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33화.
어쩐지 오랜만에 맞이하는 것 같은 주말 오전.
아침부터 거실이 북적거리는 느낌에 나와보니, 시연이와 시은이가 앞치마를 둘러맨 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식탁에는 나리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고.
“···두 사람, 아침부터 뭐해?”
분주한 와중에도 내 목소리는 들렸는지, 시은이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봤다.
표정만 봐서는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를 앞에 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잠이 깬다기보단 눈을 감고 휴식을 한다는 말이 어울리는 게 나의 수면이긴 하지만 정말 저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잠이 덜 깬 건 아닌가 의심을 해야 할 거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말이지만.
“삼촌! 오늘 놀이공원으로 다 같이 소풍 가기로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그런 이야기를 했었긴 하지.
입학하기 전에 가족끼리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자고 말이다.
“그래서 김밥 싸고 있는 거야?”
“그럼! 소풍엔 당연히 김밥이지. 헤헤-.”
“삼촌, 시금치가 좋아요? 아니면 오이가 좋아요?”
시연이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내가 뭘 좋아했더라?
···아니. 애초에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에 호불호를 가릴 정도로 먹어본 기억이 없다.
남아있는 기억이라곤 아주 오래전.
이 세상에 몬스터라는 것들이 튀어나와 부모님을 데리고 가기 전.
아마도 학교에서 가는 소풍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싸주셨던 것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거의 마지막 김밥이었으니까.
“글쎄··· 삼촌은 아무거나 다 맛있을 것 같은데?”
“오이 못 드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가리는 게 없다는 게 내 유일한 단점인데.
“그럼 그냥 반반 쌀게요. 나리도 괜찮지?”
“그럼요! 전 없어서 못 먹죠. 있는데 가리진 않아요!”
시연이야 예전부터 집안 살림을 책임졌었으니까. 그리고 시은이도 요즘은 주방을 자주 기웃거린 탓에 제법 요리에 자신이 붙었다.
물론 그 실험적인 요리의 대상은 대부분 도진이가 했기에 그나마 다행이지.
하지만 그 녀석이라면 아마 세상 어떤 요리보다 시은이가 해준 게 맛있다고 하지 않을까? 입으로만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할지도.
“아침은 안 했는데··· 혹시 시장하시면 여기 꼬투리 조금 썰어둔 거 드실래요? 나리도 이거 먹을래?”
“당연하죠! 김밥은 꼬투린데!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이 주방을 차지한 것도 있지만, 나리는 아직 요리해본 적이 없단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식탁에 있었던 거구나.뭐라도 돕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나리는 맛있게 먹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알았지?”
“···네!”
시연이의 목소리는 인자함 그 자체였다.
집안에서야 가장 노릇을 했지만, 밖에 나가면 아직 한참이나 어린아이인데, 저런 모습이 너무 익숙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온다.
그나마 요즘은 경제적인 걱정이야 일절 신경 쓰지 않으니 밝아진 거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심정은 정말이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으니까.
“시은이는 입학식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
“응! 삼촌 올 거지?”
“당연하지. 누구 입학식이라고 거길 빠져.”
이 삼촌은 겁이 많단다.
감히 시은이의 일생에 한 번뿐일 행사에 빠졌다가는 무슨 원망을 들을지 생각만 해도 두렵단다.
“삼촌, 도진이 오빠는? 못 오는 거야?”
입학식은 평일.
도진이는 원래대로라면 대마도에서 수업이 있다.
교수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나이가 비슷해서인지 훈련생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
덕분에 다양한 상담도 해주느라 평일에는 정말 아침에 눈 뜨고 자리에 누울 때까지 정신없이 바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왜? 도진이 왔으면 좋겠어?”
“···그, 그야 당연히···!”
“음, 그럼 훈련생들의 교육이 늦어질 텐데··· 한국이야 안전한 편이지만 지금 외국은 엄청 위험한 거 알지? 그쪽에서는 아카데미 훈련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텐데···.”
열심히 김밥을 말던 시은이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어, 어쩔 수 없지. 나 그런 것도 이해 못 할 정도로 철없지 않거든?!”
