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25화.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는데, 하밀 녀석 때문에 그럴 수가 없게 됐다.
헌터 연합인지를 만들고, 의장으로 날 지목하는 바람에.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 있었지만, 연합이라는 것 덕분에 아카데미를 만드는데 태클이 없었던 것도 있으니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
하지만 연합은 단순히 헌터들의 연계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었다. 하밀이 그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려왔다는 걸 안다.
강제성이 없는 세계 연합 기구이긴 하지만 과연 강제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가입하지 않으면 재앙 급의 게이트가 터졌을 때 도움의 손을 내밀 수 없다는 제약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다른 조건들은 죄다 제쳐놓더라도 그 하나만으로도 가입을 원하는 국가들이 대부분이었다. 힘이 없는 나라일수록 헌터 연합에 가입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하밀은 기존 가입국의 과반수가 찬성을 해야 가입할 수 있다고 초반에 못을 박아뒀다.
의장국은 투표를 통해 선출한다고 하더니, 날 지목했고.
어차피 창립 당시 가입국은 러시아와 미국, 독일까지 겨우 3개국.
초대 의장국 선출은 사실 유리코프와 메를린, 하밀의 의견으로 정해진 셈이지만 결국 하밀의 생각이었겠지.
이 녀석이 지금 가게에 와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중국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서류에 든 내용을 보고서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중국이 지금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다곤 하지만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국가다.
심지어 의장국이 한국인데 중국에서 이 내용을 접하게 되면 한국에 경제적인 보복이 시작될 건 너무나 뻔한 일이고.
“상관없어. 어차피 중국은 쪼개질 거고, 한국은 합쳐지겠지. 거기다 얼마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네가 있는데··· 중국이 미치지 않고서야 과연 막무가내로 나올 수 있을까?”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아냐?”
그래 봐야 개인이다.
스스로가 각성자의 능력이 강하다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그건 그냥 기만일 뿐이니까.
하지만 한 국가. 심지어 초강대국의 대열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는 중국에서 고작 개인을 두려워할까?
“너야말로 너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나? ···
나는 지금 네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이 일이야말로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네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얼마나 많은데···! 하는 게 고작 요리라니?”
그래.
이 녀석은 애초부터 이런 녀석이었지.
지극히 효율성을 따지는. 아니, 오로지 철처하게 효율성만을 따지는 성격.
아마 하는 일에 거치적거리는 인물이 생기면 그냥 죽이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실제로도 충분히 실행이 가능하고.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고 하던가. 물론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지만, 원하는 걸 위해선 할 수 있는 건 맞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전부 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난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뿐이야.”
“지금처럼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려면 적어도 그걸 할 수 있는 세상이 돼야겠지. 여기서 지금처럼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다고 했나? 지금 이 세상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너 하나뿐이다. 진.”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나쁜가?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이 죽든 말든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날 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관없어. 나는 나 스스로가 이런 삶을 누려도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진, 네 주변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예를 들어, 네가 그리 끔찍이 아낀다는 조카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을 텐데 사람들이 그 두 사람을 어떤 말을 할까?”
“···무슨 말이야.”
“네가 헌터 생활을 한 게 12살이라고 했지? 그래, 어쩌면 너는 그때부터 모든 걸 혼자 알아서 해결해왔겠지. 하지만 진, 다른 사람들은 너와 달라. 사회생활을 해야 하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거든. 네 조카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너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한 적 없나?”
“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
“내가 말해주기도 뭐하니, 두 사람에게는 네가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지금 내 뒤에서는 덕윤이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김태영은 위층에서 대기중이었다.
조금 전 통일이 어쩌고 한 하밀의 정보력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고 굳이 대놓고 드러낼 필요도 없지. 괜히 불편하기만 하게.
하지만 정작 하밀이 언급한 시은이나 시연이는 지금 가게에 없었다.
시은이는 도진이가 다시 내려간 뒤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를 맡게 됐다며 연설문을 쓰는 데 정신이 없었고, 시연이는 늘 그렇듯 학원에 가 있을 시간이라.
하밀 녀석이 오늘 가게까지 찾아온 이유는 내일 오전에 예정된 기자회견 때문이었다.
