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104화 (104/153)

귀환자 식당 104화.

하밀은 모두가 멍해진 시간에서 돌아오길 잠시 기다렸다.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 건 자신과 같을 테니까.

“자, 잠까···.”

“뭐야! 그럼 8개가 구슬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심지어 호수가 아니라 푸른 물결? 그거 설마···!”

“구슬의 주인이라는 건 뭔데? 빛의 어쩌고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거야.”

완전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푸른 물결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푸른 물결이란 게 만약 최후의 게이트를 말하는 거라면, 설마··· 그런 게 앞으로 7번이 더 나타난다고?”

하, 미쳤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시연이는 지금 이야기의 내용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는 알아챘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지구 최강의 헌터임에도, 두려워하고 있다는걸.

주변을 감싸던 빛이 사라지고,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들어가 버려서 화가 난 건지, 모두 표정이 좋지는 않지만,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된 거겠지?

“···화 난 거야?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네스티는···.”

“그런 게 아냐. 진.”

그런데 왜 표정들이 그렇게 엉망인 건데, 언제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왔는지 그나마 하밀의 표정이 제일 무난해 보이네.

“인터뷰는 잘했냐? 내가 나중에 다 체크할 거야. 쓸데없는 소리 했기만 해.”

지금보다 더 터트릴 게 남아있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저 녀석이라면 또 무슨 말을 해서 내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지 모른다. 늘 예의주시하면서 경고를 보내야지.

“···다들 표정이 왜 이런 거야?”

“너라면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진. 너는 리안의 예언이 조금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지?”

“그야 다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처음부터 맞는 게 하나도 없었잖아. 이미 다 끝난 이야기를 가지고 왜 또 이러는 건데.”

하밀 녀석이 무슨 말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일단 사실 확인이 먼저. 내가 지금 본 것과 결투장 녀석의 말을 알려주면 궁금증이야 해소되겠지만 패닉이 올지도 모른다.

이들은 알 자격이 충분하지만 아직은 이르다. 준비를 해두고 알려도 늦지는 않겠지.

“···정말 몰랐나? 호수라는 게 게이트를 말한다는 걸, 8개의 구슬 조각이 아니라 8개의 게이트를 의미한다는 것도.”

“뭐? 정말 그런 의미였어? 와아.”

음, 너무 영혼이 없었나. 나는 정말 연기는 젬병이네.

“정말 몰랐던 건가.”

···속아줘서 고맙다. 하밀.

하지만 정말 모르긴 했다. 리안이 남긴 예언이 8개의 구슬이 아니라 게이트를 말한다는 건 말이지.

‘여덟 세계의 지배자들.’

아니지. 정확하게는 8개로 갈라져 나간 각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자들.

네스티는 그중 한 명의 후신인 셈이다.

원래의 법칙대로라면 이미 소멸했어야 하는 다른 세상의 지배자.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의 라이프 베슬을 우리가 가지고 돌아오면서 네스티는 이 세상에 속해버리게 된 셈이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세상의 지배자. 네스티는 라미야가 가졌던 작은 조각의 힘에서 태어난 존재. 만약 지금 내 인벤토리에 있는 코어. 아니, 이제는 라이프 베슬이라는 게 확실해진 것을 오롯이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네스티는 네스티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건가? 아니면 지금의 네스티가 더욱 강한 존재가 되는 건가.

‘애초에 세상은 왜 8개로 나뉜 거지?’

각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자. 즉, 왕이다.

결투장이라 밝힌 녀석은 날 인간의 왕이라 불렀다. 그 말은 내가 이 세상의 지배자라는 건가? 만약 내가 죽으면··· 네스티가 그렇듯, 후계자가 태어나는 건지. 아니면 세상이 소멸하는 건지.

잠깐 사이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네스티가 게이트를 닫을 수 있다는 것과 지금 당장 인간을 적대시하지는 않는다는 것.

“아무튼, 오늘 이후로 네스티에 대한 의심은 접어두길 바래.”

“게이트를 닫을 수 있는 건 맞고?”

