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52화.
12살에 겪었던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그 직후 이어진 기이한 힘의 각성.
30년의 잃어버린 시간을 제외하더라도 나는 무려 40년을 넘는 세월 동안 몬스터들을 도륙하는데 내 인생을 바쳤다.
너희들도 피해자라고? 그래서 그게 어쨌단 거냐.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후회의 감정은 없다.
어차피 한 쪽이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라면 그게 자신이 되고 싶은 생물은 없을 테니까.
미물이라 말하는 지렁이 조차도 자신의 몸을 말리는 태양빛 아래 노출되면 살고자 발버둥치는 게 본능인데.
이제와 몬스터의 새끼 하나 쯤 더한다고 해서 거리낄 것은 없다.
‘···빌어먹을.’
그런데 왜 내 주먹은 저 쉴드를 부수지 못한 거지?
혹시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나?
아니, 처음에는 개방시킨 내 모든 마력을 분명히 이 주먹에 실었다.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에 힘을 거둔 거지.
끄으으···.
쉴드의 안쪽에서 신음성을 흘리는 사이클롭스 셋의 눈동자가 떨리는 게 보였다.
처음의 자신만만하던 표정과는 달리, 지금은 두려움으로 가득찬 상태로.
“지금 이 공격으로 느꼈겠지. 너희 힘으로는 날 막지 못한다는 걸. 전력으로 내려친 것도 아니니 다음에는 분명 버터지 못한다.”
벌써 몇번이고 이같은 일을 반복해왔다니 본능적으로 느꼈겠지.
그러니 지금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거고.
“···우리는 버티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래. 그렇겠지.”
어차피 패배하면 모든 게 끝난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키는 일에 실패하면 그들이 살아가는 이 모든 세상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걸 아는데, 포기할 수 있을리가 없지.
그래서 저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 역시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이니까.
저들의 눈에는 지금 내 모습이 마치 악마로 보이겠지. 필시 그럴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기꺼이 악마가 되어주마.”
충동적이기만 했던 아까완 다르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마력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이번엔 주먹이 아닌, 내 의지에 마력을 실었다.
애초부터 난 유리코프같은 무투파도 아닌데, 굳이 주먹을 들고 달려들 필요는 없지.
쉴드에 손바닥을 올리자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단단하면서도 긴장감이 동시에 전해졌다.
그저 인간의 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몬스터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이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다.”
스스스스···.
쉴드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져 간다.
쉴드를 유지하던 마력의 원천이던 이들도, 그들이 밟고 서 있던 대지도, 심지어는 대기마저도.
“···고통은 없었을 거다.”
잔존 마력인지, 아니면 세 사이클롭스의 마지막 남은 염원이었는지.
쉴드는 그보다 조금 더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이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무언가를 되찾은 느낌.
그게 내 안을 충만감으로 가득 채워가는 느낌은 약간의 죄책감을 다독이는 듯이 그렇게 들어왔다.
포근한 느낌에 스르륵 감기는 눈.
분명 내것이 아니었을 게 분명한데도, 위화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힘을 받아들이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동시에 느껴지는 익숙한 두 개의 기운.
이전에는 의식적으로 두 사람의 기운을 느끼려고 해야만 잡히던 것들이 지금은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명확하게.
* * *
“멜-!”
블랙의 처절한 외침.
이미 피곤에 찌들대로 찌든 목소리에서는 피가 섞여나오는지, 탁한 음성이 뱉어졌다.
“···나 아직 안 죽어. 그런 눈 하지마.”
“하지만 멜, 너 다리가···. 다리가!”
메를린은 블랙의 말에 한쪽 눈만 간신히 뜬 채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아래쪽을 쳐다봤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리’라고 불렸을 듯한 자신의 신체 부위는 이제 뼈와 고기의 조합이 되버린 듯한 모양새로 변해 있었다.
“···헤헤, 어쩐지 아까부터 밑에 감각이 없더니. ···아무리 너라도 이건 어렵겠지?”
“바보야. 그러니까 왜 거기서 버텨, 버티길···. 이루 놈을 지킨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지금 우리 중에서 그나마 이루의 공격이 그나마 먹히잖아.”
“그래봐야 겨우 생채기나 내는 수준인데, 무슨!”