“그래도 네가 정 오길 바라면 학장이니까 오전 수업 정도는 조정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살짝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김밥을 말다가는 내 말에 슬쩍 고개를 든다.
“지, 진짜로오···?”
사실 시은이의 입학식 날 도진이가 할 일은 거의 없다.
왜냐면 그날이 바로 이능력 계열 아카데미 훈련생들의 입학식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아직 뉴스에서는 제대로 보도가 되지 않아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지만, 이미 내부적으로는 결정 난 사항이다.
심지어 각국에 연락까지 마쳤으니 미룰 수도 없다.
덕분에 그날은 도진이보단 국정원이 미친 듯이 바쁠 예정이다. 각 나라에서 들어오는 이들의 신상을 모두 파악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그들이 혹여라도 한국에서 첩보 활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 하니까.
특히나 한국 훈련생들을 포섭하려는 움직임은 지금도 조금씩 보이고 있는 실정이라 국정원의 대마도 파견 인원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음, 삼촌이 도진이 올라오게 해주면 시은이는 뭘 해줄래?”
“뭐든! 앞으로 삼촌 말도 잘 듣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또···!”
“···언니, 무슨 초등학생이에요?”
옆에서 듣던 나리마저 황당한 눈으로 시은이를 쳐다봤다.
저런 약속은 정말 유치원생이 장난감 사달라고 조를 때 엄마에게 하는 전형적인 거짓부렁이니까.
실제로 지키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태반은 장난감을 손에 쥐면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약속들.
“그럼 뭘···.”
흔치 않은 기횐데, 시은이에게 뭘 받아내야 할까?
당연히 물질적인 걸 바라지는 않는다. 내 돈, 네 돈 할 것도 없이 함께 사는 가족끼리 그렇게 따질 생각도 없고.
“음··· 그럼, 나중에 삼촌이 말하는 거 딱 하나만 들어주기. 어때?”
“소원 들어주기 같은 거?”
얼핏 생각하면 그럴 수 있겠지만, 이건 그런 달콤한 약속과는 조금 다를 거다.
“뭐가 됐든, 삼촌이 말하는 거 무조건 한 번은 듣기. 예외 없이.”
“···불안하지만 뭐··· 좋아! 약속!”
손가락을 걸고, 이상하고 복잡한 수신호를 여러 가지 추가한 뒤에야 시은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앗싸! 그럼 오빠 그날 오는 거다?!”
“응. 어차피 입학식이라 도진이 할 것도 없거든, 인사야 나중에 차차하면 되고··· 첫날은 신입생들 조 추첨에 기숙사 배정에 정신없을 거야. 그거야 국정원 직원들이 해주니까.”
이런, 나 지금 너무 사악하게 웃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린 조카 속여먹고 너무 즐거워하면 조금 민망한데···.
아, 나리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보니까··· 조금은 그런가 보네. 그래도 괜찮아. 즐거우니까.
“사-암-촌!”
“하하하!”
김발을 뭉쳐 몽둥이처럼 만들어 쫓아오는 시은이를 피해 넓디넓은 거실을 한바탕 뛰어다녔다.
워낙 잘 지어서 층간소음은 없다니 다행이었지.
뭐,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바닥에 방음진을 설치했겠지만.
* * *
즐겁지 않을 수가 없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게이트에 대한 위협 때문인지, 현저하게 줄어든 놀이공원은 그야말로 세 사람의 안방이었다.
줄이라곤 거의 없는 각종 놀이기구를 그야말로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닌 덕에 오는 길에 나리와 시은이는 이미 뻗어버렸다.
각성한 덕에 놀이기구 좀 탔다고 체력이 바닥났을 리는 없을 텐데.
아마 평생토록 나리를 억누르던 압박과 긴장감에서 처음으로 벗어난 해방감 때문이려나.
저렇게 온화하게 웃는 표정으로 창문에 기대어 자는 걸 보니 괜히 내가 다 뿌듯해지네.
“삼촌. 나리, 참 착하죠?”
“···그러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이미 시연이의 눈만 봐도 알 것 같다.
“네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해. 나는 찬성이니까.”
“···정말요?”
