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126화 (126/153)

귀환자 식당 126화.

시연의 질문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아이.

“···네? 가, 각성자라니··· 지금 무슨 말을···.”

아이는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며 시연을 밀치고선 젖은 캔버스를 내려놓고 새로운 걸 집어 들었다.

‘진짜 모르고 있는 건가?’

시연은 특별히 훈련을 받은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각성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며 마력에 점차 민감해졌다.

주변에는 삼촌이나 덕윤이, 간혹 시은이를 만나러 집으로 오는 도진이를 보면 다른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아이에게서도 그게 느껴지고 있었다.

“잠깐만. 너··· 정말 모르는 거야?”

“언니, 저한테 왜 이래요. 저 각성자인지 뭔지, 그런 거 진짜 아니에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네?”

“이 학원에서 언니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저 놔주세요. 애들 오기 전에 얼른 정리해야 돼요.”

“이런 대우 받으면서 왜 걔네들이랑 같이 다녀?”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아이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언니는 딱 봐도 알겠어요.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고생이라곤 해본 적도 없겠죠? 삼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자. 거기다 경호원에 외제차, 개인실까지···. 하지만 다 언니같이 인생이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태어난 것부터 저주받은 삶도 있는 거라고요!”

“···내가 좋은 집에서 태어났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보는 건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살아왔다고···.

“나 작년까지만 해도 학비 낼 돈이 없어서 학교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만 하루에 2개씩 했어. 동생이랑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걱정이었고, 언제 무너질까 노심초사하는 집에서 매일이 불안했었어. ···네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함부로 다른 사람 인생을 평가하려고 들지 마.”

그깟 고생?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당히 이야기할 수는 있다.

삼촌을 만나기 이전의 삶이 그리 행복으로만 가득하지 않았다는 정도는.

“그, 그래도 지금은 좋아졌으니까 다 잘된 거잖아요!”

“그래. 지금은 좋아졌어. 그건 인정할게. 그런데 너는 왜 좋아지려고 생각을 안 해?”

“···나, 현장이랑은 이복 자매예요. 근데 걔는 그걸 모르죠. 아마 그걸 알면 더 괴롭히는 게 더 심해질걸요?”

“아빠나 엄마한테 이야기해 보면···.”

“지난달에 엄마는 죽고, 아빠는 혼외자인 절 자식으로 인정할 생각은 없데요. 웃기죠? 자기가 태어나게 했으면서 딸로 인정은 못 해준대요.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생활비랑 학비는 대준다니 감사해야죠. 아, 이 학원도 현정이 따라다니면서 챙겨주는 조건으로 보내준 거예요.”

시연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자, 아이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조금 글썽거리는 눈으로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됐죠? 그러니까 저 신경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저 진짜 길바닥에서 살아야 할 판이거든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시연이는 다시 아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싸구려 동정은 필요 없어요.”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말을 하는 아이. 하지만 이건 그저 그런 동정과는 조금 다르다. 공식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싫다는 건 자존심과 상관없이 그저 멍한 거지.

“정확하게는 내가 도움을 주는 게 아냐. 그런 도움을 주는 단체를 알고 있거든. 난 그냥 거기에 소개만 해주는 거고. 그런 것도 싫은 건 아니겠지?”

“···단체요?”

* * *

크으윽-.

최우혁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손으로 막은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을 보던 팀원이 최우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넌 아무래도 후방으로 빠져야겠어.”

“아, 안돼!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어떻게든 가겠다.”

“···너, 이거 민폐야. 그건 알고 그러냐?”

조금은 경멸이 서린 말투.

하지만 최우혁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비상용 지혈 붕대로 싸매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갈 수 있다.”

“넌 슈트 없으면 그냥 일반인이야. 차라리 슈트를 입고 오던가! 대체 왜 추가 훈련에 참여해서 민폐를 끼치냐고! 이게 지금 너만 괜찮으면 다야? 너 때문에 우리 팀이 이동 속도 제일 느린 건 아냐?! 그런데 이제 환자 뒤치다꺼리까지 하라고? ···적당히 좀 해라.”

