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네 거야?”란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잠깐 고민했다. 웰턴네 고양이니까 따지자면 내 고양이는 아니었다. 하지면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왜 대답이 없어.”
“내 고양이는 아니야. 아는 분 고양이거든.”
“네 것도 아닌데 왜 쫓고 있지?”
“걔가 도망친 거라 찾고 있었어.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니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이거 내가 알기론 꽤 귀한 품종이야. 귀한 건 비싼 법이고.”
여자아이는 고양이의 뒷덜미를 잡아 자신의 눈앞으로 데려왔다. 고양이가 발버둥 치다가 얌전해졌다.
가하란은 고양이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여자애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하면 누구라도 움츠러들 것이다.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뭔가 많이 달라 보였다. 그제야 입고 있는 옷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박음질한 옷이었다. 염료도 좋은 걸 썼는지 빛깔이 좋았다. 거기에 왼쪽 어깨에 문양이 박혀 있었다.
흰색 빛깔 사자였다.
옷에 특별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면 일단 주의해라, 아빠의 가르침이었다.
“베베, 그게 고양이 이름이야.”
“그거론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는데. 이름 정도야 나도 지어낼 수 있으니까.”
여자아이가 고양이 이곳저곳을 훑은 다음 말을 이었다.
“이름표가 달린 것도 아니고.”
가하란은 생각했다. 저 고양이가 웰턴이 키우는 고양이이며 이름이 베베라는 걸 확인시킬 방법을.
“왜 말이 없어.”
여자아이가 재차 물었다.
“생각해 봤는데 지금 여기서 널 설득시킬 방법은 없는 것 같아.”
“그건 이 고양이가 주인 없는 고양이란 뜻이겠지?”
“그건 아니야. 웰턴 아저씨가 기르는 고양이라는 건 사실이니까.”
“아니면 비싼 고양이로 한몫 챙겨보려는 수작일지도 모르지.”
“맞은편 가게의 주인 할아버지가 그 고양이를 알아. 고양이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물어보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둘이 한통속일지도 모르잖아? 귀한 품종의 고양이는 정말 고가에 거래되니까.”
고양이를 품에 안으며 말하는 여자아이였다. 베베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낯선 여자아이 품에서 가르릉 울었다. 웰턴이 봤다면 슬퍼했을 것이다.
“날 안 믿는구나.”
“널 믿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믿어줘야 해.”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네.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우리 아빠가.”
여자아이가 한쪽 눈을 씰룩거렸다. 눈꺼풀이 내려오며 붉은 눈동자를 반쯤 가렸다.
“그건 잘못된 가르침이야. 잘 들어. 믿음은 정말 희소한 거야. 검증된 유대 안에서만 발현될 수 있는 게 믿음이지. 거리에서 막 마주친,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상쩍어 보이는 애한테 믿음이 가당키나 해?”
단숨에 말을 쏟아낸 여자아이가 픽 웃더니 자신의 단발머리를 쓱쓱 매만졌다.
“말이 조금 어려웠지? 그러니까 네가 이해할 수 있게 쉽게 말하자면….”
가하란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여자아이의 말을 끊었다.
충분히 알아들었다. 잘 안 쓰는 단어가 섞여 있긴 했지만, 아빠를 통해 배운 것들이었다.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래. 내가 친절을 베풀면 상대도 친절을, 내가 사랑을 전하면 상대도 사랑을. 그래서 내가 믿음을 주면 상대도 내게 믿음으로 답한대. 믿음이 희소하다고 말하는 건 역으로 말해서 그릇이 작다는 뜻일지도 몰라. 나는 남을 도둑으로 보지 않아. 너도 그래 줬으면 하는데.”
여자아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거 준 대공의 가르침인데. 비유도 완벽히 똑같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준 대공?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빠한테 배운 것뿐이야.”
“네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태도가 조심스러워진다. 가하란은 상황 파악을 끝냈다.
무언가 오해 혹은 착각이 생긴 것이다. 상황을 이용하면 고양이를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
거짓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사실 몇 개를 숨기면 된다. 아버지 이름을 말할 수 없다거나, 뭉뚱그리거나.