폭풍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 같던 기세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게다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인 이루는 이제 적아의 구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전투의 탄성이 남아있어서 거인을 공격하는 중이지만, 저 마저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상태.
“그보다 유리는··· 어때?”
메를린의 질문에 블랙은 눈을 감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블랙을 탓할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미 생명력까지 쥐어짜내며 수백 번의 치유를 해온 블랙에게 그 누가 감히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성격이 그렇게 급하더니, 결국 먼저 갔나보네.”
슬픔이 가득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후련함까지 느껴지는 메를린의 표정을 보며 블랙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지금 메를린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블랙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비록 마력은 한 줌도 채 남지 않았지만, 평생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며 살아온 이에게 남은 본능.
그 본능이 지금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죽어가고 있다고.
“이럴 수는··· 이럴 순 없어!”
“···받아들이자. 저건 우리 힘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진이 있었다면 달랐겠지? ···헤헤.”
“···난, 너 이대로 못 보내.”
“그만해도 돼. 넌 이미 할 만큼 했어.”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한 분노, 그게 블랙의 몸 안에서 폭발하기 직전까지 과열된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눈동자의 핏줄이 터져나가며 눈가에 핏줄기가 흐르는 걸 보면서, 메를린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마. 바보야, 하지 말라고.”
작고 왜소한 체격에 어렸을 때 앓았던 기이한 병으로 인해 얼굴까지 흉측하게 변해버린 외모.
자연히 사람을 기피하게 됐고, 늘 혼자인 게 당연했던 삶이었다.
치유라는 귀한 능력을 얻게 된 이후로 그나마 사람들이 다가오긴 했지만 지독히 우울한 분위기를 온 몸으로 발산하는 덕에 혼자인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처음으로 진심으로 다가와줬던 단 한 사람.
‘마지막···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힘을···. 신이 있다면, 제발-!’
손에 감각이 사라지도록 힘을 쥐어짰다.
자신의 힘은 신체의 근력과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하면 조금은 더 짜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부들거리는 앙상한 주먹에서 작은 빛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너 죽어, 바보야!”
핏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로, 블랙은 메를린의 눈빛을 빤히 쳐다봤다.
“나도 알아··· 바보야.”
블랙은 시야가 흐려지는 마지막 순간에 깨달았다.
자신에게 치유 말고도 한 가지의 능력이 또 있었다는 걸.
아마도 단 한 차례밖에 사용하지 못할.
이런 순간에, 메를린이 아니었다면 아마 모르고 죽게 되었을 능력.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자기 희생.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하는, 한 사람의 완전한 치유.
블랙의 손에 맺힌 작은 빛이 메를린의 심장으로 스며들며 성스러운 빛을 온 사방에 찬란하게 뿌렸다.
보는 이들이 절로 겸허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따듯한 빛.
그렇게 찬란하던 빛 무리가 사라지고, 그 안에서 깨끗한 갑옷을 입고선 그 무엇보다 당당하게 서 있는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멜?”
기진맥진한 상태의 하밀이 황망한 눈으로 메를린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던 상태였던 그녀가 저렇게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멀쩡해진 이유가 블랙 이외엔 없었으니까.
‘전투 초반의 마력 짱짱하던 블랙이면 모를까, 이미 본인 생명력까지 쥐어짜낸 마당에 저런 완벽한 치유가 가능할리가···.’
그리곤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하얗게 변해 쓰러져있는 블랙의 모습을 눈에 담고, 한 순간 이해했다.
방법이야 모르겠지만, 블랙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걸.
“···잘 가게. 친구여.”
하밀은 쓰게 웃으며 곧 따라가겠다는 말은 삼켰다.
괜한 말로 지금 자신의 이 굳은 의지가 약해지기라도 할까 저어되어서.
흐아아아악!
메를린의 우렁찬 기합과 함께 폭발할 듯 느껴지는 강대한 마력.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구나. 분명 다 죽어가다가 어떻게 멀쩡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과연 뭐가 달라질까?”
“적어도 네 년한테 주먹 한 대는 더 날릴 수 있겠지!”
“네 주먹이 내게 닿은 경우는···.”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조롱섞인 말을 하다말곤 갑자기 멈칫하는 외눈의 괴물.
그리고는 얼굴이 악귀의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이상, 너희들이라도 길동무로 삼아야겠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콰앙!
