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35화.
“선생님은 혹시 어린 시절이 생각나십니까?”
안정민의 뜬금없는 소리에 내 고개가 순간적으로 갸우뚱 했다.
그리고 내 대답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후 아침부터 혼자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선 말을 이었다.
“사실 제 어린 시절 꿈은 헌터였습니다. 아니, 저만이 아니었죠. 한 학급에 40명이 넘던 시절,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랬으니까요.”
“그게 무슨···.”
“우리는 그랬어요. 당시에 헌터들은 우리 모두의 영웅이었고, 어렸던 우리들 역시 그런 사람들을 보며 꿈을 키워나가는? 그런 시절이었죠.”
이해는 간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영웅들을 꿈꾸곤 하니까.
난데없이 망토를 둘러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던 애들도 있었을 정도로.
“···하지만 전 아니었습니다. 전 그런 주인공은 아니었던 거에요.”
조금 전까지 꼿꼿하게 서있던 자세가 조금은 무너졌다.
“···하지만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책망하는 듯한 말투와 그런 소리침이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아시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는 그런 영웅 같은 사람이요. 선생님이 세상을 구한 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정민아, 너는 이미 지금도 그러고 있어.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아카데미도 없었을 테고···. 지금의 나도 없었을거다.”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
정민이는 이 세상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만난 친구이자 조력자였다.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어쩌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지 모를 그런 사람.
“늘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후회되는 일이 많네요.”
“인생이란 후회와 추억이란 녀석들이 번갈아 가며 쌓여 만들어지는 거니까.”
“후회와 추억이 만드는···. 그 말이 정확하네요.”
뭔가 멋진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런 말재주는 없어서 그저 담백하게 말해줬다.
후회가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마 신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하다고.
“한국은 안정민이라는 사람을 얻은 것에 감사해야 할거야.”
“너무 과분한 말씀이지만, 또 막상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좋긴 하네요.”
“입바른 소리가 아냐.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네.”
중년 남성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지만 그게 정민이라면 봐줄 수 있지.
“죄송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부탁하고 싶은 일이라는 게,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 말에 정민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는 눈빛에서는 여기까지 찾아왔음에도 아직도 망설이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뭐든 말해도 된다. 판단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하면 되니까.”
“···며칠 전, 중국에서 한국 정부에 몇가지 요구한 것들이 있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요구라니.
지금이 무슨 청나라 시대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건가?
때때로 인터넷에서는 아직도 자신들을 대국大國이라 부르고, 한국을 소국小國이라 칭하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멍청한 작자들의 쓸데없는 소리다.
그런 말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했다간 사는 것 자체가 피곤해지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게 국가 차원으로 넘어가면 달라진다.
몇몇 생각없는 이들이 변을 싸듯 써내려간 것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넘어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 국가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일이니까.
중국이 아무리 제 멋대로라곤 하지만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을거다.
“헌터 파견과 물자 지원 요청입니다.”
“요청이긴 하지만 요구라고 보일 정도로 강압적이라는 의미인가?”
“네.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경제적인 보복을 하겠다는 포함되어 있으니 사실상 한국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게 현실이니까요.”
“경제적인 보복이라··· 내가 그쪽으로는 잘 몰라서 그러는데, 한국 경제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나?”
미국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중국이 그 정도인가?
솔직히 내가 살던 시대-물론 지금도 살고 있기는 하지만-에는 중국이 그 정도로 영향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중국은 현재 한국의 최대 수출국입니다. 만약 중국 정부가 마음먹고 한한령限韓令을 발동하기라도 하면 무역 제재는 물론이고 문화콘텐츠 분야에서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겁니다.”
“···그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만약 정말로 수출입이 차단되기라도 하면 서민들의 경제가 적어도 10년은 퇴보하고요.”
우리쪽도 똑같이 보복하면 되지 않냐는 말에 정민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는 불가능하다는 말.
