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쇠로 만든 심장에 영혼이 깃든다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적어도 난 사람이라 부르고 싶다.
* * *
“‘하늘석’은 왜 떠다녀요?”
“땅이 싫어서.”
“해는 왜 달하고 같이 못 떠요?”
“둘 사이가 안 좋거든.”
“하늘은 왜 푸르죠?”
“잿빛일 때도 있다. 붉을 때도 있지. 기분에 따라 바뀌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보다 너 심부름 온 거 아니냐?”
“맞아요.”
가하란은 아빠가 준 쪽지를 내밀었다. 잡화점 주인인 콜이 쓱 살핀 후 바구니에 물건을 담았다.
“적힌 거 다 담았다. 꽤 무거우니까 조심하고.”
“감사합니다. 근데요 아저씨….”
“질문은 네 아빠한테 가서 해라. 아니면 핀들론 어르신께 하거나. 난 똑똑하지 않거든.”
“아빠는 아저씨가 둔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했어요.”
“네 아빠가 날 팔아넘긴 거다. 그리고 나보다 네가 더 박식하니까 나한테 뭘 물을 생각 마.”
“박식하다. 아는 것이 많다는 뜻이죠? 전에 한번 들어서 이제는 알아요.”
“그래, 너 똘똘한 거 아니까 얼른 가 봐. 아니면 가게 일이나 도울래?”
“그러고 싶지만 아빠가 바로 오라고 해서요.”
가하란은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으로 사두마차가 휙 하고 지나갔다.
정비가 덜 된 도로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들렸다. 살짝 기우뚱거리던 마차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대로변은 언제나 위험했다. ‘둔’에서 한눈팔고 다니다가는 마차에 치이고 사람들한테 치여 크게 다칠 것이다.
건물들이 각을 맞춰 들어선 도시.
태어나고 자란 도시.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도시.
그럼에도 여전히 비밀스러운 곳이 많은 도시.
바구니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 걸음을 뗐다. ‘루드 여관’ 앞을 지나갈 때 안소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집에 가는 길이냐?”
“네.”
“밥은?”
“아직이요.”
“네 아빠하고 점심때 같이 와. 같이 먹자.”
“그러고 싶은데 아빠는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너라도 와.”
“그럴게요.”
여관을 지나 다시 골목으로 들어섰다. 다닥다닥 붙은 집 사이를 누비며 안쪽으로 진입했다.
“가하란!”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B150 3층에 사는 지노 아줌마였다.
“나 좀 도와줄래?”
가하란은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심부름 중이에요.”
“그러면 그거 끝나고 시간 돼?”
“뭐가 문젠데요?”
“간단한 청소.”
“시간이 되면 갈게요.”
이번엔 그 아래층에서 웰턴이 고개를 내밀었다.
“가하란! 우리 집 고양이가 또 집을 나갔어!”
“저녁 되면 돌아올 거예요. 저번에도 그랬으니까요.”
“이번엔 달라! 어떡하지? 나 걔 없이는 못 살아!”
금방 시무룩해지는 웰턴이었다. 가하란은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생각했다. 아빠 심부름을 끝내고 나면 30분 정도 시간이 날 것이다. 점심시간에 맞춰 여관에 가려면 10분 정도는 필요하니까….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근데 계속 찾을 순 없어요. 약속이 있거든요.”
“부탁할게!”
“일단 시장으로 가보세요. 저번에도 거기서 찾았으니까.”
웰턴이 알았다면서 창문을 닫았다. 오늘도 자그마한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었다.
아빠는 말했다. 여긴 시끌벅적해서 좋은 곳이라고.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다.
“다녀왔어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툴’이 달려와 반겨주었다. 복슬복슬한 털 사이로 손을 넣고 마구 간질여 주었다.
반년 사이에 덩치가 배로 커진 툴이었다. 개들은 원래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걸까. 이러다 집보다 더 커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아빠?”
방에 있나, 가하란은 재차 아빠를 부르며 방문을 열었다. 희미한 쇠 냄새가 코밑을 스쳐 갔다.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던 것 같다.
“아빠 어디 갔는지 몰라?”
가하란은 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툴은 두툼한 혀를 길게 내밀며 학학거릴 뿐이었다.
바구니에 든 물건을 정리한 후 의자에 앉아 시계를 보았다. 고양이도 찾으러 가야 하고, 이따가 여관에도 가야 하는데.
