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106화 (106/153)

귀환자 식당 106화.

남북출입 사무소를 지나는데 기분이 묘했다. 비록 개인으로는 제법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맞지만, 국가적인 분쟁에 개입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일반인의 신분으로 북한에, 그것도 회담의 가장 중요한 인사로 참여하게 됐으니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기분이 묘하시죠?”

“응?”

“같은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 이렇게 분단된 국가에 살아서 서로를 찾아갈 수도 없다는 게··· 오히려 외국인들은 북한으로 여행도 갈 수 있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우스운 일이죠.”

그래서 그런가? 내 조상 중의 누군가는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갈 수도 없는 곳에서 살았을 수도 있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제법 잘 정비된 도로를 따라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이 지나가는 길에 간간이 논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겨울에도 농사를 지을 일이 있나?”

“아··· 북한은 아직도 겨울이면 보리를 심어야 식량 조달이 가능하거든요. 덕분에 지력이 약해져서 쌀도 수확량이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되죠. 저기, 연기가 올라오는 곳 보이시죠? 비료가 부족해서 아직도 저렇게 짚이나 나뭇가지를 태우는 경우도 다반사고, 분뇨로 비료를 대체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이곳에서는 일상적이다. 더 놀라운 건,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거다. 평양을 지나 위로 갈수록 상황이 더 심각하다니··· 나로선 그게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잘 되질 않는다.

“잠깐, 저건 게이트인데? 왜 갑자기 이런 곳에 게이트가 있는 거지?”

사람들이 일하는 사이로 게이트가 보였다. 분명 봉인이 된 상태긴 하지만 저건 어떻게 보더라도 그저 ‘방치’된 상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산간 지역이면 몰라도 이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정민이의 설명이 이해를 돕는다.

“북한에도 미연씨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 평양 근처는 저런 식으로 게이트를 봉인하고는 있지만 그것도 위쪽으로 갈수록···.”

대체 그러면 여기보다 더 위쪽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 거지? 아니, 그런 곳에서 살 수는 있는 건가? 설마, 무슨 소설책에 나오는 것처럼 조금만 외진 곳으로 나가면 갑자기 몬스터들이 튀어나오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건가.

무서워서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나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어서 오라고 했던 건가?”

“그럼 설마 선생님의 동정심을 얻으려는 생각이었을까요? 그런거라면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을···.”

정민이가 이어서 무슨 말을 하려다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내가 평소에 그리 냉정하게 굴었던가? ···아주 아니라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차가운 사람인가?”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냉정하셔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동정심이 생기는 것보다 오히려 괘씸하게 여기시는 분이잖습니까.”

날 아주··· 잘 파악하고 있잖아? 하긴 내 옆에서 지켜본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니 알 만도 하지.

그래도 시내로 들어서자 내 생각보단 꽤 발달한 도시가 펼쳐졌다. 내가 너무 오래전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는 건가?

평양의 거리는 서울처럼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사진으로 봐서도 느껴지던 황량함은 없었다. 나름 발전을 하기는 했구나 하며 감상에 빠져 있는데.

끽-.

“뭐야?”

“아, 차장님. 그게 앞차가 갑자기···.”

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며 멈춰섰다. 이게 말이 되나? 지금 나는 비록 정민이와 함께 차를 타고 있지만, 내 앞으로는 통일부 장관이나 외교부 장관이 탄 차도 있다. 무엇보다 회담장으로 가는 도로 전체가 통제되고 있는 상황인데 갑자기 설 이유가 있을 리가 없지.

“선생님, 잠시만 안에 계십시오. 제가 바로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정민이가 다급히 차에서 내려 상황을 파악하러 간 직후.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도로 바닥이 시야에서 살짝 멀어지며 부양감이 느껴진다.

차와 함께 동시에 떠오른 거다. 이건 나한테도 제법 익숙한 느낌이라 무슨 상황인지 바로 파악했다.

이거 지금 내가 타고 있는 자동차째로 공간 이동을 하는 건데?

···나 지금 납치당하는 건가?

웃긴 건, 한국에서부터 운전하고 기사와 경호원으로 탑승한 국정원 요원은 이미 이런 사태가 일어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침착하단 거다. 국정원에서 알고 있었다? 아니면 이 두 사람이 간첩이든가.

이런 공간 이동쯤이야 거부하려면 충분히 거부할 수 있지만, 살짝 호기심이 생기네? 감히 나를 납치할 생각을 한 게 누군지. ···누구인지야 뻔하겠지만.

그래서 가만히 흘러가는 데로 놔두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날 따로 만나려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해서.

아주 잠깐의 눈부심이 사라지고, 생각했던 데로 내가 탄 차는 전혀 엉뚱한 곳에 내려섰다.

허름한 창고? 아니, 창고라기보다는 어딘가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

달칵-.

황송하게 차 문까지 열어주시니 공주님이라도 된 기분이네. 기가 찬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는데, 기다리는 사람의 수가 생각보다 너무 조촐하다.

여기 있는 인원이 전부다 하밀이나 이루 정도의 실력자라고 하더라도 날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적어도 내 눈앞에 있는 남자라면 말이지.

“우선 이렇게 모시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전 김태영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정민이가 보여준 사진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한눈에 알겠다. 저자가 바로 지금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태영인가? 흠,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 생겼는데? 게다가 각성자다.

“김태영 씨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지도자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뭐든 편하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죠?”

누가 서로의 정보를 더 알고 있나 내기하는 자리는 아니지.