다른 팀원들 역시 별반 생각이 다르지 않은지, 못마땅한 표정을 한 채 최우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제 각성은 도저히 안 되는 건가?’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간절함.

강제 각성을 한 이들이 처했던 여러 상황을 경험해봤지만, 자신에게는 각성이라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슈트를 입으면 된다? 처음엔 최우혁 역시 그런 자신감 하나로 아카데미에 들어왔고, 실제로 입학 허가까지 받아냈다.

초반에는 엄청난 양의 마석을 소모해가며 승승장구하던 최우혁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일반 슈트와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의 커스텀 슈트임에도 결국 한계가 있다는 것.

처음에는 압도적으로 강함을 뽐내던 최우혁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동기들에게 빠른 속도로 따라잡히고 있었다.

성장하지 못한다는 좌절감.

그래서 어떻게든 각성을 하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해봤지만···.

‘···결국 난 여기까지인가?’

어쩌면 더 뛰어난 성능의 슈트를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의 결과는 같을 거다.

정해진 결론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각성뿐이란 생각에 목숨까지 걸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 순간, 최우혁은 깨달았다.

“···뒤로 가지. 후송대에 연락해줘.”

“잘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올 거면 슈트라도 입고 오라고. 아무리 네가 재수 없어도 눈앞에서 시체 치우는 건 사절이니까.”

“그러지. 근데 더는 올 일이 없을 것 같다.”

“···뭐, 그건 알아서 하고. 자, 우린 이만 이동하자. 다른 팀에 비해 너무 뒤처졌어.”

최우혁의 손에 후송대의 신호기를 손에 쥐여준 팀원들은 빠르게 게이트 방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오늘은 마침 대마도에서 열린 E등급 게이트의 몬스터 토벌 및 게이트 공략이 훈련이었다.

“훗··· 그래도 얼마 전엔 머드 골렘까지 때려잡았었는데, 겨우 그린 오크 두 마리에 이 지경이라니···.”

아마 아버지인 최진우 회장이 보면 한심한 놈이라고 혀를 차겠지.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아카데미에 들어왔는데, 겨우 한 달 만에 항복하게 생겼으니···.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까, 후회는 없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각성을 못 했으면 운명이 아닌 거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뚜둑-.

수풀 너머로 발걸음에 부러지는 나뭇가지 소리가 들렸다.

“호송대? 여기-!”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목소리가 한층 밝았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찾아올 호송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ㄱ···!”

취리릭-.

크릉, 크릉.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린 오크 세 마리.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던 최우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으로 변했다.

분명히 올라오면서 몬스터를 토벌하며 왔는데, 어떻게 뒤에서 나타난 건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떠도는 직감 하나가 온 정신을 지배했다.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허벅지와 옆구리는 지혈은 해뒀지만, 자력으로 움직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두 마리를 상대하지 못해 이런 부상을 입었는데, 이 상태에서 세 마리의 오크?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운 소수점이겠지.

피식-.

왜 웃음이 나는 건지.

“아···. 딱 한 방만 날려버리고 싶었는데.”

피가 덕지덕지 묻은 둔기를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몬스터를 보고 있는데, 왜 하필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아쉬워서겠지.

‘그러고 보니,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직 완성 못 했는데···.’

두근-.

그 순간, 최우혁의 몸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 * *

[오늘의 메뉴]

[꼬막 비빔밥&홍합탕]

“삼촌-!”

저녁 메뉴를 적어두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은아, 연설문은 다 썼어?”

“응! 삼촌이 한번 봐줄래?”

매달리다시피 팔짱을 끼고 가게 안까지 들어온 시은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니.”

내가 그런 걸 듣고 판단할 만한 문학적 소양이 없구나. 미안하다.

“흠흠. 자, 그럼 시작할게. 잘 들어보고 이상하면 말해주기다? ···이제 저희는 새롭고 긴 과정의 시작이 될 출발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시작된 신입생 대표의 답사 연설은 솔직히 무난했다.

사실 문학에는 젬병인 내가 들어서 뭘 알겠느냐만 나쁘지도, 그렇다고 대단히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고 할까?