고민하던 사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릿한 쇠의 냄새. 아빠였다.
“안소니 아저씨가 점심 먹으러 오래요. 시간 어때요?”
“제철소로 다시 가 봐야 해.”
“오늘도 늦어요?”
“글쎄. 일이 바빠서 조금 늦을지도?”
아빠가 다가왔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더니 가하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빠 없으면 심심하지?”
“혼자보단 둘이 덜 심심하죠.”
“미안해. 아빠가 시간을 내야 하는데 요즘 일이 정말 바빠.”
아빠는 제철소에서 일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제철소에서.
비밀이 많은 도시 둔에서도 아빠가 일하는 제철소는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잠깐 눈 감아봐.”
아빠가 말했다.
“왜요?”
“이럴 땐 되묻지 말고 조용히 감는 거야.”
가하란은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쇳내가 한층 더 진해졌다. 코를 찡하게 만드는 냄새.
“눈 떠봐.”
슬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작은 조각상이었다.
“이건 황쇠라고 하는 건데 다루기 쉬운 금속 중 하나야. 그래서 이런 세밀한 표현도 쉽게 해낼 수 있지.”
가하란은 두 손으로 조각상을 받았다. 생김새를 보자마자 무엇을 본떠 만든 건지 알 수 있었다.
“‘거병’이네요.”
거대한 병기가 자그마한 형태로 변해 손아귀에 들어왔다. 육중한 갑옷을 두른 기사를 연상시키는 생김새.
신기해서 이곳저곳 뜯어보았다.
“마음에 들어?”
“네! 아빠가 만든 거예요?”
“생일 선물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는 없지. 물론 도움을 받긴 했어. 큼지막한 건 잘 다루는데 이런 아기자기한 건 서툴거든. 밑에도 한번 봐봐.”
가하란은 조각상을 들어 올려 발판 밑을 확인했다.
“읽을 수 있겠어?”
“이 정도는 읽을 줄 알아요.”
“역시 내 아들이라 똑똑해.”
아빠의 손이 머리를 덮었다. 가하란은 거칠고 큰 아빠의 손이 좋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저런 손을 갖는 거라고 막연히 생각할 정도였다.
“선물이 하나 더 있어.”
“뭔데요?”
“거병을 가까이서 보게 해줄게.”
“진짜요?”
놀라서 하마터면 조각상을 떨어트릴 뻔했다.
“아들의 일곱 번째 생일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짧은 수염이 비죽비죽 솟은 아빠의 입가가 환한 웃음을 그렸다.
거병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기뻐서 만세를 외쳤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거병은 구경 못 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번에 견학 허락이 떨어졌어. 물론 우리 보라고 열어주는 건 아니고 특별한 친구들이 성도에서 온다고 해. 그 틈에 껴서 구경하는 거지.”
압도적인 크기의 거병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게 좋아?”
“네.”
“아들은 거병이 왜 좋아?”
“이럴 때 쓰는 말이 있대요.”
“뭔데?”
“피는 못 속인다. 아빠가 거병을 좋아하니까 저도 그렇게 된 거예요.”
다른 이유도 있지만 굳이 따질 필요가 있을까.
“날 닮아서 그런 거였네.”
몸이 번쩍 들렸다. 가하란은 아빠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거실이 내려다보인다. 덩치 큰 툴도 시야 밑에 있었다.
“거병에 타면 이런 느낌이겠죠?”
“이런 거하곤 비교할 수 없지. 어지간한 건물보다 높게 올라가는 거니까. 우리 아들, 거병기사가 되고 싶어?”
“아니요. 전 거병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지 말고 기사를 꿈꿔봐. 아빠가 만든 거병을 네가 움직이는 거지. 어때?”
“생각해 볼게요.”
“그래. 생각해 봐. 넌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거병기사. 커다란 병기를 다루는 엘리트들. 아빠 말을 빌려서 표현해 보자면, ‘제국에서 가장 잘난 놈들’이었다.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성도에서 누가 오는 건데요?”
“스콜라 생도들이 온다고 하더라. 스콜라가 뭔지 알지?”
“싸움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요.”
“그래. 싸움을 엄청나게 잘하는 사람들이야. 그 안에서 거병기사가 나올지도 모르지.”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내렸다. 아빠의 바짝 선 코가 보였다.
“그러면 전 거병기사가 될 수 없겠네요.”
“왜?”
“싸움을 못하니까요.”
