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45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연이의 꿈이 이번에는 그저 개꿈이 아니라면 게이트 열리는 순간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
더 큰 문제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거의 대다수가 국가적으로, 혹은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유력 인사들이라는 점이다.
한 명이 죽어도 해외 토픽으로 뉴스에 나올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면 그건 그저 뉴스 한 줄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다.
국가적 대혼란, 그리고 그 뒤로 찾아올 경제적 공황까지.
아주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어질어질한 문제점들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질 정도로 떠오른다.
“그럼 일단··· 우리측에 그나마 호의적인 중국 상무위원을 찾는 게 급선무겠네요.”
평소 시사나 국제 문제에도 관심이 제법 많은 시연이가 상무위원이란 단어를 꺼내자 안정민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마침 그런 사람이라면 한 명이 있네요. 그나마 선생님께 협조적이었던 사람이···.”
안정민은 저우비장을 떠오리곤 얼른 대답했다.
어차피 주석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지 벌써 수 년, 지금 중국의 최고 결정기관은 아직도 그 멍청한 작작들이니까.
좋든 싫든 도움이 필요하긴 한 셈이다.
“호의적이라곤 하지만 그 한 사람의 의견으로 이런 큰 행사를 취소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 저우비장이 그나마 호의적으로 나왔던 이유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뻔하다.
이진의 압도적인 무력.
그것이 두려워서 굴복했던 것이지, 그가 뭔가 다른 특별한 이유로 저자세로 나왔을리는 없다.
‘그러니 지금은 더 힘들겠지.’
어쩌면 지난 번과는 태도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지도 모른다.
이루나 유리코프도 힘이라면 어디가서 기죽을 사람들이 아니긴 하지만, 이진 한 사람이 가진 힘이 귀환자 6인의 힘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하다고 했었으니···.
‘···잠깐, 그 이야기를 중국도 알고 있나?’
너무 대단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지금 자신에게는 그게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런 사실을 다른 곳에서도 알까?
아니, 생각해 보면 자신도 어디가서 따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물론 간혹 화면에 잡힌 이진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가 다른 귀환자들과는 뭔가 ‘결’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예측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걸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저들에게는 없다.
“일단 약속을 잡아보죠. 혹시 대표로 나서주실 분이 계십니까?”
이루, 유리코프, 라미야.
지금 자금성에 와있는 귀환자 3명 중에서 적어도 한 명은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를 꺼내긴커녕, 애초에 만나기도 힘든 사람이 바로 저우비장이니까.
이렇게 말하긴 자존심 상하지만 중국 국무원의 총리라는 자리는 얼마 전 한국 대통령조차 아래로 내려다 볼 정도의 힘과 권력을 가진 위치다.
물론 지금은 택도 없지만.
“내가 가지.”
“유리코프 선생님이요? 음···. 혹시 다른 분들은···.”
조금 전까지는 세 사람중 한 명이라도 나서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유리코프가 나서자 어째선지 조금 걱정이 앞선다.
물론 유리코프 역시 귀환자이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 건 틀림없지만···.
‘어쩐지 유리코프 선생님은 이런 일과는 좀 안 맞을 것 같으니까···.’
우락부락한 근육남인 건 차치하더라도, 평소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때려부시는 쪽에선 세계 최고일 듯하지만 이런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조금 어려웠다.
물론 방송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영향력이 약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그런데 이루와 라미야의 입장은 그런 안정민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유리코프가 나서는 게 제일 믿음직스럽지. 그렇지?”
이루의 물음에 라미야도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런 문제에 유리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어딨겠어.”
“···유리코프 선생님이요?”
“아, 정민이 혹시 몰랐나?”
“뭘 말입니까?”
“유리코프 말야. 쟤, 하버드 정치외교학과 출신이잖아.”
안정민뿐이 아니라, 시연이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 입력이 잘못된 로봇이라도 되는 것처럼 동시에 굳어졌다.
“···네?”
가장 먼저 현실로 돌아온 안정민이 반문했지만, 이루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무튼, 보기완 다르게 제법 똑똑하다고.”
시연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유리코프를 다시 돌아봤다.
굳이 각성하지 않았어도 리사에서 곰들과 어울려 레슬링이라도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은 덩치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인줄만 알았는데.
‘사람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건데···.’
왠지 부끄러웠다.
“저, 저도 같이 갈게요!”
“시연 양이요? 굳이 그럴 필요는···. 위험할 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저 이래 봬도 나름 각성자거든요?”
‘그래서 더 위험하다는 건데···.’
다른 이도 아니고, 중국 국무원의 총리다.
근처에 각성자가 없다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더 우스운 일.
그런 사람들이 시연이를 보고 과연 모를까?
마력이 조금 둔감한 신체 강화 계열 각성자만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대마도 아카데미에서 벌써 5기 졸업생까지 나온 시점에 인재가 없는 중국이라도 이능력 계열 각성자가 분명히 이곳에도 있을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아도 ‘예지’ 능력에 관해 말을 하러 가는 상황에 본인이 거기 등판해버리면 더 의심을···.
‘아니지, 오히려 앞으로 나서는 게 나을지도?’
그만큼 중요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를 전면에 내세울리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저 꽁꽁 감춰두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만약 탄로가 나도 뭘 어쩌겠어.’
아무리 중국이라곤 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이진의 조카를 어찌할 생각은 하지 않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서두르시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까요.”
