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49화.
처음의 그 공포스러웠던 등장과는 달리, 거인은 한참을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루와 유리코프, 메를린을 필두로 구성된 세 팀은 근처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뿐,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이루의 팀에는 서도진, 유리코프의 팀엔 덕윤이까지 포함되어 사실상 아카데미는 현재 잠정적으로 운영이 중단된 상태.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듯한 그 적막함 속에서 대치는 계속 이어졌고, 온라인에선 24시간 실시간 중계를 하는 정신나간 이들까지 나타났다.
거기에 가끔은 웃고, 가끔은 누워 잠까지 자는 듯한 움직임에 사람들이 점차 거인의 공포에 대해 잊어갈 즈음.
크하하하하-!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시킨다는 웃음이 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한껏 허리를 젖히고 신나게 웃어보인 거인이 다시 허리를 폈다.
[···찾았다.]
괴이할 정도로 끔찍한 미소를 지은 거인은 그렇게 말한 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찾았다니? 대체 뭘 찾았다는 거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에게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쿵쿵-.
그저 걸었다.
뭔가를 부수려고 하는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몸을 이동시킬 목적으로 내딛는 걸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 발 아래 뭉개졌다.
진즉에 대피를 시키긴 했지만, 특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거인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게 문제가 됐다.
국가 기능을 절반 이상은 상실했다는 중국에서는 그런 그들을 통제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고, 결국 이 사단이 난 셈이다.
“민간인 구출은 중국에서 알아서 하게 둬. 지금은 거인을 막는 게 우선이다!”
작전은 비교적 간단했다.
방어력이 가장 뛰어난 메를린이 전방에서 전진을 막아서고, 이루와 유리코프가 번갈아가며 뒤쪽에서 시선을 교란시킨다.
목적은 단 하나, 거인의 이동을 저지하는 것.
라미야의 능력으로 빠른 이동을 하는 것이나 위험한 순간이라 판단되면 하밀이 나서기로 한 것 역시 작전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블랙은 최후방에서 부상자의 치료를 맡았다.
이진이 와서 상황에 대해 뭔가 설명해주길 간절히 바랬건만, 결국 그 전에 움직여버린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결의를 다졌다.
“···가자.”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작전의 핵심인 메를린 팀.
커다란 방패를 집어든 그녀가 가만히 눈을 감고서 호흡을 다듬었다.
셀 수없이 많은 게이트를 공략해왔지만 지금 눈 앞에 다가오는 정도의 괴물은 처음이었다.
오래전, 아마 자신은 제대로 맞붙어보지도 못했던 최후의 게이트의 마왕이 저 정도였을까?
‘···그보다 강해.’
마주 선 것만으로 전신에서 수천 개의 바늘이 온 몸을 찔러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루와 유리코프가 라미야의 능력을 이용해 자리를 잡은 뒤, 메를린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걱정마, 우린 결국 해낼 수 있을테니까.”
말 수가 적은 블랙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메를린은 자신의 어깨를 덮은 손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앞으로 뛰쳐나갔다.
으야아아아아-!
여린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악에 바친 듯한 기합 소리.
그런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가린 방패는 최우혁이 오늘을 위해 불과 얼마전까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회심의 역작.
최상급 마석 수백 개가 투입되어 설령 핵폭탄을 직격으로 받는 충격에서도 그녀의 몸엔 기스 하나 나지 않을 정도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일생의 역작인 방패가.
콰아앙-!
발길질?
···아니면 그저 걷는 행위의 연장선?
가볍게 휘두른 거인의 발끝과 부딪히는 순간, 그대로 두 동강이 나버렸다.
손가락으로 튕겨낸 성냥이라도 되는 듯 하늘을 날아오르는 메를린의 모습을 보는 이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실감이 사라져버린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 된 듯한 순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라미야였다.
“메를리이인!”
작은 바람개비처럼 휘돌며 하늘을 날아오르던 메를린의 몸이 작은 빛과 사라진 순간.
거인은 작게 미소지었다.
[호오-. 살아남았어. 너희들, 꽤 하잖아?]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웃음과 말투.
“이 괴물이-!”
아무리 헤어졌다곤 하지만, 한 때나마 메를린의 연인이었던 이루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거인의 발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머, 멈춰, 이 멍청아-!”
유리코프가 외쳤지만 이루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를 서도진이 따랐다.
“저런··· 멍청이들이···.”
이루의 일본도가 휘둘러지고, 도진의 손에 들린 대검이 묵직하게 그 뒤를 따랐지만, 거인은 그저 가만히 그들을 내려다봤다.
[···따끔한데?]
‘···가진 마력의 절반 이상을 쏟아부은 일격을 맞았는데, 고작 따끔하다고?’
[너, 그 녀석에게 꽤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구나.]
이루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말에서 거인이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알아챘다.
그리고, 이 거인이 이진을 알고 있다는 사실도.
“이, 이진을 알고 있는 거냐?”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는 사이지. 만난 적이 있냐고 한다면 그렇다.]
“지금···. 어디 있지?”
[글쎄? 어디인지야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겠지.]
비슷한 상황이라는 말.
역시나 자신들이 했던 예상과 비슷했다.
“···네가 그 ‘왕’들 중 하나인 거냐?”
[호오-. 우리들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 정말 중요한 사람인가보군.]
“목적이 뭐냐. 이 세계의 말살인 거냐?”
이루의 물음에 거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그 물음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 역시 한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 뭐하러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내가 원하는 것은 단 두 개. 그것만 손에 넣으면 그만이다.]