“당연하지. 그리고, 사실 나도 너희 두 사람한테 얹혀사는 거잖아? 두 사람이 좋다면 내가 반대할 이유는 없지.”
푸훗-.
시연이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눈을 살짝 흘겼다.
“삼촌 이럴 때 보면 진짜 능글맞아요. 알죠?”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온 식구가 전부 각성자네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의도한 적은 없지만 참으로 희한하게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와 버렸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나리 능력은?”
“아직 모르겠어요. 얼마 전까진 자기가 각성한 것도 몰랐던 아이니까요.”
특수 능력이라는 건 확실한데···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삼촌은 가게 앞에서 내릴 테니까, 집까지는 시연이 네가 운전해서 갈래?”
“오늘 휴일인데, 가게는 왜요? 아, 태영이 오빠 때문에요?”
“응. 어디 좀 다녀온다고 했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
이미 태영이가 누군지 아는 시연이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도 듣는 순간 김태영이 어딜 다녀온 건지 알아챈 거겠지. 내 조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똑똑한 아이니까.
“혹시···.”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며 묻는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시연이는 대체 어떻게라도 눈으로 물었고.
“라미야랑 같은 능력자야. 뭐, 아직은 태양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긴 하지만···.”
“와아-! 그거 되게 희귀한 능력이잖아요. 태영 오빠 엄청 부럽다.”
···이 아이는 자기가 가진 능력이야말로 이전 세대에서는 유일무이했다는 걸 가끔 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가게 들려서 잠깐 얼굴 좀 보고 갈게. 먼저 가 있어.”
“알겠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길가에 내려 운전석에 시연이가 타고 출발하는 걸 확인하고선, 가게로 향했다.
가게 위층에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하고, 곧장 마당으로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뭘 마중까지 나와.”
“···위층에 누가 좀 와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마치 내가 무슨 불심검문이라도 나온 단속반 같네.
지금 위층은 태영이 혼자 사는 공간이고, 사생활이 있으니 손님이 온 것 가지고 뭐라고 해선 안 된다.
물론 그게 일반적이라면 당연히 나 역시 그랬겠지만.
아쉽게도 김태영은 그런 일반적인 상황에 속한 인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그를 찾아올 ‘손님’이라니. 있어서는 안 된다.아마 국정원에서 이 사실을 알았다간 대번 난리가 날 게 뻔하고.
“알고 있다. ···각성자던데?”
보려고 마음먹으면 볼 수도 있다.
마력 차단제가 도포된 건물도 아니고, 내가 투시하려고 마음먹으면야 보이겠지.
하지만 난 변태가 아니다. 어지간해서는 건물을 투시하거나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게 내가 아는 이의 사적인 공간이라면 더욱더.
그렇다고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다녀온 거냐?”
“네. 오전에 처리할 문제가 있어서 잠시 다녀왔습니다.”
간혹 이라도 의혹을 해소해주지 않으면 눈치를 챌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락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오는 건 다른 문제다.
“···혹시 같이 내려온 사람이냐?”
내 질문의 의도는 명확했고, 다행히 태영이가 내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었다.
“오늘 함께 온 사람이냐면,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 한국 망명한··· 제 친굽니다.”
“친구?”
북한의 계급 체계는 명확하다.
아마 정치에 한 발이라도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 세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알려진 사실.
어쩌면 아랍권의 왕이나 왕자와도 비교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많이 완화되었다곤 하지만 저쪽은 자그마치 ‘신’과 동격이니까.
그런 이가 스스럼없이 부르는 친구라는 명칭이 그리 흔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한국에 내려와 있다는 사실이 발각될 수도 있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만나야 하는 친구라니.
생각나는 게 하나뿐인데.
“···여자구나.”
대답이 없는 김태영.
그가 단순히 지금 상황을 넘기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로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 오래 봐오진 않았지만, 내게 용서를 구하면 구했지 이런 식으로 상대를 기만할 성격은 아니라고 믿었으니까.
“···국정원 쪽에는 내가 잘 말해두마.”
“감사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죠.”
다들 참 좋은 때네.
주변에 연애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가, 문득 옆구리가 시리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단 기분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