이제 겨우 한 시간, 그 안에 저우비장을 설득하고 자금성 주변에 빽빽할 정도로 모여든 인파까지 해산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 * *
그리스에서 급하게 떠오른 대통령 전용기가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헌터들의 시대가 찾아온 만큼 각 나라에서 각성자들을 통솔하는 기관들은 무소불위에 가까운 권력을 손에 쥐게 됐다.
간혹은 그게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나 국왕을 넘어서는 경우도 종종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그리스였다.
경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관광 수입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게이트 관리국이 창설되기도 전 이미 경제 공황이 시작된 탓이 가장 컸다.
천만이 조금 넘던 전체 인구는 급속도로 줄어 20세기 중반 무렵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렇게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기다 못해 지중해 바닷물이 올라올 지경까지 파고들 즈음 등장한 것이 바로 게이트 관리국.
관리국이 창설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계 헌터 연합의 가입이었다.
몬스터의 습격에 끝을 모르고 줄어들던 인구수가 연합의 지원 병력 파견으로 그나마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권력이 생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지.
대통령 전용기이지만 이미 유명무실해진지 오래다.
국가의 명예같은 허울 좋은 것보단 실리를 챙기겠다는 말에 대통령은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전용기를 강탈당했으니···.
사전 통보도 없이 급하게 날아왔는데 그래도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 몇몇이 출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토니스 국장님! 갑자기 일정을 변경하고 오신 이유가 뭡니까? 역시 중국의 초청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던 겁니까?”
“귀환자 이진이 사실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안토니스는 기자들의 어처구니 없는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공항을 빠져나갔다.
중국 기자들의 개념없는 몰상식한 질문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최근에는 그 도를 점점 넘어서고 있었다.
“이진이 제일 싫어하는 게 중국인데, 무슨 헛소리르 하는 거야. 저것들은?”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이진 선생뿐 아니라 하밀 로넌도 사실은 중국계 미국인이라고 하는 작자들이니까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는데?”
“마이클 잭슨도 사실은 중국인이라고 우긴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이진 선생이 들어간 게이트가 중국의 심장인 자금성이었던 점이 컸습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가만히 넋놓고 있다간 정말 후대에선 이진이 중국인이라고 기억될지도 모를겁니다.”
수행 비서의 말에 안토니스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선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그보다 지금 현장 상황은 어때?”
“아직 별다른 변화는 없다고 조금 전 보고 받았습니다. 말씀하신 여성분의 위치도 확보했는데, 함께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뭐, 그야 그렇겠지.”
이진의 조카라는 것만이 아니라 이루 아카데미 학장과는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다.
정보에 의하면 라미야도 한국에 갔을 당시 손님으로 집에 한동안 머물렀을 정도니 친하겠고.
하지만 가장 걸리는 건 그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이였다.
‘하필 서도진의 여자친구라니···.’
귀환자 7인의 존재가 전대의 영웅이라면, 서도진은 그야말로 지금 시대의 영웅이자 모든 아카데미 출신 각성자들의 롤모델이다.
이미 손에 닿기는커녕 쳐다보는 것만도 영광인 이들과는 달리, 자신들과 함께 각성해서 성장한 서도진 교수야 말로 현실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인 셈.
거기다 몇 차례에 걸친 그의 숭고한 희생에 가까운 행동은 각성자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세계적인 따돌림은 확정인 셈이다.
“국장님. 이시연양이 조금 전 유리코프 바실로프와 함께 저우비장 총리를 만나러 향했다고 합니다.”
“국무원 총리를? 갑자기 무슨 이유로?”
“죄송하지만 아직 그것까진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리코프 선생이 음파 차단막을 펼친듯 합니다.”
“됐다. 이만 물러나라고 해.”
그걸 탓할 순 없지.
아무리 청음聽音에 특화된 각성자를 심어놨다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을 아득하게 초월한 초인 중의 초인.
괜히 무리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게 더 문제다.
가만히 고민을 해봤다.
어떻게 해야 이시은의 능력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을지.
‘···대체 이 타이밍에 국무원 총리를 만나러 간 이유가 뭐지?’
예정된 시간까지 이제 30분 남짓.
뭘 하든, 오늘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작은 가능성 하나만 믿고 무작정 날아오긴 했지만 막상 도착하면 뭔가 뾰족한 수가 떠오를 것만 같았는데.
정작 머릿속은 더 하얗게 변해만 간다.
지금은 그나마 테린 도로시라는 작은 연결점이 있으니 어떻게든 접근해볼 길이 있지만, 이대로 이진이 돌아오면 이시은과 만남 자체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때는 이시은과 접촉하려면 정말 국운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전에 어떻게든···!’
당장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도 된다.
그저 얼굴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추후 도움이 될 거라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물론 이시은이란 여자가 정말 ‘재생’이라는 능력을 가졌다는 전제가 붙긴하지만, 정보 과장은 자신했었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정황상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제 목을 걸어도 좋습니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정보 과장의 그 직감과 상황 분석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 바로 자신 아닌가.
“저··· 구, 국장님?”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말 걸지 말라고 했···.”
짜증스러운 얼굴로 정면에 마주 앉은 비서를 바라보는데 그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뭔가 싶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저게···. 뭐지?”
현실 감각이 멀어지는 장면에 잠시 정신이 흔들렸다.
자금성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아직도 10여분.
공안들이 앞에서 길을 뚫어주고 있어서 빠르게 달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거리.
그러니 보일리가 없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건 분명 자금성이었다.
금빛 기와로 덮인 2층 구조의 옛 중국식 건축물.
그게 지금 반쯤 부서진 채로 거대한 거인의 손에 잡힌 채 휘둘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