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괴이의 주인 162
글레이의 쇠사슬 구가 전부 사라졌다. 그리고 검은 정장에 회색 머리인 모습으로 그가 다시 나타났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주인이 마나를 회복하는 것보다 제가 마나를 회복하는 것이 훨씬 빠를 텐데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괴이들의 감정에 예민한 만큼 마나에도 예민하다. 그런데 글레이는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느껴지는 마나가 똑같다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마나의 사용을 멈추니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어쩌겠어. 너를 죽일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 이래야지. 그래도 내 아이들이 갔으니 지구는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아이들이 전부 없어서 심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베타가 조그마한 모습으로 내 옆을 돌아다녔다
뭔가 귀여워서 베타를 쓰다듬어주며 품으로 안았다. 이제 좀 힐링 되는 것 같네
“저도 나름 비장의 수를 준비했지만... 최초의 드래곤. 가샤. 그 혼자만으로 모든 걸 부숴버릴 수 있겠죠.
그렇겠지. 녀석이 인간을 지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좀만 쉬고 얘기하자.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 너도 어차피 여기서는 못 벗어날 거 아니야.
내 말에 베타가 눈을 부라리며 글레이를 바라봤다. 글레이도 베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레비아탄의 힘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주인의 힘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겠죠. 왜 하필 마지막 주인이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설마. 지구에서 헌터 등급도 너도 알겠지. 기껏해야 난 B~A급 헌터일 걸.
하지만 글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괴이에게 주인이 강하다고 판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마나입니다. 어차피 주인을 죽이지도 못하는데 주인이 얼마나 강하고 말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긴. 주인이 갓 난 아이라도 죽이지 못하는 건 똑같을 테니. 글레이에게는 갓 난 아이가 가장 죽이기 어렵겠네
이거 조금 쉬었다고 머리가 진정되는 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니 진짜 한계까지 마나를 사용했나 보다
내 몸에서 흐르는 피도 점점 멈추는 것 같아서 최대한 소매로 피를 닦아냈다. 아마 난 지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실제로 피를 닦았지만, 피를 닦는 척하면서 글레이에게 내 마나를 날렸다
창의 형태로 만드는 것도 귀찮고 그럴 힘도 없는 와중에 그냥 쥐어 짜내서 내 마나를 날렸다
고작 그 마나를 만드는데도 다시 피가 새어났지만 무시했다
그런 느릿느릿한 공격을 글레이는 굳이 맞아줬고 몸이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내 마나로 너를 죽일 수 있는 거 맞냐?
어이가 없어서 글레이에게 물었고 글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괴이의 주인이 죽일 수 없는 괴이는 없습니다. 물론 쉽게 죽어줄 괴이도 없고요.
뭐... 그렇겠지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수많은 주인을 만났고 대부분 주인이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주인을 죽이기 위해 같은 인간이나 아니면 다른 괴이가 아닌 종족을 이용해 죽였습니다. 아.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제가 죽이기 전에 괴이의 주인은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뭐... 알아서 살다가 잘 죽었겠지.
솔직히 별 관심 없다. 그저 나도 쉬기 위해서 누워서 녀석의 말을 들어주고 있을 뿐
“자연사, 했습니다. 정말 평범하게도 말이죠. 신기하지 않습니까? 제가 주인을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직접 죽인 주인의 숫자만 해도 정확히 82명입니다. 대충 50~100년 사이로 괴이의 주인이 하나씩 나타났죠. 하지만 제가 죽이지 않은 괴이의 주인은 전부 자연사, 했습니다. 지나가다가 강도한테 죽을 수도 있고 병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 어떠한 주인도 자연적으로 죽는 것 외에는 죽지 않았습니다. 마치 세상이 주인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도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할 순 없으니 경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에서 모순을 느꼈다
“자연적으로 죽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늙어 죽는다는 건가
“말 그대로 자연사입니다. 주인은 운명을 믿습니까?
운명...
“네가 그런 것도 믿었어?
“아뇨 안 믿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었고 당신을 보니 믿을 수밖에 없더군요.
글레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자연사라고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시는 게 바로, 늙어 죽는 것이겠죠.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제가 말한 운명. 즉 주인은 명이 다해 죽는 것. 그것입니다. 그 주인은 명이 다하기 전까진 절대 죽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주인조차도 당해낼 수 없는 강력한 강도를 만났을 때도 왠지 모르겠지만 그 강도가 주인을 살렸고. 그 세계에서 불치병이라는 병에 주인이 걸려도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명이 다하지 않는 이상 절대 죽지 않습니다.
글레이는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괴이의 주인을 조사했겠지. 만약 한두 번이었다면 글레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라고 하지. 괴이의 주인은 글레이의 말대로 절대 평범하게 죽을 운명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의심했으면서 왜 나를 보고 확신했지?
