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120화 (120/153)

귀환자 식당 120화.

고요했다.

숨소리는 물론이고, 눈꺼풀을 깜박이는 소리가 들린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한 공간.

시간조차 사라진 듯한 공허함 속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라곤 오직 하나.

손을 잡고 있는 옆 사람의 온기뿐.

- 그곳에선 절대로 손을 놔선 안 돼.

어딘가로 보내기 전, 라미야 교수가 자신들에게 건넨 딱 하나의 경고이자 당부였다.

어떤 곳인지 어째서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지 물을 시간도 없었다.

본인이 숨을 쉬고 있긴 한가? 그보다 이곳에 공기라는 게 존재하는 것인가? 마주 잡은 손에서 미약한 떨림이 전해진다.

누구였지? 내가 누구의 손을 잡았지? ···나는 누구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느낄 즈음.

다시 환한 빛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태어나면서 빛을 처음 마주한 태아가 된 기분.

“···교수님? 여기는···.”

처음 게이트를 들어가기 전, 조원들과 함께 화이팅을 외치던 장소.

대마도 아카데미의 제 4체육관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들어갈 때와는 달리, 주변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것.

“학장님? 학장님이 어째서 여기에···.”

물으면서도 이미 답은 알고 있었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은 그걸로 마지막이었다.

“···감사합니다.”

죽음의 직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순간이었지만 돌아왔다.

지금은 그저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 * *

21조가 머무는 숙소.

작은 여관을 개조한 곳의 뒷 마당에 9명이 각자의 방식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대체 거긴 어디였을까?”

“몰라··· 하지만 장담하는데, 절대로 게이트 안의 공간은 아니었어.”

“그건 나도 동감. ···그런 말도 안 되는 괴물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진 않으니까.”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종의 아공간 같은 거 아닐까?”

“아공간?”

“그래. 라미야 교수님은 공간 조작 능력자잖아. 일종의 가상 공간을 만들어서 우리를 보낸 거 아니냐는 거지.”

모두가 떠올려본 생각이긴 했지만, 확신이 없어서 꺼내지 못했던 말.

하지만 모두 부정은 하지 못했다.

일주일간 주어진 휴식 시간.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마음편히 쉬지는 못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지긴 했지만, 아침 체력 단련을 빼먹지도 않았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곤.

“그건 그렇고. 네이트, 테린은 어때?”

“···여전해. 나도 만나주질 않아.”

돌아온 뒤로 방안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

오른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잘려 나간 테린은 식사도 잠도 잊은 채 오직 창가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밥은?”

“···전혀. 밥은커녕 물도 안 마시는 것 같아.”

“아무리 각성자라도 며칠이나 물도 안 마시곤 죽어!”

네이트가 괴로운 듯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미치겠다고! 하지만···. 블랙 선생님도 방법이 없다는데,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냐고!”

“···솔직히 우리 모두 알고 있었잖아. 잘려 나간 팔이라도 찾았으면 모를까, 테린이 도마뱀이 라도 되는 게 아닌 이상 사라진 팔을 만들어내는 건 신의 영역이야. 치유 능력으로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라고.”

“의수는? 요즘은 신경을 연결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들도 많다고 하던데?”

“그런 걸 달면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곤 했어. 하지만 테린은 각성자야. 의수에는 마력이 전달되지 않으니까···.”

“···헌터는 불가능한 거구나.”

다른 능력도 아닌, 신체 강화 능력자가 주로 사용하는 오른팔을 잃었다는 건 총알이 떨어진 총이 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테린에게는 그야말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잠깐만.”

누군가의 말에 다른 8명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기억나? 서도진 교수님 있잖아.”

“···갑자기 서 교수님이 왜?”

“기억 안 나? 예전에 라이프 베슬이 훼손돼서 죽을 뻔했는데, 누군가가 살려줬다고 했던 말.”

홍대에서 도진이 보여줬던 활약은 지금 아카데미 생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이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진은 이들에게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는 존재니까.

“그러니까 그게 어쨌다는 건데.”

“블랙 선생님도 깨진 라이프 베슬은 절대 치유할 수 없다고 했어. 한 번 훼손되면 절대 고칠 수 없다고 했다고.”

“···그랬지.”

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그럼 그땐 누가 고친 거지?”

“몰라. 하지만, 만약 그게 누군지 알아내면 혹시나 테린의 팔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되지도 않을 희망만 가지게 했다가 또 안 된다고 하면 그땐 헌터가 문제가 아니게 돼버려. 테린의 삶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테린에겐 헌터가 되는 게 곧 삶이었어. 지금 이대로 두는 것보단 뭐가 되든 시도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누군가는 반대를 하고, 누군가는 찬성했다. 각자의 의견이 부딪히며 뒷마당이 시끄러워질 무렵. 네이트가 손뼉을 쳐 주위를 환기했다.

“자자, 일단 우리끼리 이야기한다고 되는 게 아냐. 먼저 서 교수님한테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게 먼저라고. ···하고 안하고는 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그런데 교수님이 알려주실까? 그 수업 시간에도 다른 애들이 물어봤지만,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하셨잖아.”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렸잖아. ···알려달라고 해봐야지.”

“그래. 물어라도 봐야지!”

그렇게 약속이나 한 듯, 9명이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내가 남자친구니까, 내가 가서 물어볼게.”

“남자친구는 빠져. 난 테린의 베스트 프렌드니까 내가 갈게.”

“서 교수님과는 내가 제일 친해. 너희라면 몰라도, 나한테는 알려주실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다 빠져. 임시 조장인 내가 가는 게 맞아!”

이번에는 누가 가서 묻느냐를 두고, 다시 한번 언성이 높아졌다.

* * *

식당에 신주희 박사가 찾아왔다.