원하는 것이 단 두 개라는 말에 이루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누구나 할 것없이 이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어찌 되는 거지?”
[돌아가야지. 목적을 달성하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나도 이렇게 마력이 희박한 곳에 오래 있고싶지는 않거든.]
이루는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 존재는 자신들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가 처음부터 없었던 거겠지.
거짓이라는 건 속여야 할 이유가 있을 때나 필요한 것.
이 거인은 인간을 자신보다 훨씬 더 하등한 존재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두 가지만 얻으면 떠난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마 그 동안 특정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원하던 것을 찾았던 것 뿐인 셈.
이 거인은 애초에 자신들의 존재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거다.
아니면 그저 신경을 쓸 필요조차 없었던 거겠지.
‘그게 뭐든 내어주는 게 맞나···.’
막을 수 없다.
처음부터 작전따위도 필요없었던 상대.
무슨 짓을 해도 막아낼 수 없는 존재.
“···원하는 게 뭐지?”
[호오-. 그걸 내게 내어줄 셈인가?]
거대한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빛을 내보였다.
“정말 그것만 가지고 돌아갈 거라면··· 그래. 우리가 직접 가져다주겠다.”
“스, 스승님!”
가장 근처에 있던 서도진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이루를 불렀지만, 이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도 알고 있는 거다.
이 결정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것이고, 죽을 때까지 많은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일인지.
하지만 저 거인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죽어나간다.
‘방향으로 봐선 동쪽···. 저건 분명 한국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저 거인이 원하는 것이라는 그 ‘두 개’가 한국에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국이 전쟁터가 되는 것을 두고볼 수는 없는 일.
만약 가능하다면 여기서 막아야 한다.
[직접 내어준다니,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하지만 너희가 직접 그것들을 가져온다면 거절하진 않으마.]
“···뭔지나 말해봐라.”
이미 결정은 내렸다.
이 거인이 원하는 게 뭐든, 그저 내어주면 그만.
설령 그게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어차피 우리가 막아낼 수 없는 존재다. 수천, 수만이 죽고나서 빼앗기느니···.’
차라리 먼저 내어주는 것으로 희생을 막을 수 있다면 그리할 거다.
그게 모두를 위해 옳은 결정이고, 바른 결정이다.
치욕스러운 것은 자신이 감당하면 된다. 이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래를 경험할 수 있는 자, 그리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자. 내가 원하는 건 그 두 개다.]
“······뭐?”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래를··· 경험할 수 있는 자라고?’
얼핏 생각해도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
세상에서 이진이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중의 한 명.
[안 되겠나? 크크, 역시 그렇겠지. 아마도 이 곳의 왕이 가장 아끼는 것들일 테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나? 왜 그 두 사람을 원하는 건지?”
[귀찮지만, 말해주도록 하지. 차원을 지배하는 힘은 세 가지다. 미래, 과거. 그리고 현재. 왕은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나머지 두 힘을 분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왕은 미래와 현재, 과거의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되어버리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한낱 피조물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지. 이것은 차원의 섭리, 그 자체이니까.]
이루가 올려다본 거인은 거만한 표정도, 자세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두 사람은 약간의 힘을 가졌을 뿐인데. 미래를 본다고 하지만, 아주 간혹 떠올릴 뿐··· 네가 말한 것처럼 모든 미래를 꿰뚫어보지는 못한다.”
[당연한 말이지. 고작 인간의 영혼으로 그만한 힘을 오롯이 사용했다간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고사하고 정신이 터져나갈 테니 말이다.]
여전히 모르겠지만,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의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니.
[결정을 내렸나? 말했듯이, 그 두 사람을 내게 데려오면 나는 이대로 물러날 거다. 너희도 알겠지? 어차피 너희들의 힘으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잠시만 시간을 다오.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지.]
피식 웃은 거인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늘 앉아있던 태화전 터에 다시금 거대한 덩치를 눕혔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진정해.”
서도진의 고함에 이루가 조용하게 타일렀다.
“무슨 말입니까?! 설마, 그 두사람을 정말 내어줄 생각은 아니겠죠?!”
도진의 물음에 이루는 말이 없었고, 도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손에 대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퍽-.
흥분해서 날 뛰려는 도진의 뒤통수에 날아든 건 다름아닌 메를린의 펀치.
“진정 좀 해라. 이 녀석아, 이루가 그럴 녀석이야? 넌 네 스승을 그렇게도 몰라?”
“그, 그건 알지만!”
“이루, 이 녀석 더 날뛰기 전에 말해봐.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 몸은 괜찮아?”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모습이었는지, 메를린이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블랙 녀석, 그 사이에 솜씨가 더 좋아졌네? 전에는 그래도 다친 부위가 조금 욱신거리는 느낌은 있었는데, 이젠 아예 그런 것도 없어. 꼭 처음부터 다친 적이 없는 느낌이랄까?”
“···그거, 블랙의 능력이 아냐.”
“뭐? 무슨 소리야?”
작게 한 숨을 내쉰 이루는 과거를 되짚어봤다.
시은이가 처음으로 각성을 하던 그 순간.
도진이는 분명 무리한 마력 운용으로 라이프 베슬이 깨졌었다.
‘한 번 손상되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은이의 손이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고쳐졌었지.’
당시에는 블랙을 능가하는 엄청난 힐러가 되려나 보다 싶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그런 게 아니었다.
“잘못된 과거를 고칠 수 있는 능력···.”
“뭐? 대답은 안하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연과 시은 자매.
“···어쩌면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