하지만 그건 상대를 기만하는 것이었다. 가하란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올란트. 들어본 적 없을 거야. 귀족이나 유명한 관료는 아니니까.”
사실대로 말했다. 사실은 중요한 법이다.
여자아이는 미간을 살짝 오므리며 말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긴 하네. 아까 한 그 말, 정말 네 아빠가 가르쳐준 거야?”
“맞아.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눈을 씰룩이며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고양이를 앞으로 쓱 내밀었다. 베베가 축 늘어진 채로 가하란 눈앞에 왔다.
“받아 가.”
가하란은 두 손으로 고양이를 안았다.
“돌려주는 거야?”
“여기서 얘를 돌려주지 않으면 난 속 좁은 인간에 남을 도둑 취급하는 몰상식한 사람이 되는데, 그럴 순 없으니까.”
“꼭 그렇단 뜻은 아니야.”
여자아이가 옷에 묻은 고양이 털을 떼어내며 말했다.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건 좋은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귀족과 시민의 화합이 황제 폐하의 뜻이라지만, 그걸 이행하는 귀족은 많지 않아.”
“이해했어.”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의 머리를 비스듬하게 꺾었다.
“무슨 뜻인지 정말 알아들은 거야?”
“비꼬는 말로 들릴 수 있으니 다른 귀족 앞에서는 조심해라, 그런 뜻이지?”
“맞아.”
“알려줘서 고마워.”
“귀족이 아량을 베푸는 건 미덕이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내 체면 차리는 거니까.”
“그래도 고마워. 베베를 돌려준 것도, 모르는 걸 가르쳐준 것도.”
“…그래. 계속 고마워해.”
여자아이는 손가락 끝에 들러붙은 고양이 털을 후, 불어내며 몸을 돌렸다.
가하란은 여자아이가 걸어가는 방향을 지켜보다가 웃으며 돌아섰다.
“어디서 찾은 거야?”
“가구 거리에서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웰턴을 만났다. 베베를 보자마자 반쯤 울 듯한 얼굴로 고양이를 받았다.
“고마워. 너 없었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기 싫어.”
“앞으론 문단속 잘하세요. 너도 그만 좀 뛰쳐나가고.”
가하란은 고양이 코를 살짝 누른 후 루드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건 아니죠?”
여관 문을 열며 말했다. 안소니가 카운터에서 나오며 말했다.
“딱 맞춰 왔다. 네 아빠는?”
“다시 제철소로 가셨어요. 일이 바쁘다면서.”
“저녁에는 돌아온다던?”
“네. 빨리 끝내고 온다고 하셨어요.”
“그나마 다행이군. 2층에 애들 있다. 가서 내려오라고 해. 밥 먹자.”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갔다. 테리가 이불을 든 채 객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도와줄까?”
“안에 베개 좀 가지고 나와.”
가하란은 객실에 널브러져 있는 베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왔어?”
맞은편 객실 문이 열리며 제니가 나왔다. 머리를 감싼 천 밑으로 연갈색 머리카락이 삐져나왔다. 바짝 자른 머리카락이 어느덧 자란 것이다.
오빠인 ‘테리’를 따라 머리카락을 홱 잘랐던 게 엊그제 같은데.
“왜?”
제니가 물었다.
“아저씨가 밥 먹으래.”
가하란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머리카락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제니는 둥근 생김새와 달리 불같은 고집도 갖추고 있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머리카락을 또 잘라버리면 큰일이다.
1층으로 내려오니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 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향이었다.
“이것만 정리하고 올게요.”
테리가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하란도 뒤따랐다.
“생일 축하해.”
이불을 널며 테리가 말했다.
“고마워, 형.”
“저녁에 루비 시장 구경 갈래?”
“아빠랑 저녁 먹기로 했어.”
“그러면 내일 가자. 추수 기원 축제가 끝나기 전에 한 번은 가 봐야지.”
“아저씨가 허락할까? 사람들 많아서 안 된다고 할 텐데.”
“형만 믿어. 몰래 가면 돼.”
“제니는?”
“걔는 떼어놓고 갈 거야. 데려가면 골치 아파.”