“일단은. 그게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을 충전한다고 했지. 흡수가 아니라, 충전. 그 말은 네스티가 가질 수 있는 전체 마력량이 지금보다 훨씬 크다는 이야긴데···.

‘이곳에선 충전이 안 된다는 소리인가?’

“선생님. 잠시만요. 그러면 네스티 군은 아카데미가 아니라 차라리 게이트 관리국 소속으로 두는 게···.”

“정민아. 그럼 쟤 혼자 그 낯선 곳에 보내라고?”

다시 태어난 이후 라미야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아이다. 태어났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음, 그럼 비상시에라도···.”

무슨 마음인지는 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세상에 네스티처럼 게이트를 혼자서 닫을 수 있는 능력자의 가치는 엄청나겠지. 미연이처럼 그저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걸 지연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건 정말 엄청난 능력이니까.

“비상시라면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낫겠지.”

오늘은 고작해야 E등급의 게이트였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다. 게이트 관리국에서 ‘비상시’라고 할 정도라면 어지간한 마력탄 무기들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소리인데, 과연 그 정도 등급의 게이트까지 가능할지는 아직 더 확인해봐야 하는 문제다.

결국 네스티도 아직은 더 성장해야 한다는 말.

그게 아카데미에서의 교육을 통해서든, 아니면 게이트 안에서 충전이라는 걸 어느 정도 한 뒤든.

“···좀 자란 거 같은데?”

“뭐?”

“네스티 말이야.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보다··· 봐, 옷 소매가 짧아졌잖아. 바짓단도 그렇고.”

라미야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자랐다. 6살 남짓으로 보이던 아이가 이젠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자란 걸 몰랐던 내 눈이 이상한 거였지.

···충전이라는 게 그런 의미였나?

* * *

주방에 서니 조금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새해가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몇 달은 지난 느낌이랄까.

“삼촌, 밖에 눈 와요!”

가게로 들어오던 시은이의 밝은 목소리.

“그래?”

라미야 덕분에 올 때는 헬기가 아니라 공간이동을 이용해서 가게로 바로 들어온 탓에 그것도 몰랐네. 아니면 조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건가?

“근데 왜 가게에 계세요? 오늘 설날이라 가게 안 연다고 하셨잖아요.”

“그냥···.”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서랄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시은이한테 할 필요는 없겠지.

“가서 인사는 잘 드리고 왔어?”

시은이야 워낙에 곰살스럽게 굴기는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아주 안 되지는 않네. 도진이와의 일이야 그쪽 부모님들도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 마음이 편할 리는 없을 테지.

“그럼요! 어머니가 떡국도 맛있게 해주시고, 세뱃돈도 주셨어요. 헤헤-.”

벌써부터 어머니라니, 갈 때만 해도 아줌마 아저씨라고 하더니···. 하긴, 그래도 남자친구 집에 인사를 가서는 아줌마라고 부르는 건 너무 정 없어 보이긴 하지?

뒤따라 들어오는 도진이 표정도 밝은 걸 보니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가 이거 학장님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

“응?”

이런, 나도 갈 때 두 사람 손에 뭘 좀 쥐여서 보냈어야 하는 건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미 지난 일. 언제 이런 걸 해봤어야 알지.

도진이가 금색 보자기로 싸인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데, 뭘 싸주신 걸까?

금색 보자기라 그런가 왠지 더 정감이 가는데.

“이건, 반찬이네?”

“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너무 감사했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솔직히 남의 집 귀한 아들 데려와서 그런 일을 겪게 했으니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데 되려 고맙다니,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

그날 설명을 할 때도 도진이가 사람들을 구했다는 말에 자랑스럽다고 하셨던 게 떠오른다.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자식이 그런 일을 당하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보통인데,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내가 도진이를 잘 데려오긴 했지.

“근데 이건··· 무슨 음식이야?”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요리의 대가까진 아니지만 나름 다양한 요리를 접해봤다고 생각··· 할 수는 없구나. 그래봐야 대중식당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했었으니까. 직접 만든 것들도 결국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 고기로 만든 이름도 없는 것들뿐이었고.

···나 용케 식당을 하고 있네.

“이거 동태 식해(食醢)라고 하는 건데, 북한 음식이에요.”

