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22화.
슥슥-.
짙푸른 물감을 잔뜩 머금은 붓이 거친 캔버스 위를 거침없이 누볐다. 붓을 쥐고 있는 시연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고, 눈빛은 영롱하다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로 빛을 뿌렸다.
“···와. 저 언니, 집중력 진짜 장난 아니다.”
“가끔 저래.”
“가끔만?”
“응. 평소엔 우리랑 별로 다를 것 없는데, 가끔 저런 눈을 하면 정말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모를 정도라니까?”
“뭘 그리는 걸까?”
혼자만 오롯이 사용하는 1인실.
유명한 학원인 만큼 다니는 학원생들 모두가 제법 부잣집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래도 1인실을 저렇게 마음 놓고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건 모르겠지만, 딱 봐도 뭔가 엄청난 걸 그리는 것 같긴 하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릴 때 저런 눈빛이지 않았을까? 물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진짜 뭘 그리는지 궁금해 죽겠다니까?”
최첨단 기술을 죄다 동원해 완벽한 방음에 물감에 영향이 갈 수 있는 습도, 온도는 물론 빛의 반사각까지 신경 써서 만든. 그야말로 그림을 그리기에 최적화된 방.
그 안에서 붓 터치 하나에 온 신경을 쏟은 미녀의 모습은 그 공간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보여달라고 하면 안 되려나? 너 저 언니랑 꽤 친하잖아.”
“친하긴 하지. 나 작년에 크리스마스 파티 때도 초대받았는데?”
“진짜? 그럼 그 사람도 만나봤어?”
“만나다 뿐이야? 같이 찍은 사진도 있고 식당에 자주 놀러 오라고도 하셨는데.”
“부럽다! 근데 진짜 그렇게 잘 생겼어?”
나연희는 친구의 부러움이 담긴 눈길을 은근히 즐기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 번 가볼까? 근데 막상 가면 사람들이 인사도 제대로 못 한다던데.”
“원래부터 드나들던 사람들 아니면 식당 가기 전에 서약서까지 써야 한다더라. 그 안에서 보고 들은 걸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래.”
“소문이 진짜였어?”
이야기의 주제가 어느새 한참이나 빗나가고 있었다.
“근데 시연 언니랑 같이 가면 그럴 일 없을걸?”
“그림 보여달라고 하면서 좀 친해져 볼까?”
“아무리 그래도 아마 저 그림은 절대로 안 보여줄걸? 다른 때 그린 건 보여주는데, 저런 표정으로 그린 그림은 아무한테도 안 보여줘.”
“대체 뭘 그리는 걸까?”
“모르지···. 어, 끝나가나 보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니 영롱하게 빛나던 눈이 아주 천천히 평범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신비하기까지 한 모습에 지나던 사람들도 잠시 넋을 잃고 가만히 쳐다봤다.
후우-.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에요. 삼촌···.”
방에 있던 시연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림을 쳐다보고 있으니 없던 걱정도 생길 판이다.
캔버스엔 온통 푸른색으로 물결치는 거대한 게이트가 빌딩 숲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게이트 아래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연이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게다가 이번엔 지난번의 그림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었다.
건물 꼭대기에 걸린 전광판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시간.
‘이게 맞는 거면··· 앞으로 반년도 남지 않았다는 소린데···.’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연이 고개를 들고선 눈을 감았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될까. 게이트의 크기나 수, 그 밑에서 있는 사람들만 보더라도 심상찮은 일이라는 건 너무나 명확하다.
“···왜 하필 저한테 이런 능력을 갖게 하신 건가요.”
누구인지 모를 이를 향한 원망.
시연은 자신에게 생긴 이 능력이 너무나도 싫었다.
* * *
강렬하게 타오르는 붉은색으로 코팅되어 반짝이는 스포츠카가 도로를 달렸다.
보닛에 말 로고가 선명한 차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히 몰렸는데, 그저 차가 멋진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 추운 겨울에 오픈카라니, 제정신이 아니네.”
“차보다 운전하는 남자 얼굴이 더 멋있는데?”
“쳇. 보나 마나 어디 재벌 집 아들이겠지.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좋겠다.”
“저 얼굴이면 흙수저라도 금수저처럼 보이겠다.”
“옆엔 여자친구인가? ···부럽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진짜 무슨 짓을 해도 이길 거 같지가 않다.”
시기와 질투, 순수한 부러움까지 있지만 정작 시은이와 도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나선 둘만의 데이트.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 신경 쓰기엔 지금 이 시각이 너무 소중했으니까.
“그런데 시은아. 학장님한테는 정말 허락받은 거야?”
“다, 당연하지. 오빠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삼촌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야.”
“···정말?”
“······그럴걸?”
시은이의 떨리는 목소리와 동공을 봤지만, 도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저게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두렵긴 하지만 지금 이 행복이 그 모든 걸 덮을 정도로 즐거웠다.
“앞에 휴게소다. 들릴까?”
“당연하지!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먹는 재미인데. 무조건 고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핀잔을 주는 시은을 보며 도진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과연 또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드는 표정으로.
차가 휴게소 주차장에 들어서자 또 자연스레 모이는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먹거리 코너로 향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굴림 감자와 핫바, 소떡소떡까지 야무지게 양손에 들고서 차로 향하는데 도진의 시선이 어딘가로 자연히 돌아갔다.
“오빠, 왜 그래?”
“···뭔가 조금 이상해서.”
“이상하다니, 뭐가?”
최고의 공부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말을 도진은 최근에 상당히 실감하는 중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다 보니 자연히 자신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그 누구보다 더 많은 개인 훈련을 하는 건 다름 아닌 서도진 본인이었으니까.