“그건 모르는 거야. 피는 못 속인다고 그랬지? 너도 아빠처럼 멋진 남자가 될 거야.”
“안소니 아저씨가 그러더라고요. 아빠는 자기 자랑을 너무 뻔뻔하게 해서 웃긴다고.”
“자신감 없는 것보단 나아.”
바닥으로 내려왔다. 아빠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췄다. 탁한 하늘색이 감도는 눈동자. 내 눈동자 색도 분명 똑같은 색이겠지?
가하란이 아빠의 눈을 빤히 쳐다볼 때였다. 아빠가 말했다.
“뭐든 자신감이 중요해. 그리고 자신감만큼이나 중요한 건….”
“꿈과 용기.”
“잘 아네.”
아빠가 겉옷을 챙기고 바구니에 든 물건 몇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게. 저녁에 생일 축하 노래는 불러야지.”
“내일 해도 돼요.”
“생일은 오늘이잖아. 넘길 순 없지. 다녀올게, 점심 잘 챙겨 먹고.”
“다녀오세요!”
가하란은 간단히 집 안 정리를 끝내고 생일 선물로 받은 조각상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테리와 제니에게 자랑할 것이다.
“밥 먹고 있어.”
툴에게 사료를 주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옆집에 사는 룽네가 가하란을 불렀다.
“가하란!”
“지금은 고양이 찾으러 가야 해요.”
“뭐 부탁하려는 거 아니야. 생일 축하한다고.”
룽네가 무언가를 던졌다. 받고 보니 종이에 싸인 사탕이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맛은 좋아.”
“잘 먹을게요, 아주머니.”
“이따가 저녁에 들러. 고기 삶아 놓은 거 있으니까. 생일상 한 귀퉁이는 내가 채워줄게.”
“꼭 갈게요.”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몇 번이나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며 생각했다. 아빠 말은 옳았다. 친절로 대하면 친절이 돌아올 거고, 사랑으로 대하면 사랑이 돌아올 거다.
“고마워요!”
고개를 내밀고 축하해주는 이웃들에게 손을 흔들고 고양이를 찾아 나섰다.
웰턴은 시장으로 갔을 테니 반대쪽을 찾아보면 되려나.
가구점이 늘어선 거리로 들어섰다. 깨끗한 도로와 군데군데 마법등이 박힌, 상류층이 주로 돌아다니는 곳이다.
‘거병관리국’이나 관리국 산하 제철소처럼 금지구역은 아니지만, 일반 시민이 고개 빳빳이 들고 돌아다니기에는 눈치 보이는 곳이었다.
건물 외벽에 붙어 고양이가 드나들 만한 곳을 찾아봤다. 저번에도 이 주변에서 고양이를 발견했다.
“할아버지, 눈에 퍼런 반점 있는 고양이 못 보셨어요?”
“웰턴네 그거? 또 가출했어?”
“그런가 봐요.”
“쯧쯧. 이번엔 여기 안 왔어.”
친분 있는 가게 할아버지에게 물어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가게를 나오기 전 할아버지가 생일 축하한다며 동전 하나를 던져주었다. 제국 은행에서 쓰이는 반쪽짜리 은화였다.
“너무 큰돈인데요.”
“반쪽짜리라 그렇게 큰돈 아니야. 사고 싶은 거 사.”
“비싼 선물 받으면 한 번은 거절하라고 배웠는데….”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가. 정 불편하면 나중에 우리 가게 앞마당이나 쓸어주든지.”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이걸로 아빠 작업복을 사면 되겠네. 가하란은 동전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가게 밖으로 나오는데, 반대편에서 기웃거리는 고양이가 보였다. 웰턴네 고양이였다.
부르면 도망칠까 조심해서 다가갔지만, 녀석은 금세 눈치채고 샛길로 뛰어들었다.
가하란은 있는 힘껏 달렸다. 여기서 놓친다면 점심시간에 늦을 것이다.
고양이가 시야에서 사라지려는 그때 마침 샛길에서 나오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반사적으로 “저기!” 하고 외쳤다. 여자아이가 그 목소리에 반응했다. 옆으로 도망치려는 고양이를 왼손으로 단숨에 낚아챘다.
그 동작은 정말 깔끔하고 재빨랐다. 도망치는 거 하나만큼은 둔에서 제일간다는 웰턴의 고양이가 반항조차 못 하고 잡혔으니까.
“이거, 네 거야?”
여자아이가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