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화 (3/558)

제3화

“귀족?”

안소니가 앞치마로 입을 훔치며 되물었다.

“네.”

붉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던 여자아이. 가하란은 아이의 인상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웰턴네 고양이가 자유를 꿈꾸며 탈출했고, 그걸 찾아 가구 거리로 갔으며, 거기서 귀족 여자애와 마주쳤다고.

“착하더라고요. 고양이도 얌전히 돌려주고.”

“귀족도 사람이니까. 뺀질뺀질한 녀석들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사적인 자들도 많지. 네가 만난 아이는 예의를 아는 귀족인가 보구나.”

“그런 것 같았어요.”

가하란은 토마토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흰색 사자. 그 여자애 옷에 그런 문양이 새겨져 있었어요. 아저씨, 그게 뭘 상징하는 건지 아세요?”

“흰색 사자?”

안소니가 턱에 주름을 잡았다.

“사자 문양이야 여기저기 쓰이지. 워낙 상징적인 동물이니까.”

“둔에서 몇 번 본 문양하고 좀 달랐어요. 그나마 비슷한 건 황가의 상징 정도?”

“그래? 한번 그려봐라.”

안소니가 가게 장부를 가져왔다. 빈 페이지를 펼쳐 가하란 앞에 놓았다.

연필을 쥐고 기억 속 문양을 종이 위에 옮겼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언제 봐도 잘 그리네.”

지켜보던 테리가 말했다.

“이렇게 생겼어요. 빗금 친 부분이 흰색으로 채워져 있었고요.”

가하란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냈다. 아마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정말 이렇게 생긴 사자였냐?”

“네. 이게 뭔지 아세요?”

“알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상징 중 하나니까.”

안소니가 연필을 들고 그림 아래 글자를 썼다. 가하란은 소리 내어 그 글자를 읽었다.

“스콜라.”

성도에서 올 예정인 특별한 친구들. 아빠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빠가 말해줬어요. 성도에서 스콜라 생도들이 온다고.”

제니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스콜라가 뭐야?”

“제국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 여자애도 스콜라 생도였구나. 자신감 높아 보이던 눈매가 다시금 떠올랐다.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진짜 멋있을 거야, 스콜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테리의 눈이 반짝였다. 무언가 결심한 눈이었다. 아마 며칠 내로 사고가 터질 것이다.

거기에 나도 동참할 거고. 가하란은 안소니의 눈치를 살피며 씩 웃었다.

“너희 둘. 괜한 짓 벌이지 마라. 스콜라 생도들은 위험해. 시민부터 귀족까지 능력이 있는 자라면 다 받아주는 곳이지만, 대부분이 귀족 자제들로 구성돼 있다. 구경하겠다고 괜히 기웃거리다가 문제 될 수도 있으니까 얌전히 있어.”

안소니가 말했다. 꼬맹이 두 놈의 속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정리했다. 테리가 설거지하는 동안 제니와 함께 밖에 널어둔 이불을 걷어왔다.

“그 귀족 여자애, 가까이서 보니 어땠어?”

제니가 베갯잇을 팔에 포개며 물었다.

“뭐가?”

가하란은 제니의 눈을 보며 말했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느낌 말이야, 느낌. 귀족다웠어? 멋있어? 예뻐?”

“그런 것 같아. 근데 잘 모르겠어. 또래 귀족과 얘기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나도 이러면 귀족 같을까?”

제니가 펑퍼짐한 치마 끝단을 살포시 잡고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귀족의 예법 같았다.

“어, 귀족 같아.”

가하란은 얼른 대답했다.

“정말?”

“그렇다니까.”

“어디가 어떻게? 어떤 점에서 귀족 같았어?”

시작됐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제니의 질문 공세가 이어질 것이다. 다행히 탈출 방법은 알고 있었다.

“나 생일인 거 알지?”

“알지.”

“선물 준비했어?”

제니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선물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마땅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제니가 붙잡고 있던 치마 끝자락을 놓았다.

“미안해. 나 사실 선물 준비 못 했어.”

아이고, 이런 전개도 좋지 않아. 내버려 두면 저 동그란 눈에 물기가 차오를 것이다. 가하란은 제니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웃었다.

“괜찮아. 오늘 같이 밥 먹어서 정말 즐거웠으니까. 선물이 뭐 중요한가.”

“그래도….”

“진짜 괜찮다니까. 그보다 루비 시장 가봤어? 축제 곧 끝난다던데.”

“거기 사람 많아서 못 가봤어. 아빠랑 가고 싶은데 가게 때문에 시간이 안 나.”

“그러면 우리끼리 가볼래? 테리 형하고 같이.”

“진짜? 근데 혼나지 않을까?”

“혼이야 나겠지만 가면 진짜 재미있을 거야.”

촉촉했던 눈이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가하란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리한테는 미안하지만 위기를 넘기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셋이서 가는 거다? 꼭!”

“물론이지.”

제니에게 확답까지 했으니 이제 피할 수 없게 됐다. 테리가 알면 눈부터 찌푸리겠지만 어쩌겠는가. 제니한테 시달리는 것보단 테리한테 한소리 듣는 게 나았다.

그리고, 제니만 내버려 두고 가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총총걸음으로 여관에 들어간 제니가 곧바로 테리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뭔가를 말하는데, 듣자마자 테리가 가하란을 쏘아봤다.

가하란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맞다. 보여줄 거 있어.”

가하란은 아빠가 준 조각상을 내밀었다. 거병을 축소한 모형. 와아, 하며 테리가 다가왔다.

“거병이잖아.”

“아빠가 만들어줬어. 우리가 본 거병하고 비슷하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은데?”

테리가 한동안 조각상을 구경하다가 제니에게 넘겨주었다.

