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50화.
이루의 생각을 들은 라미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은이의 능력이 특별하다는 건 알겠어. 과거를 바꾸는 힘이라고 했나?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저 녀석이 하는 말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과거의 무언가를 되돌리는 힘이라는 거겠지?”
“그래. 그러니까 어쩌면 저 녀석이 이곳에 오기 전 상태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절대 불가능해.”
라미야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설명을 요구하는 이루의 표정을 보면서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멍청아. 내 공간 이동 마법도 대상자가 거부하면 힘들어져. 당연히 마력이 높은 사람일 수록 더 힘들어지지. 하물며 시은이는 자기 능력이 어떤 건지도 잘 모르는 상태인데, 저런 괴물한테 그런 능력을 쓴다고? 거기다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히 알면서도 저 놈이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음···.”
작게 침음성을 삼킨 이루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마력의 차이.
그걸 생각 하지 못하다니.
“···그럼 남은 건 결사항전 뿐인가?”
“차라리 그 두 사람을 내주는 건 어때?”
하밀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시연과 시은 자매와 연을 맺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특히나 도진의 눈 빛은 그야말로 야수의 그것과 닮아있을 정도로 사납게 변했다.
“왜 그렇게 보지? 어차피 이대로라면 가장 위험한 건 그 두 사람이야.”
“그걸 막는 게 우리가 해야할 일 아닙니까?”
“착각이 심하군. 이진의 조카라고 해서 내가 목숨 바쳐 구해야할 의무는 없지.”
“하밀!”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아니, 이번엔 네가 틀렸다. 전에 이진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봐. 결국 저 녀석이 온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없애기 위해서라는 뜻이야. 아마도 그 두 사람이 바로 그 열쇠겠지. 네가 그 정도의 유추도 못할 정도는 아닐텐데?”
이진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눈을 가렸다.
이번만큼은 하밀 역시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우겼다간 정말 자기 자신이 더 초라해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작전은 있고?”
“일단 라미야는 지금 즉시 한국으로 가. 그 두 사람을 지켜줘. 어쩌면 이 싸움은 어느 진영에서 오래 버티느냐가 될지도 모르니까.”
“···왜 나야?”
라미야는 반사적으로 물으면서도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혼자.
라미야가 작정하고 도망다닌다면 시간을 오래 끌 수 있는 것은 분명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도망다니는 것보단, 자신도 이곳에서 동료들과 함께 싸우고 싶었으니까.
“이진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도망만 다닌다고 해결이 될까? 난 솔직히 이진이 저 녀석보다 강하다는 생각은 안 들거든.”
하밀의 말에 몇 사람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분명 희망을 갖자며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를 깨는 발언이긴 하지만, 그 말을 반박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력이란 정확한 숫자로 나타내진 못하지만, 오히려 육감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더 정밀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거인의 마력은 분명히 말해서 이진보다 몇 수는 위였다.
“사장님이 오시면 분명 어떻게든 해주실 겁니다.”
그나마 이 중에서 가장 믿음이 굳건한 사람을 하나 고르라면 서도진.
그는 끝까지 믿었다.
이진이라면 분명 어떻게든 해줄거라고.
* * *
[그래. 결국 이런 선택을 할 줄 알고 있었다. 인간은 늘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지. 오만한 족속들.]
“마치 전에도 인간을 본 적이 있다는 듯한 말투네?”
거대한 거체 앞에 나란히 선 5인.
라미야와 블랙이 빠지고, 도진이 포함된 파티였다.
이진이 없는 지구상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강의 파티다.
라미야는 곧장 한국으로 갔고, 전투력이 있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후방에서 지원하는 것이 최선인 블랙이 빠진 상황.
서도진은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부족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려 끝내 남을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살던 곳에도 인간은 있으니까.]
“···그곳에도 인간이 있다고?”
[그래. 죽여도 죽여도 끝도 없이 어딘가에서 기어 나오는 것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는 것이 바로 인간이지.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죽지 못해 살아가면서도 왜 그리 아둥거리면서 목숨을 연명하려고 하는지.]
커다란 눈동자에서는 분명 경멸의 빛이 보였다.
정말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
“대체··· 너는 어떤 세상에서 온 거냐.”
[이곳과 다르지 않은 곳이다. 다만, 우리 종족은 인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훨씬 이전부터 세상을 지배하던 종족이었을 뿐이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방법도 있지 않았나?”
[우스운 말이군. 너희들은 바퀴벌레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마 자신들은 특별하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결국 너희 인간들보다 더 상위의 포식자의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인간은 지적 생명체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들과는 전혀···!”
쯧쯧-.
혀를 차는 소리만으로도 천지가 진동할 듯 떨린다.
지금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 거인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신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후웅-.
구름 위로 솟아오를 것 같던 머리가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이내 고개를 들면 얼굴이 보일 정도까지 작아졌다.
“어, 어떻게···.”
“간단해. 마력의 압축을 이용한 신체 크기 변환이지.”
많지는 않지만 각성자들 중에서도 거인화 능력을 가진 이들이 간혹 있다.
신체 변형 계열에서도 거인화, 야수화 등의 능력으로 나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4~5미터 수준이지···.’
백 미터를 훌쩍 넘는 크기로의 변환이라니,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걸 이 녀석은 너무 손쉽게 해냈다.
마치 숨을 쉬기라도 하듯이.
“너, 너··· 여자였나?”
“아··· 인간형은 오랜만이라 잠시 헷갈렸네. 그래, 너희들의 기준으로 하면 난 여자로 구분되지.”
‘거인은 성별의 구분이 없는 건가?’