“설마 그렇다고 장비를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물자 지원이라는 건 아마도 장비일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말이 성사되질 않으니까. 장비라는 것도 아마 우혁이가 만들어낸 슈트나 캐논 슈터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거겠지.
이미 대마도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훈련생들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게 비밀 유지가 될 수있을리가 없지.
“네, 그건 아닙니다. 단지 자신들에게 최우선으로 장비를 팔아달라는 의미죠. 아마 삼영 그룹에서 직접 계약 체결을 할 겁니다.”
“그쪽이 아니라면 문제는 역시 헌터 파견인가?”
“···네. 한국이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는 하지만 사건 사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라 중국이라니···. 자발적으로 가겠다고 나설 헌터가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보낸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국가다. 북한같은 공산주의라면 모를까,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다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아, 군대는 예외다. 그건 나라에서 정한 ‘국방의 의무’이니까.
“예나 지금이나 참 마음에 안드는 곳이네.”
딱히 거슬린 적은 없지만, 좋게 보인 적도 한 번도 없는 곳.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없이 그저 신경쓰지 않은 채 살아가고 싶었는데,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말이 안되는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건이 또 있었어?”
거참, 진짜 빌어먹을 녀석들이네.
도움을 요청하는 주제에, 조건까지 내밀다니. 얼마나 뻔뻔한 거냐 도대체.
“그게···. 선생님을 보내달라고 하더군요.”
“···뭐?”
잠깐이지만 정말이지 심각하게 귀를 의심해봤다.
나이를 먹어서 가는 귀를 먹었나? 아니, 내가 나이가 조금 들긴했지만 신체는 아직 20대인데···. 그럴리가 있나.
“선생님이라면··· 설마, 나?”
천천히 들린 손가락이 명치 어림을 찔렀다.
“···네. 이진 선생님을 보내달라는 게 공식적인 요청ㅇ···. 서, 선생님?”
분노로 인해 마력이 끓어오르는 기분은 정말 오랜만인데.
태영이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지금 내 옆에서 있다가 마력 공명이라도 했다간 큰일날 뻔했다.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그, 그래서···. 오, 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정민이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중얼 거리고 있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기억도 못할 텐데.
저런 상황에서도 할 말을 하려고 하는 걸 보면 정말 정신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
습습- 하아-. 습습- 하아—.
산모만 하라는 법 있나? 라마즈 호흡이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정말 효과가 있긴한지, 내면의 분노가 점차 사그라든다.
“정민아.”
“···네, 네?!”
고개를 박고서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내 부름에 정신이 들었는지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중국에 연락 좀 해둬라. 내가 한 번 찾아간다고.”
“···어, 어쩌실 계획이신지.”
“글쎄. 일단 가서 이야기나 들어보려고. 무슨 생각으로 날 ‘요구’한 건지 궁금해져서.”
“저에게 언질이라도 조금 주시면 저희 쪽에서도 미리 준비를···.”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온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이 부탁을 하려고 왔을까.
뭐가 됐든 이젠 별로 상관없다.
“삐뚫어진 건 바로 잡아야지. 나를··· 아니, 한국을 만만하게 보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삼아도 좋고.”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손에 꼽히는 나랍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심각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지도···.”
정민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너도, 다른 사람들도.”
“네? 어떤 착각을···.”
나를 두고 인간의 왕이라고 부르던 녀석이 떠올랐다.
생판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온 놈도 나라는 존재를 처음 보자마자 알아채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모를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이번 기회에 알려주면 되겠지.
아직 늦지 않았다.
* * *
가게 입구에서 쭈뼛거리는 태영이.
쉽사리 들어오질 못하고 뭔가 불안한 눈빛으로 가게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거기서 뭐해. 안 들어와?”
“사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가게 안에서 불안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들어가야 하는 건 아는데, 뭔가 몸이 거부하는 느낌이랄까.”
정말 재능 있네 이 녀석.
