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53화. (완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머리에 안개가 끼기라도 한 듯 멍했다.
시야가 좁고, 자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검, 채찍같이 길고 휘어진 검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게 왜 내 손에 있지?’
절대 꺼내지 않을 물건이 손에 들려있었다.
분명 죽을 때까지 이걸 다신 들지 않겠다 맹세를 했었는데···.
···이루.
누굴 부르는 거지?
내 이름은 히로 무야시인데···.
“야, 김이루! 정신차려!”
다가온 누군가가 손에서 검을 빼앗아 땅에 던져버렸다.
“···너는 누구···.”
“나다. 하밀! ···하밀 로넌! 이 자식아, 정신 좀 차려봐! ···그러게! 너무 오래 잡고 있다고 말했잖아!”
“···하밀?”
까드득.
하밀의 입에서 뼈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평소 앙숙같던 두 사람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어떤 관계보다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단 두 사람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스륵-.
이루가 밀려오는 파도를 온 몸으로 막아선 모래성벽처럼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렸다.
이루가 유검柳劍이라 이름 붙인 검은 그 부드러운 이름과는 달리 사람의 정신을 잠식해 이성을 앗아가는 악마의 검.
“···거, 검. 검을···. 싸, 싸워야 해. 내 검···.”
“그만해. 이루야, 이제··· 이제, 그만 해도 돼. ···저 녀석이 왔어! 저 빌어먹을 지각생 녀석이 드디어 왔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 좀 쉬어.”
검을 놓자마자 급속도로 상태가 망가지는 이루를 보며 하밀은 끝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마 조금이라도 제정신인 상태라면 결코 자신의 품에 이런 식으로 안겨있지 않을 녀석···.
이루가 이 상태가 될 때까지 대체 자신은 뭘하고 있었는지, 괜스레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네 놈이 너무 늦었잖냐.”
뭘하다 온 건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 외눈박이 괴물의 발악과도 같은 괴성에서 모두 알아들었으니까.
아마도 지금 이 곳.
세상을 통째로 집어 삼킨듯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는 저 두 사람이 전투가 마지막일 거다.
이진이 저 외눈박이 괴물을 이기는 순간.
세상은 다시 평화로웠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가 할 일은 다 한 건가···.’
세상을 지킬 수 있도록 주어졌던 힘.
사실은 그 조차도 모두 이진의 힘을 나눠받은 거였다는 게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유리코프나 메를린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한 블랙.
어쩌면 영영 정신을 놓아버린 채 살아가게 될 이루까지.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처음 게이트가 열렸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서 지키고자 했던 것.
그게 지금 이 곳에서 벌어지는 저 두 사람의 승패로 결정된다.
“···저 괴물같은 자식.”
잠깐 사라졌다 돌아오더니 더 강해졌다.
자신들을 장난감 다루듯 가지고 놀던 괴물을 혼자 상대하고 있는 걸 넘어 오히려 그 압도하고 있었다.
애초에도 그저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대지를 뒤집는 게 가능하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그저 가만히 서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천지가 뒤집힐 정도의 힘이라니.
헛웃음이 날 정도로 기가 막힌다.
겨우 베이징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을 막아 늦추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던져야 했던 괴물을 저리 가볍게 상대하는 모습이.
“···이 자식아. ···얼른 좀 끝내라.”
쉬고 싶었다.
하밀은 그렇게 정신을 잃은 이루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여유가 넘쳐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것뿐.
서로의 힘을 가늠해 봤을 때는 호각인 상태, 누군가가 자칫 실수한다면 그것만으로 결과가 갈릴 정도의 차이였다.
“어차피 네가 살던 세상은 이미 사라졌다.”
“사라져?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가? 왕이 곧 세상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사라진 게 아니란 의미인가?”
“과거와 미래가 사라졌지만, 현재가 남아있으니 네가 가져간 것을 다시 빼앗아온다면···. 다시 존재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힘이란 게 그런 의미였나?
이렇게 몇 번 듣는다고 쉬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지만, 이자가 하고 싶은 말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나답지 않게 너무 방심했어.”
“네가 방심해서가 아냐. 내 친구들이 널 막아섰기 때문이지.”
“훗. 저 버러지들 말인가? 저런 것들이 아무···.”
쿠웅-.