“···저희의 입학을 축하해주시는 모든 분께 약속드리겠습니다.”

끝인지 아닌지 정확히 몰라 잠시 가만히 있으니, 시은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상해?”

“아냐! 삼촌 팔에 소름 돋았어! 엄청 잘 썼네!”

“진짜? 진짜로?!”

“그러엄! 우리 시은이는 못하는 게 없네?”

“헤헤헤-.”

덕윤이와 태영이가 주방으로 연결된 바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도 팔은 안으로 굽는군요.”

“분명 소름이 돋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렇지 않나?”

이것들이.

“태영 오빠가 보기엔 이상해요?”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소름이 돋거나 대단히 잘 썼다고 말하기엔 많이 부족하지.”

“뭐, 그래도 저 정도면 처음 하는 사람치곤 잘 쓴 거 아닌가?”

덕윤이야 몰라도, 태영이는 저렇게 말해도 할 말이 없긴 하지.

연설을 얼마나 많이 해봤겠어.

물론 본인이 직접 쓰진 않았겠지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힝···.”

“아냐. 삼촌이 보기에 그 정도면 진짜 잘 쓴 거야. 쟤들이 뭘 알아. 안 그래?”

시은이가 어딘가 이상한 거라며 꼬치꼬치 캐묻는 와중에 사태를 이렇게 만든 주범 두 녀석은 도망쳐 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문장을 수정해줄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삼촌.”

“아! 시연아. 어서 와. 학원은 잘 갔다 왔어?”

구세주가 등장했다.

옆에서 강아지마냥 칭얼대는 시은이를 잠시 밀어냈더니, 이번엔 시연이가 다가왔다.

“네, 저 그보다 오늘은 삼촌한테 부탁드릴게 있어서 왔어요.”

“···부탁?”

지금까지 시연이가 무슨 부탁을 한 적이 있었나? ···없다.

항상 내가 알아서 챙겨줬고, 늘 그것들을 부담스러워하며 거절하긴 했어도 먼저 부탁을 해 온 적은 없었다.

“뭐든 들어줘야지. 말만 해.”

“다름이 아니라, 삼촌이 운영하는 귀환자 재단 있잖아요. 거기 어려운 학생들 돕는 것 맞죠?”

“음. 정확히는 이전 세대 각성자들의 후대를 지원하는 일을 하는 곳이지?”

“···그럼 만약에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각성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해당 사항이 없는 거예요?”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거구나.

하지만, 규칙은 규칙이다. 아무리 내가 재단 이사장이고 예외를 두자면 둘 수도 있겠지만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재단의 설립 목적과 전혀 관련도 없는 아이를 돕기 시작한다면 나중에는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될지도 모른다.

시은이도 이야기의 주제가 가벼운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칭얼대던 걸 멈췄다.

그 덕에 잠깐 생각을 정리했고, 시연에게 그 답을 이야기해 줬다.

“그렇네요···. 죄송해요. 애가 사정이 너무 딱해서 그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착해도 너무 착한 조카.

그 아이의 사정이 딱한 것은 알겠지만, 재단을 통해 도와주기엔 걸리는 것들이 꽤 많았다.

“그럼 차라리 삼촌이 개인적으로 도와주면 어떨까? 물론 그 친구가 괜찮다고 하면.”

이 방법은 나에겐 큰 차이가 없지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느낌이 완전 달라진다. 그야말로 적선을 받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니까.

“아마··· 그건 싫다고 할 것 같아요. 자존심이 꽤 강한 아이 같아 보였거든요.”

“안타깝긴 하지만, 그럼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렇죠. 에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걔도 각성자같은데 졸업하면 나아지겠죠.”

“응?”

지금 지나가는 말로 뭔가 중요한 걸 들은 것 같은데.

“네? 왜 그러세요?”

“그 아이, 각성자였어?”

“네.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보기엔 그런 것 같아요.”

“에이-.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하지.”

본인이 각성자라면 재단에서 도움을 줄 방법이야 찾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시은이는 느낄 수 있고, 본인은 각성 사실을 모른다라.

이거··· 특수 능력자일 확률이 아주 높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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