“갈 거면 같이 가. 나중에 우리 둘이서만 갔다고 난리도 아닐 거야.”
“그것도 그래.”
테리가 씩 웃었다.
두 살 위인 형.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주는 사람.
가하란은 테리를 쫓아 비밀스러운 둔의 이곳저곳을 누볐다. 덕분에 혼도 많이 났지만 모험을 멈출 순 없었다.
“이거 받아.”
테리가 무언가를 던졌다. 두 손으로 받았는데 꽤 묵직했다. 표면이 거친 쇳덩이였다.
“어디서 났어?”
“거병관리국 철조망 근처를 빙글빙글 돌다가 주웠어. 너 생각나서 챙겼는데, 어때? 좋은 거야?”
“청철이야. 많이 쓰이는 쇠 중 하나일걸.”
“귀한 건 아니네. 생일 선물로는 좀 그런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근데 관리국 근처는 가지 마. 위험하잖아.”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간 건 아니야.”
묵직한 쇠를 주무르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안소니와 제니가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둘이서 또 뭐 했어?”
제니가 말했다. 의심의 눈초리가 매섭다. 가하란은 입술을 붙인 채 도리질을 쳤다.
“나 빼놓고 또 뭐 하면 알지?”
제니 말에 테리가 코웃음 쳤다.
“이 아빠는 매년 소원을 빌고 있다. 너희 둘이 제발 하루만이라도 얌전하게 있길.”
안소니가 테리와 제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가하란은 웃으면서 말했다.
“아저씨, 그건 불가능한 소원 아닐까요?”
“불가능하니까 비는 거다. 그리고 가하란. 생일 축하한다. 일곱 살이 됐으니 이제 열심히 일해야지.”
“아빠, 축하만 해줘요. 그런 재미없는 말은 붙이지 말고.”
테리가 음식을 덜며 말했다.
제니의 포크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큼직한 미트볼을 재빨리 낚아채 입으로 가져갔다.
가하란은 손수건을 내밀었고, 제니는 고맙다고 하며 받은 다음 입가를 훔쳤다.
“‘하늘석’이 위로 지나가는 거 봤는데 생각보다 작더라.”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가다가 하늘석이 주제로 올랐다. 이야기를 꺼낸 테리는 두 손을 펼치며 돌의 크기를 표현했다.
“이 정도? 아니, 이것보다 작던가.”
“멀어서 그렇지 가까이서 보면 엄청 크대.”
“그래?”
“우리 아빠가 그랬으니까 아마 맞을 거야.”
“올란트 아저씨가 그랬다면 그런 거겠지. 한번 가까이서 보고 싶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하늘석을 코앞에서 볼 수 있겠지?”
“둔 근처에는 산이 없잖아.”
“그러니까 멀리 나가 봐야지. 가하란, 어때? 보고 싶지 않아?”
“당연히 보고 싶지. 하늘석을 가까이서 보면 소원이 없을 거야.”
“도전해 볼까?”
신나서 떠들다가 헛기침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안소니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들의 가상한 모험심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도시를 벗어나는 건 안 돼. 너희가 도시를 떠나는 건….”
“자유 시민권을 갖고 나서죠? 알아요.”
“알고 있다니 다행이다.”
“누구 아들인데 그걸 모를까.”
테리가 턱을 들며 웃자 안소니가 테리의 코를 살짝 쥐고 흔들었다.
“가하란.”
“네, 아저씨.”
“혹시라도 이 녀석이 도시를 벗어나자고 한다면 나한테 즉시 알려라. 같이 떠날 생각 말고.”
“그럴게요.”
대답은 착실하게 했지만 그 순간이 오면 아마도 형을 따라서 몰래 도시를 나서지 않을까?
“나 따돌리고 가기만 해.”
제니가 포크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말없이 갔다가는 한 대 찌를 기세였다.
제니는 그러고도 남을 애였다. 여리고 눈물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억세기도 하니까. 엉엉 울면서 기어코 테리를 쫓아 뛰는 게 제니였다.
“아, 맞다. 아까 가구 거리에서 귀족 여자애를 만났어요.”
하늘석이 식탁에서 물러났으니 다음 얘기를 꺼낼 차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