“···말하는 도중에 공격하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
“그래? 난 어떤 개가 짖는 줄 알고.”
“친구라 이건가? 어쩌나, 그 중에 몇은 이미 목숨 줄이 끊어졌을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난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거다.
죽고 죽이는 행위 자체가 싫어 상대를 포기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뿐인데, 애초에 그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수천, 수만이 죽어나간 마당에 이제와 측은지심을 가지는 내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덕분에 마음의 정리가 됐다. 이제야 겨우 망설임이 사라진 느낌이거든.”
“그럴 필요없다. 결국 이기는 것은 내가 될 테니까.”
말투로 봤을 때 저건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다.
자신이 절대로 질리 없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일종의 신념에 가까운 말.
“미안하지만, 나 역시 같은 생각이라.”
어째서인지 이 자가 무슨 심정인지 이해가 된다.
마음 속 어딘가에 얹혀있던 작은 미안한과 망설임을 벗어던지자 비로소 느껴진다.
세상에 퍼져있는 마력의 농도가 훨씬 진해져 있다는 걸.
왜 인지는 안다.
내가 없는 사이 죽어버린 내 소중한 친구들의 마력이 그 안에서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으니까.
‘내가 곧 세상이라···.’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 안으로 농도 짙은 마력이 몰려든다.
“···무슨! 이, 이건 말도 안 된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나뿐인 눈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퍼져 있는 마력은 마치 수조에 떨어진 물감과 같다.
한 번 퍼진 이상, 그것을 다시 되돌리는 방법은 없다. 분명히 자신이 아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분명한데.
그런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그 말도 안되는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해낸 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눈에는 내가 마력을 모두 빨아들인 것처럼 보이나?”
“아니란 소리냐? 퍼져있던 마력이 모두 네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네가 그랬지 않나. 내가 곧 세상이라고···. 그럼 반대로 세상이 내가 되는 것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세상이 내가 된다고?’
자신은 신이었다.
처음 이 ‘섭리’라는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지긋지긋한 섭리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이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라 믿었다.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있어야만 세상이 있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눈 앞의 인간은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이자를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단순히 마력의 크고 작음의 차이가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압도되는 느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기지 못할 것이란 의심이 들었다.
신기한 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전혀 창피하거나 분하지가 않다는 것.
잔뜩 긴장되어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려버렸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무언가가 한 순간에 끊어진듯한 공허함.
하지만 싫지 않다.
“하하···.”
“왜 웃지?”
“모르겠군. 그저 갑자기 이 모든 게 덧없어진 느낌이랄까···. 훗- 그냥 갑자기 웃음이 난다.”
“···편해졌구나.”
이진의 말에 천천히 끄덕이는 고개.
하아···.
몸이 풀리는 듯한 신음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옅게 흐려져간다.
“···이렇게 끝날 줄은 몰랐는데. 이제 넌 어디로 가지?”
“글쎄. 하지만 사라진다는 기분은 들지 않아.”
“왕의 영혼은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군. 아마 이곳 어딘가에서 태어나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시간의 분기.
아마도 그건 하나의 세상에 왕의 영혼이 둘이 되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렇다면 아마도 지금 사라지고 있는 이 또 다른 왕은 이곳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겠지.
“···그런가?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그대와는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친구들의 원수였다.
절대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없는 사이임에는 분명한데.
너무나 미안하게도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이자를 미워할 수가 없다.
아마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지 않았을까?
“그대라···. 우리가 주고 받기엔 어색한 호칭이지만···.”
처음이자 마지막 한 번이라면 괜찮겠지.
“잘 가게. ···그대여.”
마지막 말을 들었을까?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지만, 어째선지 들었을 거란 확신이 든다.
살짝 웃었던 것 같고.
깊은 숨을 몰아쉬자 몸 속에 가득 담겨 있던 마력이 순식간에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감각이 든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손에 잡힐듯 느껴지는 기분은 참 묘하지만 이게 또 어색하지도 않다.
다른 세상에서 얻은 과거와 미래의 힘.
왕이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봉인한다는 그 힘을 얻은 지금의 나는 그야말로 신이 아니라 부정하기엔 너무 완벽한 존재.
아마 지금 이대로라면 나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겠지.
미래와 과거를 모두 꿰뚫어보는 존재가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다시 봉인해야만 한다.
누군가의 몸 속에.