“보아하니 납치가 목적은 아닌 것 같고, 한국 정부에서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 그렇네. 한국 정부에서 이 사실을 모를 리 없고, 당연히 난리 정도가 아니라 회담이고 뭐고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장담하건대, 지금 북한은 한국의 공격을 막지 못한다. 아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무력 통일이 가능할걸? 그런데도 이런 짓을 벌인다니, 생각하니 더 이상한데.

···설마, 한국 정부와는 이야기가 된 건가? 안정민 이 자식, 그래서 차에서 내렸던 거야?!

“아마 당분간은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저희가 대리를 세워뒀거든요. 안정민 차장은 지금 다른 차로 이동 중입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발각되겠지만요···.”

음. 일단 날 속인 건 아니네. 정민아, 잠깐이지만 욕해서 미안하다.

그럼 이 두 사람은 뭐지?

“아, 그 둘은 저희 쪽 사람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겨우 국정원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한 요원이죠.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저희가 가진 최고의 패를 꺼내야 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수십 년간이나 이야기를 거부해 왔으면서 서로 간에 아직도 이런 간첩은 보내고 있었다니. 그저 놀랍다.

“그래.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중국의 감시망 밖에서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방법뿐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렇게 모시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시간이 없다지 않았나? 사과는 그쯤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계속되는 내 반말에도 김태영은 덤덤했다. 오히려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이 발끈했지만, 나서지는 않았다. 통제력이 약할 거로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 답답한 친구야. 그거야 이미 차에서 내린 직후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정확히 어떤 도움을 바라는 건가?”

“북한은 지금 중국의 속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래 전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것 처럼 말이죠.”

21세기에 그게 말이 되나?

···근데 이거 엄청 열받네.

* * *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이런 때를 위해 만들어진 건가. 내가 있던 곳은 황당하게도 회담이 열리는 호텔 건물의 지하 주차장, 그보다 딱 한층 아래 있는 곳이었다.

“저희 둘은 선생님을 모셔다드리고, 자수하겠습니다.”

“뭐라고? 간첩이니까 잡아가라고?”

“···네.”

어려서부터 말 그대로 뼈를 깎는 훈련을 마치고 겨우 이곳에 올라왔을 텐데, 겨우 이런 임무 하나 끝내고 평생을 타국의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 건가?

“차라리 이참에 한국에 망명하는 건 어때?”

안타깝기보단 오히려 그편이 살기 좋지 않나 싶어서 물었던 건데.

“하하··· 그럼 북에 있는 저희 가족은 모두 죽은 목숨입니다. 그냥 저 혼자 한국 교도소에 가는 게 백 배는 낫죠.”

교도소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그 안에서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을 것 같지는 않은데.

정말 이대로라면 간첩 의혹 같은 게 아니라, 확정인데다 모든 사실을 자백해야 한 뒤라 같은 제소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따돌림을 받게 될 거다.

이것도 인연인데 내가 나서서 도와줘? 김태영에게 쪽지라도 하나 건네주면 아마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법은 법이지.

두 사람이 안 된 건 맞지만, 간첩죄를 지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통일이라도 되면 모를까.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안정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갑자기 탑승 차량이 변경되서 죄송합니다. ”

“···안 놀라네?”

“네?”

“아니, 그보다 게이트는 어떻게 됐어?”

“역시 북한에도 미연 선생님과 비슷한 능력자가 있었습니다. 꼭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지 뭡니까. 하하-.”

설마 북한에서도 게이트를 열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건가? 최우혁이

“제가 놀라야 하는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이건 정민이가 잘못한 건가, 북한 애들이 일을 너무 잘한 건가.

“됐다.”

“···왜 그러시는데요? 네?”

“아, 됐다고. 회담은 언제 시작한대?”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회담은 1시에 시작한다고 하니까요.”

“···그래. 밥이나 먹자.”

여기가 금강산은 아니지만, 회담도 식후에 하면 좋지 뭘.

“차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뭔데, 급한 거 아니면 돌아가서 하지?”

입술을 질끈 깨무는 두 녀석.

“저, 저희가 사실은!”

···에이, 젠장.

이대로 두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지, 진짜 다른 뜻은 없다.

죄를 지었으면 받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내 앞에서 그러진 말라고.

“쟤들은 평양냉면이 먹고 싶데.”

“네?”

“아, 오면서 그러더라고. 평양냉면이 꼭 먹고 싶다고, 근데 네가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다는 거야.”

“제가 그렇게 어려운 상사는 아닌데···. 하지만 평양냉면은 어려울 겁니다. 오찬이 예정되어 있어서요.”

“···오찬? 그런 거 딱 질색인데.”

밥은 편하게 먹어야지.

나야 그런 자리에 가서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다.

산해진미가 있어도 그걸 먹는 마음이 불편하면 결국엔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니까.

“그냥 난 안 간다고 해.”

“···네?”

어차피 중요한 안건이야 함께 온 정치인들이 할 일이고, 나야 그저 회담에 참석해서 몇 마디 해줄 생각으로 온 것뿐이다. 반쯤은 협박의 의미도 있었긴 하지만.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는 이미 오늘 여기 오기 전에 볼 일은 다 끝난 셈 아닌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여기서 할 일은 이제 없는 셈이지.

잠깐 자유행동 좀 한다고 안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평양냉면을 먹고 싶다는 건, 내 본심이기도 하고.

이런 날이 아니면 내가 언제 평양에 와서, 평양냉면을 먹어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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