정민이가 가게를 떠난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그때 뿜어졌던 마력의 잔재를 느끼다니.
“지금은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와.”
“대체 이게 뭡니까? 혹시 무슨 마왕이라도 나타났었던 건가요?”
“마왕은 무슨··· 잠깐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은 괜찮으니까 걱정말고 와서 사온 거나 내놔봐.”
“···네.”
날 보는 눈빛에서 존경심에 경외심이 추가된 것 같긴 하지만, 난 그보단 오히려 태영이가 사온 식재료가 더 궁금했다.
“닭이네?”
그것도 쉬이 보기 힘들 정도로 큼직한 토종닭.
군데군데 털이 남아있는 걸 보니, 진짜 산에서 기른 산닭이다.
설마, 이 녀석이 내 생각이라도 읽은 건가?
백숙을 생각긴 했었는데 말로 한 적은 없고, 그렇다고 정말 생각이라도 읽는 게 아니라면 그야말로 기가막힌 우연의 일치아닌가.
“혹시 백숙하려고?”
“아닙니다.”
그렇게 답하고선, 다시 꺼내놓는 재료들.
가장 눈에 띄는 건 큼직한 버섯들이었다. 그리고 독특한 것이 하나 더.
“이건··· 산초 아냐?”
산초는 일반적으로 한식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재료다.
얼얼한 맛을 가져 마라탕같은 것에나 들어가는 걸 왜 사온 건지 모르겠네.
“알고 계시네요? 북에는 산초가 제법 많이 납니다. 그래서 요리에 종종 넣기도 하죠. 예전에 먹어본 닭요리가 생각나서 그걸 해보려고 합니다.”
“산초가 들어가는 닭요리라. 탕인가?”
“아뇨. 구이입니다. 이쪽에서도 비슷한 요리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이름이 닭갈비라고 하던가요?”
북한식 닭갈비라.
아마 산초는 고춧가루 대신에 매운 맛을 내는 용도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그건 또 그것대로 기대가 되네.
“근데 닭갈비를 하려면 양념에 재워야 하는데. 이건 뭘로 재우는 거지?”
“혜산닭구이는 머루술에 산초와 생강, 후추, 간장, 조청 같은 것들을 넣고 재웁니다.”
“머루술? 그런 게 어디···.”
머루술은 없다.
애초에 머루라는 것 자체가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 술을 담근다고 해도 팔 수 있는 양이 나오질 않는다.
“비슷한 게 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비슷한 거라니···. 잠깐, 너 설마··· 그거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어떤 술인데, 닭을 재우는 양념장에 넣는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그야말로 삼계탕에 천년 묵은 산삼을 넣는다는 거나 같은 말이다.
아니지, 이건 어쩌면 그보다 더한···.
무심한 얼굴로 술 항아리를 가지고 온 태영이가 거리낌없이 뚜껑을 열었다.
익숙하면서도 진한 복분자 향기가 순식간에 가게로 퍼져나간다.
향만 맡아도 알겠지? 이게 얼마나 좋은 술이라는 것 쯤은. 이걸 고기 재우는 용도로 쓰는 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건지.
잠깐.
“···너 이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난 분명 말을 해준 적이 없는데.
“덕윤이가 가기 전에 알려주고 갔습니다. 잠이 잘 안 올때 한 잔씩 마시면 좋다고.”
“···하, 하하···.”
도진이가 덕윤이에게, 그리고 이제 덕윤이가 태영이게 알려준 건가?
무슨 비밀 결사대의 전설을 전해주듯이.
진한 보라빛 술을 아낌없이 붓는 태영이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현실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나도 저 술을 저렇게 따라서 마셔본 적이 없는데···.
“너, 그게 얼마나 비싸고 귀한지 알기나···!”
“금액은 신경쓰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너, 닭구이인지 뭔지 맛 없기만···!”
“맛있습니다.”
그러는 게 좋을 거다.
아니면 너희 제자 삼 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