메를린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에 서둘러 방패를 들어올렸지만 충격을 모두 상쇄하진 못했다.
지금 이들이 싸우고 있는 곳은 북한의 한 외딴 지역.
필사적으로 이동을 막아섰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여기까지 버틴 것만해도 기적에 가까운 성과라고 스스로 칭찬하고 싶을 정도.
한데, 방금 그 일격으로 메를린은 깨달았다.
저 괴물이 지금까지 보여준 힘은 그야말로 반쯤은 장난에 가까웠다는 걸.
왜냐하면 몇 차례의 공격을 막아냈던 자신이 단 한 번의 일격으로 허리가 부러져 버렸으니까.
왜 갑자기 저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진?’
메를린은 어쩐지 그 녀석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아마 이제 곧 돌아올 거라는 느낌도.
‘···난 아마 그걸 못 보겠지.’
부러진 허리에서 격통이 느껴지는 건 신경쓰지 않지만, 지금 악귀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괴물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쯤은 직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후웅-.
그 순간, 메를린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뭐지? 공간 이동?’
라미야는 이곳에 없다.
하지만 라미야에게는 앞으로 이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여기 있는 모두가 패배한다면 이제 믿을 사람은 라미야 뿐.
이진이 올 때까지 그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라미야는 힘을 아껴야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도망다닐 수 있을지가 라미야의 마력에 달려있으니까.
‘안 돼! 이런 일에 힘을 쓰지마! 나도 죽긴 싫지만, 이런 일에 힘을 낭비하면 그 두 사람을 지키지 못하게 돼. 그럼 이 세상은 완전히 끝장이라고!’
들리지는 않겠지만, 이동을 거부하면 알아채겠지.
비록 몸이 이렇긴 하지만, 그 정도 거부할 마력은 남아있다.
똑똑한 라미야라면 분명 알아듣겠지.
후웅-.
그런데도 또 다시 시도되는 공간이동.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정하지?’
마력의 수준이 너무 낮은데다 불안정하다.
라미야가 초대형 여객기의 일등석같은 안정감이라면, 이건 마치 고무줄의 탄력을 이용해 날리는 장난감 비행기의 조종석같은 느낌이랄까.
‘···라미야가 아니야?’
찰나의 순간.
메를린은 온몸의 긴장을 그대로 풀어버렸다.
그리고 외눈박이 여성형 괴물의 주먹이 눈 앞으로 다가온 순간, 그녀가 밝은 빛에 휩싸였다.
“메를린!”
라미야의 옆에는 예전에 스치듯 본 적이 있는 진의 조카.
시야가 변했다고 느낀 순간, 메를린은 자신이 어디에 왔는지 바로 깨달았다.
“···설마, 라미야?”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너희들이 거부했을 거잖아. 괜한 마력 낭비할 생각은 없어. ···미안하긴 하지만 지금은 너희를 구하는 것보다 이 아이들을 지키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거든.”
너무나도 옳은 결정이다.
허리만 멀쩡했다면 일어나서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그럼 대체 누가···.”
“크흠. 저, 접니다.”
“이 녀석도 나랑 같은 능력자야. 뭐, 그래봐야 최대치가 여기서 평양 수준, 그것도 한 사람씩이지만.”
“그 짧은 사이에 용케 이런 능력자를 찾아냈네?”
“나 아냐. 이진이 벌써 몇 달전에 데려다 앉힌 녀석이지. 설마 이런 순간을 예상해서는 아니었겠지? 그럼 진짜 소름돋는데.”
푸흡.
블랙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유리코프는 전투중에 이미 사망.
이루는 이제 검을 버리더라도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
하밀 역시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난 상태.
그야말로 처참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원래의 메를린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 웃을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웃는 다는 것 자체가 진중한 성격의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크큭··· 크흐흐흣. 아하하하!”
“···메, 메를린. 너, 괜찮아?”
라미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메를린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띈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 봤거든.”
“···보다니? 뭘?”
“여기로 불려오기 직전에···. 하늘을 가르면서 떨어져 내리던 빛 줄기말야.”
그 말에 시은이와 도진이가 동시에 서로를 돌아봤다.
자신들이 위험하던 순간, 하늘을 가르며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던 장면은 두 사람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