“올란트가 만든 거냐?”

뒤에 있던 안소니가 말했다.

“네. 잘 만들었죠?”

“그놈이 만들었다면 흠잡을 곳 없겠지. 둔에서 가장 손재주가 좋으니까.”

가하란은 자신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나 이거 하루만 빌려주면 안 돼?”

제니가 조각상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뭐 하려고?”

노는 거라면 몰라도 물건에 욕심낸 적이 없는 제니였다. 가하란은 일단 의도를 물었다.

“내 친구가 인형 샀다고 자꾸 놀려서. 너희 집에는 이런 거 없냐고 계속 그러는데, 이거면 자랑할 수 있을 거 같아.”

제니가 목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카운터로 돌아간 안소니는 장부를 정리하느라 이쪽 대화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빠한테 인형 사달라고 하고 싶지만 요즘 가게 장사가 잘 안되거든.”

“쓸데없는 소린 하지 마.”

테리가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가하란은 제니와 조각상을 번갈아 본 다음 입을 열었다.

“하루면 돼?”

“응.”

“이삼일은 갖고 있어야 제대로 자랑할 수 있지 않겠어?”

“그래도 돼?”

“물론이지. 인형보다 우리 아빠가 만든 조각상이 더 멋있을 거야. 그러니까 질리도록 자랑해버려.”

“가하란 최고! 오빠보다 더 좋아!”

제니가 다녀오겠다며 여관을 나섰다. 서둘러 움직이는 걸 보면 꽤나 분했던 모양이다.

“내가 잘 지켜볼게. 절대 안 망가지도록.”

“괜찮아, 형. 저거 땅에 던져도 약간 흠집만 날 거야. 무른 철이라고 해도 열을 가하지 않으면 단단하니까.”

팔짱을 끼고 끄덕이던 테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니한테 루비 시장 얘기한 건 이걸로 넘어가 준다.”

“그거 다행이네. 아까 그랬지? 내일 저녁에 간다고.”

“되면. 가게 일 도울 수도 있거든.”

“그러면 시간 될 때 가자. 축제는 다음 주까지니까.”

가하란은 입을 살며시 다물었다. 안소니가 쳐다보고 있었다.

“아저씨가 눈치챈 것 같은데.”

“우리 아빠 눈치야 둔에서 최고지. 그래도 괜찮아. 여차하면 네 생일 선물로 시장 구경 갔다고 둘러댈 테니까.”

“날 파는 거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팔겠어.”

소리 죽여 웃을 때였다.

“잡아!”

“저쪽으로 돌아가!”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우당탕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가하란은 곧바로 창가로 달려갔다.

“뭐야?”

“모르겠어. 누가 도망치는 거 같은데?”

이윽고 눈앞으로 군복 차림의 남자 셋이 지나갔다. 둔에 주둔 중인 군부 사람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안소니가 다가오며 물었다.

“군인들이 어떤 사람을 쫓고 있었어요.”

가하란이 대답했다.

“경비병이 아니라 군인이? 이곳 둔에서?”

밖으로 나오지 마라, 안소니가 문을 열며 말했다. 얌전히 따를 테리가 아니었고, 가하란도 슬쩍 문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두두두, 지면을 두드리는 말발굽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말을 탄 군인이 여관 앞길을 가로질렀다.

시민들이 놀라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큰일이 난 거 같죠?”

가하란은 멀어지는 말을 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그보다 내가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하, 작게 웃으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제국 군복! 역시 멋있긴 해.”

테리는 사건보단 눈앞에 나타난 군인에 반한 모습이었다. 형은 언젠가 군부에 들어갈 거라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다.

“적들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해서, 언젠가 제국의 영웅이 되는 거야. 제국 기사의 총수, ‘허스 벨루 산트’ 같은 영웅이.”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큰 꿈 아니야?”

“남자가 이 정도는 돼야지. 가하란, 넌 내 부관 시켜줄 테니까 나만 따라와. 영광된 길이 내 앞에 펼쳐졌도다!”

“난 제작소에 들어갈 거야. 군인은 싫어.”

“그것도 나쁘진 않지. 그러면 내 전용 검을 너한테 맡길게.”

“아주 비싸게 팔아야겠네. 영웅이 쓰는 검이니까.”

“얼마든지.”

제국의 영웅.

테리가 입에 달고 살았던 그 영웅의 장례식이 몇 달 전에 있었다.

성도에서 치러진 장례 소식은 이곳 둔까지 전해졌고, 추도 기간 동안 금주령이 함께 내려졌다.

소식을 접한 테리는 하루 동안 계속 울었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형은 처음 봤다. 팔이 분질러져도 눈물만 찔끔 짜내던 형이었는데.

그만큼 선망했던 것이리라, 제국의 영웅을.

거리가 조용해졌다. 고함치며 달리던 군인도 사라졌다. 은은하게 깔렸던 긴장감도 흩어지고, 사람들도 다시 본업에 집중했다.

“방금 봤어?”

여관으로 뛰어 들어온 제니가 말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군인들을 본 모양이다.

“말 진짜 크더라.”

“가까이서 봤어?”

“내 앞을 휙 지나갔어!”

제니가 흥분하며 말했다. 손에 든 조각상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이내 가하란에게 내밀었다.

“벌써 돌려주려고?”

“이제 괜찮아. 친구랑 같이 말을 봤거든. 우리 다시 친하게 지내기로 했어.”

말을 같이 본 것과 친하게 지내기로 한 것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해결됐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친구끼린 친하게 지내는 게 좋지.”

가하란은 조각상을 받은 후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돌아가야 했다. 정리할 것도 있고 저녁도 준비해야 하니까.

“이만 갈게. 아저씨! 저 이제 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내일 보자며 눈을 찡긋하는 테리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여관을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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