“선생님, 꽤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건강하셨죠?”

“저야 늘 그렇죠. 그런데 혼자서 온 건 처음 아닌가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정민이가 데리고 오지 않고 혼자서 찾아온 건 처음인데.

“같이 오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지금 어떤 사진 때문에 정신이 없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사진 찍는 걸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가봐요?”

그 말에 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뭐··· 거래의 일부였으니까요. 정민이도 이해할겁니다.”

“저야 상관없죠. 정치는 제 관심사가 아니니까. 알아서 잘 하겠죠?”

“저도 한국 정부를 믿습니다.”

“그래서··· 정말 여기 와 있는 건가요?”

“네. 지금은 주방에서 양파 손질하고 있죠.”

풋.

신주희 박사가 내 말에 작게 실소를 터트리며 흥미를 보였다.

“정말 믿기 힘드네요. 그··· 김태영이 양파를 다듬는 모습이라니, 구경하고 싶지만 참아야겠죠?”

그 말에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였을 뿐.

“그래서, 혼자서라도 찾아올 만한 이유는 뭔가요?”

어지간한 일이었다면 혼자서 오진 않았을 것 같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다. 실제로 지금 그녀의 표정도 빨리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 난 듯한 상태고. 그러니 물어봐 줘야지.

“아마 들으면 놀라실걸요. 제가 게이트의 엄청난 비밀을 하나 풀어냈거든요.”

“···비밀이라면?”

“궁금하지 않으셨어요? 게이트를 통과해서 가는 곳이 도대체 어디일지.”

궁금하다.

하지만 글쎄, 너무 자주 들락거려서 그런가. 언젠가부터 그곳이 ‘어디’인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안게 됐었다.

그리고 사실 조금은 예상이 갔기도 했고.

“어디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인지가 중요한 거겠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생글거리던 신주희 박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 알고 계셨어요?!”

“아뇨. 그냥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뿐입니다.”

“···그럼 진작 좀 알려주시지. 전 나름 엄청난 발견을 한 거라고 기뻐했는데···. 그래서 처음 알려드리고 싶어서 온 거란 말이에요.”

“말했듯이 그냥 짐작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박사님은 아마도 증명할만한 무언가를 찾은 거겠죠. 지레짐작을 하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증명은 차원이 다른 거죠. 박사님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내 말이 조금 위로가 되었을까.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며 옅은 미소를 되찾았다.

···얼굴은 왜 붉히는지 모르겠지만, 기뻐한다면 그걸로 됐겠지.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저 직감만은 아니었습니다. 게이트에 들어가면 간혹 눈에 익은 지형을 보기도 했으니까요.”

“대단한 눈썰미네요. 적어도 수만 년은 차이가 있었을 텐데.”

“···수만 년이요?”

언젠가 기억은 확실히 나지 않지만, 게이트에서 거대한 폭포를 본 적이 있었다.

수백 미터에 걸쳐 짙은 안개를 뿜어내던 폭포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었다고 해야 할까? 아마 당시에 나와 함께 게이트를 들어갔던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입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 폭포를 보던 헌터들의 눈에는 모두 같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으니까.

왜 나이아가라 폭포가 여기 있지? 하는. 그런 표정들.

“그 뒤로도 게이트 안에서 거대한 자연경관을 보면 저도 모르게 지구의 것들을 떠올려보곤 했었죠. 그런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요. ···수만 년이나 차이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지만요.”

“사실 정확히 언제인지까지는 알 수 없어요. 아시겠지만 사실 게이트에선 전자기기가 작동이 되질 않았잖아요. 그래서 사진이나 영상 같은 게 전혀 없었죠.”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몬스터의 존재가 지금처럼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화면을 보며 약점을 분석하기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됐을 테니까.

“하지만 얼마 전 삼영그룹에서 새로 개발해 냈어요. 마석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장비 덕분에 게이트 내부의 영상을 촬영해서 지형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답니다.”

“그건 굉장한데요.”

“고, 고마워요. 저야 그저 분석을 한 게···.”

“그 기계요. 혹시 저도 볼 수 있습니까?”

입술을 삐죽인 신주희 박사는 내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래서 내린 결론이 게이트 안은 지구라는 거에요.”

“그럼 수만 년 후의 미래라는 말입니까?”

몬스터가 미래에서 보내는 괴물이라면 더 이상하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아뇨.”

너무나 확신이 가득 찬 목소리.

미래가 아니라면 과거라는 소리인가? 하지만 게이트를 만들 기술력이 과거에 있었다는 건 말이 되질 않는데.

혹시 내가 모르는 초고대 문명 같은 걸까? 하지만 그 궁금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과거도 미래도 아니에요. 어떤 사건으로 인해 갈라져 나간 다른 시간축. 그러니까 즉, 우리가 사는 지구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지구인 거죠.”

“···그럼 수만 년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저쪽의 시간 개념과 이쪽의 시간 개념이 전혀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거죠. 선생님이라면 제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텐데요? 30년과 3개월의 차이를 직접 경험하셨잖아요. 게이트가 바로 그 흐름을 조율하는 거예요. 통과하는 순간, 원래 시간대로 돌려놓는 거죠.”

신주희 박사의 말은 새삼 놀라운 내용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방금 내가 한 말처럼 짐작하는 것과 그것이 증명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니까.

“어떤 사건이 흐른 뒤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간이 1년이 흐르는 동안, 저쪽에서는 6개월밖에 흐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그건 알겠습니다. 그럼 저쪽 세상의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흐른다는 겁니까?”

고작 3개월이 이곳에서는 30년이 흘렀을 정도로?

하지만 신주희는 고개를 저었다.

“느린 곳도 있지만, 빠른 곳도 있어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제 말은, 그런 지구가 하나가 아니라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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