봤다.

이웃들과 생일 파티를 끝냈는데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철소에서 주무시는 걸까.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곱 살. 생일을 챙겨주지 않는다고 칭얼댈 나이는 지났다.

안소니 아저씨 말대로 사내놈답게 자기 앞가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쓸쓸한 건 아직 어린 티를 못 벗어서 그런 거겠지?

귀족 자제들의 생활은 모르겠지만, 둔에서 태어나고 자란 시민은 일곱 살 때부터 일했다.

가업을 잇는 일이든, 행정처에서 지정한 일이든 일곱 살이 되면 시작하는 것이다.

가하란은 줄곧 아빠와 같이 제철소에 다니는 상상을 했다. 쇠를 주무르고 형태를 잡아 색다른 것을 만드는 행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하지만 둔의 제철소는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거기서 쇠를 다룰 수 있는 건 둔에서도 극소수였다.

아빠는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대답해 주었지만, 제철소와 관련된 질문은 애매한 웃음으로 넘겼다.

‘자격이 되면 알게 될 거야.’

이게 아빠의 대답이었다.

이제 일곱 살이 됐으니 자격이 생긴 걸까?

가하란은 굳게 닫힌 문을 계속 바라보았다. 저 문이 열리고 아빠가 얼른 돌아오길. 돌아와 내게 제철소에 대해 말해주길.

작게 하품하며 주변을 정리했다. 입맛 다시는 툴을 식탁에서 떼어내고 벽에 기대앉았다.

시계는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했다. 꾸벅꾸벅 감기는 눈으로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긴 어둠이 이어졌다.

잠에서 깬 건 옆에서 꿈틀대는 툴 때문이었다. 복슬복슬한 털을 한껏 쓰다듬으며 앞을 보았다.

반쯤 열어둔 창으로 햇볕이 기어들어 왔다. 늦여름 더위도 함께였다.

허벅지에 턱을 올리고 헥헥대는 툴을 떼어내고 일어섰다. 앉아서 몇 시간을 잔 건지.

식탁을 보았다. 덮어둔 천이 그대로였다. 아빠는 어제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쓸쓸한 기운을 웃는 것으로 날려 보내고 음식을 정리했다.

당장 먹어야 하는 건 식탁에 남겨두고, 나머진 따로 보관했다. 서늘한 곳에 둔다고 해도 며칠 못 가 상할 것이다. 여름 막바지라고 해도 꽤 더우니까.

이럴 때 마법공학품이 있다면 편할 텐데.

듣기로 부유한 귀족들은 마법공학품을 사용해 음식을 보존한다고 했다. 상하지 않는 요리라. 정말 매력적이었다.

본 적이 없어서 어떤 형태인지,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없었다. 재수가 좋으면 한 번쯤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문이요!”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너편 집 핀들론이 신문을 받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핀들론이 웃음으로 화답해 주었다. 인자한 주름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할아버지는 이 구역에서 유일하게 신문을 보는 어른이자, 세상 모든 걸 아는 지식인이었다.

아빠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낮은 골목의 현인’이었다.

“좋은 아침이구나.”

“네.”

“같이 볼 테냐?”

핀들론이 손짓했고 가하란은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어지러운 글자들이 지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쓰고 읽는 법을 배웠으나 아직 완벽한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 이건….”

“‘울프’라고 읽으면 된다.”

“늑대라는 뜻이죠?”

“그렇단다. 여기선 늑대가 아니라 신문을 뜻하는 거지만. 아주 겁 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신문인데, 발행을 금지해야 한다고 난리구나.”

“무슨 잘못을 했나요?”

“잘못했다기보단 바른말만 하는 친구들이라 아니꼽게 보는 사람이 많단다. 진실은 아픈 법이거든.”

“다들 아픈 건 싫어하죠.”

“그래서 덜 아프려고 이 신문을 막으려는 거란다.”