찾아와서 대뜸 이런 소리를 꺼낸 건 아마도 예정 밖이었겠지.
“뭘 물어보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왕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라.”
“됐다. 나는 한국 음식은 별로라서.”
“그래? 오늘은 양념 소갈비인데.”
하밀 녀석 저번에 왔을 때도 한국 음식은 싫다며 그냥 가놓고선, 유명한 한식당에서 갈비를 양손으로 뜯어먹다가 파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혔었지.
그냥 내가 해준 음식을 먹고 싶지 않은 거다. 유치한 녀석.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것치곤 나가는 게 조금 늦다.
잠시 머뭇거리던 녀석이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조금 더 놀려먹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또 나가버리겠지? 참 이상한 부분에서 유치하게 군단 말이지.
솔직히 나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고.
“덕윤아. 여기 불판 가져다줘라.”
“네, 네! 사장님.”
덕윤이 녀석도 하밀 앞에서는 유독 긴장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거의 매일 같이 지내는 게 바로 이 난데, 하밀은 저렇게 어려워하다니.
“···술은?”
“술은 됐다. 내일 일정도 있고.”
이 정도 되는 각성자가 그깟 술에 영향을 받아봐야 얼마나 받는다고.
짝으로 들이붓지 않는 이상 기별도 가지 않을 텐데.
“덕윤아, 가서 복분자 한 병 따라와라.”
“네!”
딱히 겸상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녀석이 삐딱하게 나오니 나까지 덩달아 삐딱선을 타고 있네. ···무슨 짓이냐 이게.
“사장님, 여기요.”
“응. 고기는 내가 구울게.”
치이이익-.
간장 양념이 잘 배어든 갈비를 불판에 펼치자 수증기와 함께 양념장의 맛있는 냄새가 금세 퍼져나간다.
꼴꼴-.
덕윤이가 조심스럽게 따라온 술병을 기울여 내 잔에 한 잔을 채웠다.
짙은 보랏빛의 술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소, 소주가 아닌데?”
“복분자라고, 열매를 따서 증류주에 담가 만든 한국 전통 과실주야.”
굳이 남자의 정력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저 녀석의 눈빛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왜, 한 잔 줄까?”
“···크흠. 그럼 성의를 봐서 한잔만 하도록 할까.”
나도 나지만, 이 녀석도 참 애 같다.
* * *
붉은색의 스포츠카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드려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몰렸다.
입시 미술학원이 많은 홍대 거리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동시에 가장 시설이 좋기로 유명한 학원.
최근에는 이진의 조카로 알려진 이시연이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붉은색의 스포츠카.
“언니!”
“연희야, 나 기다린 거야?”
“응. 같이 들어가려고, 언니 오늘도 개인실 쓸 거야?”
“아냐, 오늘은 수업 들어가려고.”
“그래? 잘 됐다. 같이 앉자.”
거의 유일하게 살갑게 대하는 연희와 함께 건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시연은 어색하고 웃으며 그사이를 지나는데,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는 좋-겠네. 다른 사람들이야 죽든 말든 몬스터 나타나면 지켜주러 올 사람 있어서. 아, 그 전에 저기 검은 양복 입은 언니가 먼저 몸빵해주려나?”
아하하-.
명백히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저것들이 진짜!”
“연희야. 괜찮아. 아직 애들이잖아.”
“그러니까 더 열받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벌써부터 남 험담이나 하고··· 언니는 화도 안나?”
“뭐, 나라고 감정도 없는 줄 아니? 당연히 화나지.”
“그런데 왜 가만히 참기만 해? 언니 삼촌한테 말해서 저것들 확- 그냥. 그래, 얼마 전에 휴게소 동영상에 나온 진상 아줌마처럼 아주 손이 발이 되게 빌게 만들어버리면···.”
시연이는 그런 연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아주머니도 결국 자기 잘못을 시인하셨잖아. 저 애들도 언젠간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그거야 삼촌이 강하게 나갔으니까 그런 거지. 안 그랬어 봐, 아주 고소하겠다고 난리 쳤을걸? 그런 사람들 뻔하다고. 쟤들도 한 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아직 애들이야. 뭘 알고 저러는 게 아니잖아.”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다.