수많은 주인을 조사했을 것이 뻔한데 왜 나를 보고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꿨을까
“그 어떠한 인간이 용의 호의를 받습니까? 어떠한 인간이 용 보다 마나가 많습니까? 지금껏 제가 본 괴이의 주인들도 다 평범했습니다. 그저 인간치고는 마나가 다른 인간보다 많았을 뿐이죠. 아니 사실 당신은 고작 용 보다 마나가 많다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주인 당신도 본인의 마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지금에서야 마나를 전부 써서 피가 흐르고 지쳐 누워있었지만 내 마나는 측정조차 불가능했다
아니 처음에는 마나 캡슐 안에 들어가서 내 마나를 측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마나가 폭증하더니 측정조차 안 됐다
마치 내 아이들처럼, 말이다
“맞습니다. 당신은 마치 괴이와 같아졌습니다. 그것도 마나로만 따지면 압도적인 괴이. 지금 주인은 제가 원하던 이상적인 주인이 되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지? 녀석은 주인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었나
나는 나도 모르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제가 주인들을 죽이는 이유. 뭔지 기억하십니까?
“기억할 수밖에. 주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뭣도 아닌 것들이 괴이들을 핍박하니 그런 것 아니었나?
녀석이 이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말의 뉘앙스는 이러했었다
“맞습니다.
글레이는 그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지
녀석이 주인을 죽이는 이유는 자신보다 약한 주인이...
“너... 설마.
“예.
글레이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더는 당신을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걸 오늘에서야 깨달았습니다.
...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직 충분히 쉬지 않아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걸 고려해서라도 녀석의 말은 이상했다
아니... 사실 중간부터 느꼈다. 녀석은 나를 공격할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녀석이 나를 죽이지 못하기에 굳이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내 아이들을 노리긴 했지만 죽이진 않았다. 버티겠다는 것으로 보였지만 녀석이 굳이 버틸 이유가 없었다
지금 내 마나를 맞아도 먼지로 변해 사라지긴 하지만 다시 나타나지 않는가. 저게 무슨 능력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녀석을 죽이기에는 부족한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속죄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전 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죽이기 위해 당신 같은 주인이 생긴 것이겠죠.
녀석은 그저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뭐가 어찌 됐든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인정 많고 뭐 한다, 하더라도. 녀석을 살려둘 순 없었다
...아니 솔직히 살려줄 순 있다
일행들이 반발하고 인간들이 반발하고 내 아이들이 반발해도. 결국엔 내 결정이다. 녀석을 죽일 수 있는 건 나뿐이고 내가 녀석을 살리게 되면 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정말 지구를 제외하고 모든 세계에서도 내가 가장 강한 존재가 되겠지
이제야 주인들이 타락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런 강력한 아이를 내 아래에 두고 부린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겠지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범죄를 저질러도 나를 막을 사람은 없겠지
그러면... 할 일은 하나뿐이다
지구는 순식간에 정리됐다. 뼈 드래곤 가샤는 물론이고 이고르와 오베른들을 비롯한 설시우의 아이들이 나선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구스타프는 발록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여 죽이고 시리는 발록의 몸 안으로 독을 주입해 기생충들을 죽였다
이고르는 최대한 여럿의 발록을 공격해 상처를 입혔고 샬롯과 엘리는 인간들을 지켰다
이리는 용들도 쉽게 보지 못할 강력한 괴수들을 물어 죽였다
오베른들은 설시우가 자신들을 베타의 몸속에서 내보낸 것에 화를 내며 폭주할 뻔했다
다행히 세계수가 제때 와서 오베른들을 말렸다. 그래도 그들은 분이 풀리지 않아 식물을 소환했고 그 식물은 다행히 지옥초가 아니었다
오베른들이 소환한 식물은 괴수들에게 기생했고 괴수들을 약하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발록의 몸에도 기생했고 발록들의 힘도 약해졌다
하지만 발록들이 달려들어 방벽이 무너진 곳이 많았고 이제는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강력한 헌터 약한 헌터 군인 할 거 없이 대부분이 죽었다
심지어는 방벽을 뚫고 방벽 안으로 들어간 괴수도 있었다
그 괴수들의 목적은 인간. 그렇다면 죽이기 쉬운 인간이 가장 편하겠지. 그리고 정신이 이상해진 일반인들은 한 곳에 몰아서 가뒀다
급히 헌터들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살아남은 헌터들과 군인들조차도 희망을 잃어버렸다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도 모자라 땅속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가족들은 생매장당했다. 급히 샬롯과 용들이 방벽을 뚫고 들어간 괴수를 향해 달려가 순살 시켰지만
이미 건물이 무너진 이후였다
저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일반인들이었다. 저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물론 가족이 생매장당했다는 걸 믿지 못하고 건물 파편을 치우며 땅을 파는 헌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이미 죽어 싸늘하게 식은 가족의 시체였다
설시우의 아이들이 활약해서 게이트도 더는 열리지 않았고 괴수들은 전부 정리됐다. 그리고 그 전쟁에 끝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도 지인도 친구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대부분이 죽었다
인간들은 물론이고 4 종족들도 치열한 싸움 끝에 몇 남지 않았다
그때 게이트가 다시 열리더니 그 안에서 설시우가 걸어 나왔다. 이시현과 설아는 다행히 무사했지만, 너무 힘을 많이 써서 혼절한 상태였고 이준석과 오민정도 마찬가지였다
용들도 어린 용들이 죽은 것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이고르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설시우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글레이는 어떻게 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