“막아도 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네 말이 맞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지. 하지만 네가 세상을 조금 더 살아가다 보면 다른 관점이 생길 거란다. 때로는 진실보다 앞서는 게 생기거든.”

“아빠는 그런 걸 보고 타협이라고 했어요.”

“타협이 꼭 나쁜 건 아니란다.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의 수준이 다르니까.”

“제대로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아요. 저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짓말하고 몰래 모험을 떠나고 싶거든요.”

“비슷한 느낌이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좋지만, 다 받아들이려고 하진 마라.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몸으로 겪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해준 말 아직 기억해요.”

“똘똘한 녀석.”

핀들론이 신문을 넘겼다. 오늘은 세 페이지나 됐다. 가하란은 기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기침했다. 입을 가리고 작게 하던 기침이, 어느새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커졌다.

가하란은 안절부절못하며 핀들론을 바라봤다. 최근 할아버지의 기침이 잦아졌다. 걱정돼 물어봐도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할아버지?”

“괜찮아, 괜찮아. 늙으면 다 이런 법이란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할아버지는 기침을 멈추고 안색을 되찾았다. 가하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핀들론이 다시 신문을 펼쳤다.

“닫아놨던 해상로가 다시 열린다고 하는구나. 연합왕국과 공식적으로 무역을 시작하는 거지.”

“무역은 좋은 건가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 종전 이후 오랜만에 열리는 바닷길이니 상인들도 감을 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게야.”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낮은 건물들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그 끝에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듣기로만 수없이 들어본 연합왕국이 있을 것이다.

제국과 연합왕국이 치른 15년 전쟁.

제국의 영웅이 긴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건 1년 전이라고 들었다. 아니, 2년 전인가?

가하란은 전쟁이 진행 중이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지만, 몸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할아버지가 말하길 전쟁 후반은 서로 노려보기만 할 뿐 양국 모두 피를 흘리진 않았다고 했다.

“전쟁은 왜 시작되고 왜 끝난 걸까요?”

가하란은 핀들론의 눈을 보며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구나.”

“왜요?”

“네가 세계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내 대답이 달라지니까. 코웃음 나올 정도로 쉽게 설명하자면 서로 얻을 게 있으니 싸웠고, 이제 얻을 게 없으니 그만뒀다라고 할 수 있겠지.”

“어렵게 설명하면요?”

“정치적, 지리적, 군사적. 여기에 양국이 품고 있는 문제와 시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소를 곁들여 말할 수 있겠지.”

“어렵겠네요.”

“그렇지.”

핀들론의 손이 가하란 머리 위에 올라왔다. 아빠와 달리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하지만 이 손도 좋았다. 닮고 싶은 어른의 손인 건 마찬가지니까.

“세상에 계속 질문을 던져 봐라. 그게 널 성장시킬 거다. 그리고 어느 순간 네가 질문을 받게 되겠지.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게야. 쉬운 대답이야말로 통찰의 끝이라는 걸.”

“할아버지처럼요?”

“난 말재주가 조금 괜찮고, 아는 게 조금 많을 뿐이다.”

핀들론이 가하란의 집 쪽을 쓱 쳐다봤다.

“올란트는 어제 안 들어왔니?”

“제철소에 주무신 거 같아요. 일이 많이 바쁜가 봐요.”

“섭섭하겠구나.”

“조금요. 그래도 다른 분들이 챙겨줘서 괜찮아요.”

핀들론이 신문을 접었다. 입가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근데 이상하구나. 다른 건 몰라도 네 생일만큼은 자리를 지키던 친군데.”

“저도 이제 일곱 살이잖아요. 다 컸으니까 혼자 보내도 돼요.”

“나이만 먹은 어른들보다 네가 낫구나.”

가하란은 신문을 넘겨받아 조심스럽게 말았다. 곧 수거하러 올 테니까.

“어제 거리에서 군인을 봤어요. 말을 타고 누굴 쫓는 거 같았어요.”

“군인?”

“네. 안소니 아저씨가 군부 사람이라고 했으니 맞을 거예요.”