이루가 바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막히는 게 있으면 언제든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찾아가 물어본 덕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많은 성취가 있었다.
그리고 신체 강화 능력자가 취약하다는 마력 감지도 최근에는 상당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지금 날카롭게 어딘가를 향해 경고를 해오고 있었다.
“···시은아, 일단 건물로 들어가.”
“갑자기 왜 그래? ···설마 게이트가 열린 거야?”
“아냐, 게이트가 열렸으면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바로 실시간으로 경보 문자가···.”
삐익- 삐익-.
말을 채 다 끝맺기도 전에 주변에서 울려대는 경보음.
“···왔네. 시은아, 얼른.”
“오빠는, 오빠는 어쩌려고?! 설마 거기로 가려고?”
도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시은이가 홍대 게이트 사건 이후로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그래서 오늘만큼은 정말 아무런 사고도 없길 바랐는데.
“미안해. 그래도··· 명색이 아카데미 교수인데, 숨어있을 순 없잖아.”
“오빠··· 나, 싫어···.”
“괜찮아. 다시는 너 마음 아프게 안 해. 오빠 믿지?”
“믿어, 믿지만···.”
“시은아.”
“요즘은 경보 울리면 곧바로 헌터 부대가 출동한 데. 굳이 오빠가 아니어도 되잖아. 응?”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진은 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 운용되는 헌터 부대는 스포츠로 따지면 2부 리그 선수들이나 다름없다.
게이트가 열리면 희생이 따르는 건 필연적인 사고에 가깝다는 걸.
전 세계에서 실력 있는 이들은 이후 나타날 더 심각한 게이트와 몬스터에 대비하기 위해 대부분 아카데미에서 훈련 중이다.
어쩌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중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게이트 생성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현재 휴게소에 계신 모든 인원은 건물 내에 마련된 대피소로 즉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현재 게이트 생성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빠른 대처는 분명하다.
아마 이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빠른 대피령과 대응을 할 수 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늦는 게 있는 법이다.
퀴에에엑.
캬아악!!
주변에 있는 거라곤 왕복 8차선의 고속도로와 휴게소 건물뿐. 가까이에는 민가라곤 없어 보이는 곳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다.
건물도 장애물도 보이지 않고, 있는 거라곤 그저 나무들뿐인 장소에서 인간을 적대하는 몬스터들이 갈 곳이라면 너무나 뻔하다.
‘군 헌터 부대가 오려면 적어도 10분.’
대 몬스터용 대피소는 제법 튼튼하게 지어졌지만 그래 봐야 두꺼운 철문이나 콘크리트로 지어졌을 건 너무 당연하다.
어지간한 몬스터라도 휘두르는 것만으로 철근을 나무젓가락처럼 부러뜨리는 것들에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시은아, 오빠 이제 강해. 예전이랑은 달라.”
“그래도 싫어. 싫단 말야. 그냥 같이 대피소로 가자. 응?”
소매를 붙잡은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는 게 도진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여자친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고개를 돌리면 아마도 평생 죄책감에 살 게 되겠지.
‘내가 아니라··· 시은이, 네가.’
지금이야 도진이 다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지만,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얼마나 큰 실망을 하게 될까. 자신의 이기심에 경멸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건 꽤 오랫동안 시은을 괴롭히게 될 거다.
“약속해. 절대 다치지 않아. 다치기라도 할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 약속?”
“그럼.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랑 가는 첫 여행인데, 나도 절대 놓칠 생각은 없거든?”
“치이···.”
도진의 넉살에 시은은 울먹이면서도 피식 웃어버렸다.
시은이 거의 마지막으로 들어가고 닫히는 육중한 철문을 마지막까지 웃으며 바라보던 도진의 표정이 표정을 굳히고 등을 돌렸다.
‘어떤 놈들이냐···. 강하고 차라리 숫자가 적은 게 좋은데.’
숫자가 많아지면 아무리 도진이라도 모든 방위를 커버할 수 없다. 분명 뒤로 새어 나가는 녀석들이 생겨날 테고, 그러면 일반인들이 위험해지는 건 너무 뻔하다.
각성했지만, 신체 강화와는 거의 인연이 없는 시은이도 그 안에 포함될 테고.
* * *
비좁다 싶을 정도의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다행히 모두가 피신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주말 오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천만다행인 상황.
그리고 그 안쪽에는 바깥 상황을 보여주는 모니터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일단 한 번 닫히면 바깥에서는 열 수 없는 구조라 안에서 상황을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곳.
“잠깐··· 저 사람은 왜 안 들어와요?”
“어? 저 남자, 저 아가씨 남자친구 아니었어?”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고, 시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기 봐!”
“···헌터?! 저 사람 헌터야!”
화면에 잡힌 남자가 허공에서 거대한 검을 뽑아 드는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살았다! 살았어!”
“···잠깐, 근데 왜 혼자지? 설마 부대가 온 게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휴게소에 있었을 뿐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드드드-.
2m 두께의 콘크리트로 지어진 대피소가 작게 진동을 시작했다.
아주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은 사람들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으아아앙!
엄마아!
신이시여,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옵시고···.
공포에 잠식된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고,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에서 퍼지기 시작한 두려움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몬스터 대책을 잘하고 있는 국가로 단연 한 손에 꼽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루가 멀다고 들리는 사망자와 재산 피해는 주말임에도 휴게소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현저히 적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화면을 보는 사람은 적었다.
아무도 그가 도로 건너편에서 새까맣게 밀려들기 시작하는 몬스터를 단신으로 막아내리라곤 기대하지 않는 듯한 모습들.
도진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이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치기만 해봐라.”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