나름 홍대에서 가깝고 명문으로 유명한 여고에 다니는 아이들이고 교복을 입고 온 적도 시연이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저러진 않았는데, 함께 다니는 아이 중 누군가의 지인이 몬스터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돌더니 그때부터 저러기 시작했다.
황당한 건 그 누군가라는 게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다.
날조로 꾸며낸 피해자이긴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는 피해자가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삼촌이 잘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사람들 모두 각자의 원하는 삶이 다르고,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누군가는 운이 좋고, 누군가는 운이 좋지 않았을 뿐이지. 그 결과에서 누군가가 잘못을 한 게 아니지 않은가.
각성자가 된 사람도, 되지 못한 사람도 서로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
힘이 있는 자는 힘을 가졌단 이유로 힘이 없는 자를 지켜야 하나? 아마도 서로의 생각이 다를 것이고, 그 둘의 입장이 바뀐다면 생각도 바뀌게 될 거다.
결국 세상은 완벽하게 공평하지 않다.
“···아, 진짜 재수 없어.”
복도로 사라진 시연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누군가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선 뒤에 있던 다른 아이를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넌 거기서 뭐 해? 가서 물통이랑 팔레트 준비 안 할 거야?”
“어? 어어··· 지금 할게.”
“야, 못생겼으면 시키는 거라도 좀 잘하자. 응?”
“···미, 미안.”
친구 사이라고 보기엔 힘든 말이었지만 안경을 쓴 아이는 웃으며 교실로 향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난 쟤는 보고 있으면 답답해 죽겠어. 대체 넌 왜 저런 애를 데리고 다니는 거야?”
“아, 몰라. 우리 집 꼰대가 쟤랑 같이 안 다니면 용돈 줄인다잖아!”
“뭐야? 숨겨놓은 딸, 그런 거 아냐?”
“웩- 상상만 해도 토 나와. 우린 수업 전까지 카페나 가 있자.”
학생답지 않은 독설을 쏟아낸 아이들이 건물 밖으로 나가고, 어깨를 축 늘어트린 아이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인 교실로 들어섰다.
안에는 시연이와 연희가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12명이 듣는 수업.
수업 준비를 마친 시연은 스마트폰을 켜고선 한참 진행 중인 기자회견 실시간 영상을 보고 있었다.
미국에서 온 하밀 로넌이라는 헌터가 삼촌과 함께 악수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화면은 다시 스튜디오에 대기 중이던 앵커에게 넘어왔다.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되겠지?’
그러기 위한 기자회견이었으니까.
오늘의 공식적인 발표로 헌터 연합이 본격적인 연계 업무에 돌입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 성적이 좋은 이들은 실전 훈련을 겸해 게이트 공략에 투입되기 시작하면 확실히 희생은 줄어들겠지.
“와···. 언니는 이거 알고 있었지?”
“대강만. 삼촌도 나한테 다 이야기해 주는 건 아니라서.”
“헌터 연합 의장이면 엄청 높은 거 아니야? 앞으론 유엔 같은 데보다 훨씬 더 커질 거라고 하던데.”
“삼촌은 그냥 이름만 의장이고, 실무는 하밀 로넌이란 사람이 다 한대.”
“그럼 그거네, 비선 실세!”
그건 둘의 지위가 바뀌어야 성립이 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시연은 그냥 웃는 걸로 마무리했다.
“···쟤는 왜 혼자서 6명분 수업 준비를 다 해?”
“언니, 몰라? 쟤 아까 그 싸가지 없는 것들 친구잖아.”
“친구라고?”
“말이 친구지. 그냥 하인처럼 부려먹더라. 한 마디로 왕따지, 왕따.”
시연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침없이 다가가 아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꺅- 갑자기 뭐에요. 아아··· 이거 어떡해. 현정이가 보면 또 화내겠네···.”
엎어져 버린 물통에 젖어버린 캔버스를 보며 울상을 짓는 아이.
시연은 미간을 찡그리고선, 물통을 주우려 다시 허리를 숙이는 아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를 향해 물었다.
“···각성자면서 왜 이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