* * *
가만히 두 사람을 내려다봤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유리코프의 시신.
그리고 마치 색을 지워버린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린 블랙을.
“···늦었잖아.”
겨우 의식을 차린 하밀이 처음 건넨 말.
알고 있다.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밀.”
“···왜.”
“솔직히 네가 라이프 베슬까지 깨버리면서 도울 줄은 몰랐는데.”
“···나도 이 녀석들 친구니까.”
“이루가 들으면 펄쩍 뛸 말이다. 그거?”
“그렇겠지··· 근데, 이 자식. 어쩌면 영영 못 돌아올지도 몰라. 뭐, 나도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긴 글렀지만.”
피식.
아, 하밀 녀석은 아직 시은이의 능력을 모르고 있지? 괜히 알렸다가 피곤해질까 싶었었는데···.
“그건 걱정마.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뭐?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깨진 라이프 베슬을 어떻게 고친다고···. 괜히 헛된 희망 주지 마라.”
뭐, 그거야 두고보면 알 일이고.
일단 하밀과 이루야 살아있으니 되었다.
문제는 이미 죽어버린 유리코프와 블랙인데···.
‘가능할까?’
해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니, 이전이라면 상상도 해보지 못했을 일이니까.
우선 다행인 점은 이런 짓을 한다고 내게 분노할 신은 없다는 것.
그리고 봉인해야 할 힘은 두 개, 생명의 기운이 필요한 이도 둘이라는 점.
“하밀. 지금부터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기억에서 지워라.”
“···뭐? 잠깐, 너 지금 시신에 무슨 짓을 하려···.”
몸 속에 있던, 이질적이지만 낯설지 않은 다른 세상에서 얻은 힘은 처음 얻은 것임에도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다.
내 의지에 따라 따로 떨어져 나온 두 가지의 힘을 단단하게 봉인했다.
“무, 무슨 이런···.”
세상을 정의하고, 구성하는 한 축.
과거와 미래의 힘은 일개 인간이 느끼기엔 너무나 거대했다.
태양을 눈 앞에서 마주한 듯한 느낌에 하밀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이진을 멍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 힘을 다루는 이진의 모습에서 하밀은 말로 형용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감을 느껴야 했다.
* * *
“자, 다들 준비됐지?”
“···됐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네가 자세히 설명을 해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유리코프가 코밑을 쓱 훔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처음 정신을 차린 뒤에는 당황스러웠는지 한참을 오락가락 하더니,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무슨 설명을 더 해줘. 내가 이제 치유 능력을 쓸 수 있어서 너희 고친 거라고 했잖아.”
“···분명히 죽는다는 느낌이 들었단 말이다.”
“···나도. 심지어 난 유리코프, 네가 죽는 걸 분명히 내 눈으로 똑똑히 봤고.”
블랙이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하밀만 조용히하면 되는 일이니까. 저 녀석은 그런 말을 할 녀석이 아니고.
“나참, 죽은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너희 설마 내가 죽은 사람도 살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럼 됐지. 자자, 이동할 준비나 하자고. 유리코프가 하밀이랑 이루 좀 챙기고.”
“···너 근데, 정말 공간 이동도 할 수 있는 거 맞아?”
마력의 본질 자체를 느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상의 모든 마력을 한 번 품어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계가 사라진 느낌이다.
“그래! 몇 번을 말해.”
“그런데 거기에다 치유도 할 수 있고?”
“그래!”
“부활도 시킬 수 있고?”
“그···! 건, 아니지.”
여전히 의심을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두 녀석을 데리고, 나는 공간 이동을 준비했다.
라미야에게 공간을 접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이제는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익숙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느껴진다.
후욱-.
몸이 살짝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풍경이 변했다.
<귀환자 식당>이라 적힌 간판이 걸린 작은 가게의 안.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시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시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삼촌? 삼초온-!”
“삼촌? ···아! 삼촌···!”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날 향해 달려오는 두 사람.
나는 격하게 안겨오는 두 사람을 양팔 가득 안았다.
따듯함이 전해지는 온기.
또 다시 돌아와 가족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어쩐지 쑥쓰러워서 한 번도 해주지 못했던 말을 두 사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시연아, 시은아. ···사랑한다.”
작은 흐느낌과 함께, 두 사람의 팔이 날 더욱 강하게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