“동태 식해?”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먹어본 적은 없다. 냄새가 굉장히 독특한데다 동태라면 얼린 명태인데, 그걸 이렇게 생으로 담아 먹어도 되는 건가? 결국 이건 명태식해인 셈이다.

“삼촌, 이거 완~전 맛있어요! 완전 밥도둑!”

“···그래?”

솔직히 시은이는 뭘 해줘도 늘 맛있다고 하는 것 같아서 믿음이 크게 가지는 않지만, 궁금하기는 하다. 동태로 담근 젓갈이라니, 무슨 맛일까?

“그런데, 북한 음식을 어떻게 하셔?”

“예전에 저희 할아버지가 좋아하셔서 배웠던 거래요. 함경도 지방 음식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함경도였나. 생각해보면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잘 먹는 함흥냉면, 그 안에 들어가는 가자미식해도 모두 함경도 음식이었지. 거기다 길가에 간혹 보이는 아바이 순대나 심지어 갈비탕도 함경도 지방 음식이었다.

“어디.”

젓가락을 가져와 뼈를 잘 발라낸 명태식해 한 점을 들었다. 작은 쌀알 같은 것들이 보이는데, 모양새로 봐선 좁쌀인 것 같고.

흐음. 입 안에 넣자 익숙한 듯 강렬한 발효 음식 특유의 향이 풍긴다. 짭조름하면서 매콤한 것이···.

“왜 시은이가 밥도둑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네.”

명태 살이 소금에 절여져 약간은 꼬들꼬들하게 발효가 되어 식감이 무르지 않다. 이것 참 별미구나.

동태를 사다가 이렇게 살을 모두 발라내려면 상당히 손이 많이 갔을 텐데. 과정을 떠올리니 참으로 귀한 음식 중의 하나다.

“만드는 데 힘드셨을 텐데, 이 귀한 걸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어?”

김치 냉장고에 들어가는 통으로 2개나 된다. 이 정도 양을 혼자 만드시려면 하루는 꼬박 허리를 숙이고 명태를 손질하셨을 텐데.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닐 거다.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에 버무려 발효시키는 과정에서도 꽤 신경을 써야 하는 음식이 발효 음식인데.

“가게 오는 손님들한테 한번 내보시라고 하더라고요.”

“손님들한테? 흐음···.”

이 귀한 걸 그냥 밑반찬처럼 내놓자니 뭔가 아쉽다. 아까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발효 음식이라는 건 호불호가 비교적 갈리는 음식인데, 괜히 기본 찬으로 내어줬다가 손을 데지 않으면 버려야 하니까.

원하는 사람에게만 내어줘야 하나? 그럼 또 공평하지 못한 것 같고.

선택지를 줘볼까? 식해와 다른 음식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하면 될 것 같다. 그럼 뭐가 적당할까?

이런 고민은 언제든 환영이다.

* * *

이른 아침에 제주도에서 택배가 도착했다. 커다란 일회용 아이스박스들.

“선장님,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 감사합니다.”

-뭘요. 겨울이라 요즘은 값도 저렴하고 알도 차기 시작했으니 딱 좋은 시깁니다.

물건을 잘 받았다는 전화를 한 통 넣고서, 박스를 열었더니 꽃게가 가득 담겨 있다. 여름철 금어기가 지나고서 다시 살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꽃게는 지금부터 알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봄철 암꽃게가 가장 맛이 좋은 시기이지만 그때는 가격이 비싸져서 가게에서 사용하기엔 부담스럽고, 지금이 딱 적당하다.

시은이와 시연이가 팔을 걷어붙이고 설 연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루 먼저 돌아온 덕윤이까지 가세하자, 손질은 금세 끝났다.

이제 물기를 제거하고 하루 전에 미리 끓여서 식혀둔 간장만 부으면 끝.

물기가 빠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그래, 이쯤이면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 날짜는 정해진 거야?”

-네. 그런데 장소가 위쪽입니다. 이것만은 절대 양보하지 못하겠다고 하네요.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간다고 해서 더 그랬겠지. 이해해.”

장소 같은 거야 의미도 없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