이루의 눈빛에서 의아함을 읽은 건지.
“우리도 성별은 있지만, 그걸 외형으로 판단하진 않거든. 성기의 모양새에 따라 구분하는 건 너무 일차원적이지 않나?”
“···그건 또 무슨 개 소리야.”
“아, 내가 또 잠시 잊고 있었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부정해버리는 게 바로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단 걸.”
어쩌다 보니 질의응답 시간이 되어버렸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이쪽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하는 입장인데, 상대가 알아서 저렇게 느긋하게 굴어주면야.
“···이 전쟁에서 만약 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텐데? 차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생명 에너지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나? 처음에는 인간의 수명도 지금보다 훨씬 더 길었다는 걸. 그래. 당시에는 몇 없던 인간이 세계의 지배자였던 차원도 꽤 많았지.”
“지금은 다른가?”
“결국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본인들이 가진 멍청할 정도의 욕구들 때문이다. 본능조차 주체하지 못해 자손을 늘리고, 몸이 게을러 질 정도로 불어난 체중 덕에 지배자였던 인간은 점차 힘을 잃고 피지배자가 되어 버렸지. 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인간이란 생물이 얼마나 멍청한지 깨달았다.”
“자손을 늘리는 게 관련이 있단 말인가?”
많이 줄어든 몸체지만, 아직도 일반인에 비하면 커다란 덩치를 가진 외눈박이 괴물은 하나뿐인 눈동자를 굴리며 씨익 웃었다.
“에너지는 같은 파장을 가진 생명체와 자연스레 나누어 가지게 된다. 그것을 통제 가능한 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모든 생명체가 그 혜택을 균등하게 받게 되지.”
“···수가 많아질 수록, 힘이 약해진단 소리인가?”
“그래. 그리고 그것은 차원의 경계마저 넘나든다. 결국 차원계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생명체가 나눠받는 에너지는 점차 약해지는 셈이지. 그렇다고 시간의 분기점마다 나뉘는 차원계를 막을 방법도 존재하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때가 될 때마다 차원을 줄이는 거다.”
이루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주변을 돌아봤지만, 다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넌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지 물어도 되나?”
“그야, 나는 이미 몇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었다고?”
“그래. 우승자의 특권이랄까? 사실 너희들의 차원은 적어도 수천 년은 더 지나야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내가 그걸 좀 앞당겼다.”
“···어째서?”
몬스터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간 이유.
그 모든 게 바로 이 어처구니 없는 차원간의 전쟁때문이라는 소릴 방금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전쟁에 끌어들인 게 본인이라니, 묻지 않을 수가 있나.
“그냥. 너무 평화로워서 꼴보기 싫었거든.”
그리고 그 이상으로 더 어이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
이루의 머리가 순간적으로 핑 돌았다.
머리로 피가 쏠려서 그런지, 시야가 좁아지고 눈 앞에 환해지면서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는 그런 기분.
“이제 시간은 끌만큼 끈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그 두 사람을 데려올 생각은 없는 것 같고, 결국 내가 가야하겠지? 대답도 이정도 해줬으면 죽기엔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해준 것 같고.”
“···보내줄 것 같으냐?”
처음부터 보내줄 생각따윈 눈꼽만큼도 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났더니 더 보내주고 싶지가 않아졌다.
고작 이런 놈에게 겁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를 지우고 싶어졌다.
“훗-. 내게 네 놈의 허락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나?”
“···웃지마, 개 자식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루의 검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둘러졌다.
다른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역시나, 너도 그 놈에게 중요한 인간이었던 거야. 뭐, 이 정도면 인간치곤 제법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느리잖아.”
비웃음과 연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외눈.
그건 명백히 이루를 보며 조롱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티잉-.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있던 이루의 검날이 수수깡처럼 부러진 뒤, 두 손가락만을 이용해 날린 부러진 검신이 이루의 어깨에 박혀들었다.
콰과과과과-···.
이미 폐허가 된 자금성의 돌바닥을 다시 한 번 헤집으며 수십 미터를 밀려난 이루가 떨리는 손으로 어깨에 박혔던 검신을 뽑아들었다.
검신이 박혀있던 자리는 검게 그을린 채로 붉은 빛의 수증기를 내뿜었다.
‘설마 공기와의 마찰 때문에 검신이 달아오른 건가?’
그 짧은 거리에서 겨우 두 손가락을 이용해 튕겼을 뿐인데, 검신이 달아올를 정도의 속도가 나올 수 있나?
스피드만으로는 최강이라 자부했건만, 저 녀석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이 이루의 가슴 속에서 스멀거리는 순간.
이루의 옆으로 무언가가 또 땅을 헤집으며 날아들었다.
쿠어억-.
복부를 얻어맞았는지, 움푹 패인 복부를 부여잡은 채 피 한줌을 토해내는 도진이.
“이, 이 멍청아! 그렇게 무턱대고 달려들면···!”
“그럼···. 스, 스승님이 옆에서 맞고 있는데, 구경만 하는 제자도 있답니까?”
힘없이 웃으며 말하는 도진을 보는 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딱-.
그렇지 않아도 아픈 녀석을 한 대 더 때리는 게 조금 마음이 쓰리긴 하지만.
“···맞고 있긴 누가 맞고 있어. 자식아! 잠깐 실력 좀 가늠해 본 거다.”
“헤헤-. 검, 부러지셨는데요?”
입에선 피를 질질 흘리며 반쯤 정신이 나간 눈동자로 말하는 도진이를 내려본 이루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잘 봐둬. 진짜는 이제부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