“경비가 아니라 군부라. 그것도 골목을 말로 비집고 들어올 정도면 시급한 일이었겠구나.”

“살짝 궁금하긴 해요. 무슨 일인지. 나중에 형하고 같이 한번….”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핀들론의 손이 가하란의 팔을 움켜쥐었다.

“모험심은 좋다만 참을 때도 알아야 한다. 둔에 주둔한 군부는 다른 곳에 있는 군부와 성질이 매우 다르단다. 여긴 ‘알면 안 되는 게 많은 도시’고, 그걸 지키는 군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눈동자였다. 가하란은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엉뚱한 짓 안 할게요.”

“그래. 가벼운 비밀을 들여다보는 건 즐겁고 유쾌한 일이다. 그걸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둔의 핵심들이 관리하는 비밀에는 절대 관심을 두지 마라.”

둔의 핵심들.

온화함이 가신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아버지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경고할 때는 새겨들어야 했다.

그런 경고는 대부분 도움이 되는 것이었고, 가하란은 어길 생각이 없었다.

“넌 똑똑한 아이니까 괜찮을 테지만.”

핀들론이 손을 놓았다. 차가웠던 눈동자도 다시 온기를 찾았다.

“군부가 그렇게 위험한가요?”

“둔이라 그렇단다. 특히 거병관리국과 연관된 기관은 모두 그렇지.”

거병과 관련된 모든 곳.

가하란은 아빠를 떠올렸다. ‘비밀스러운 제철소’ 역시 거병관리국 산하니까.

“네 아빠는 걱정 마라. 현명한 친구니까. 위험한 일에 절대 손댈 사람이 아니지.”

“맞아요. 아빠는 그런 사람이에요.”

웃으면서 대답할 때였다. 복잡한 골목을 비집고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

군복이었다.

2층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이웃들이 얼른 창문을 닫았다. 나와서 햇볕을 쬐던 이웃들도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가하란은 핀들론을 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군인들의 매서운 눈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거긴 우리 집이었다.

군인들이 다가온다. 사람을 본떠 만든 인형처럼 움직임이 기계적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이동하며 발에 걸리는 장애물은 당연하다는 듯이 치워버렸다.

벨로 아줌마의 빨랫줄이 잘려 나갔다. 잘 마른 빨래가 군화에 짓밟혔다.

수리가 끝났다고 좋아했던 웰턴의 흔들의자가 우지끈 분질러졌다. 의자를 부술 때조차 군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이윽고 군인들이 가하란 집 앞에 섰다.

월월. 낯선 인간의 냄새가 신경을 건드린 걸까, 툴이 문밖으로 나와 크게 짖었다.

온순한 툴이 저리 크게 짖는 건 처음 봤다. 꼬리를 바닥으로 내리깔고 으르렁대며 상체도 숙였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군인을 물어뜯을 기세였다.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툴!”

가하란은 소리를 질렀다. 바짝 경계하던 툴이 고개를 홱 돌렸고, 그 순간 군인들의 시선도 이쪽으로 향했다.

발끝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은 예전에 딱 한번 느껴봤다. 아빠의 허락 없이 작업도구에 손을 댔을 때, 아빠는 다정한 눈길을 거두고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들아, 이건 절대 손대지 마라.’

그때 그 목소리가 군인의 눈빛과 함께 되살아났다.

“툴, 얌전히 있어.”

겨우 목소리를 짜내 말했다. 가하란은 보았다. 왼쪽에 선 군인이 칼 손잡이를 반쯤 움켜쥔 걸.

시끄럽게 떠드는 개 한 마리쯤 아무렇지 않게 죽일 것이다.

툴이 치켜든 귀를 내리고 얌전해졌다. 군인들이 천천히 가하란 쪽으로 걸어왔다.

다수의 어른. 그것도 군인. 배가 아려왔다. 무서웠다. 그때, 공포를 거둬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둔의 정예들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핀들론이 앞으로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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