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02화.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장치의 설치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업그레이드가 됐다고 하더니 내가 볼 땐 별 차이 없는 것 같고, 대체 뭐가 바뀐 건가 싶었는데.
“멋있어지지 않았습니까.”
기대를 했던 게 억울해지게 만드네. 그래도 확실히 최우혁의 말처럼 뭔가 그럴싸하게 변하긴 했다.
전에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피뢰침 같았던 모습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첨탑 같은 모양이랄까. 확실히 조잡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대단한 발전이네.
“진-!”
설치가 완료되어 갈 때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반갑고 활발한 목소리로 날 부를 사람은 대마도에 한 명뿐이지. 라미야다.
한 손에는 네스티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나머지 한쪽 팔을 마구 흔드는 게 무척이나 반가운 것 같은 모습.
그 뒤로 이루와 유리코프가 따라오고, 또 그 뒤로는 하밀과 멜를린이 어색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 블랙은 보이질 않는다. 하기사 그 녀석이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 나올 리가 없지. 카메라와 기자들이 한쪽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정민아, 기자들은 언제까지 있는 거야?”
“시연이 끝나면 곧장 건물에서 나가는 것으로 이미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괜히 숨어있거나 몰래카메라 같은 거 설치하면···.”
“최소한의 인원만 받았고, 들어올 때 장비를 철저하게 체크했습니다. 나갈 때 역시 그럴 거고요.”
“알았다. 그래서 그냥 비밀리에 하고 싶었던 건데.”
서로 번거롭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기자들 역시 게이트가 열리는 것만 찍어봐야 크게 의미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게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단 인간이 게이트를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희망적으로 생각되기도 하는 거니까요. 요즘 세상에는 작은 거라도 사람들에게 뭔가 발전한다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게이트를 만드는 게 희망적이라고?”
미친 건가? 막아내는 거라면 몰라도, 위험한 걸 더 만들어 내는 게 어떻게 희망적일 수가 있지.
“그야 잘 포장해야죠. 인류가 게이트를 점차 정복해 나가고 있다는 쪽으로···.”
한 마디로 전 세계 인류를 향해 사기를 치겠다는 건데. 도대체 저딴 아이디어는 누가 내는 거지?
“하밀 로넌씨가 처음 낸 의견이었고, 각국 대표들이 대다수 찬성을 해서 결정된 사안입니다.”
하밀은 갈수록 헌터에서는 멀어지는 느낌이네. 뭐, 자기 딴에는 나름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게 도움이 되는 건가?
“아빠-!”
키도 부쩍 커졌고 걸음걸이에도 제법 힘이 실린다. 종종거리면서 뛰어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고작 몇 달 사이에 이렇게 자라다니, 아이들은 참 신기하네.
이 작은 아이를 게이트 혼자 들여보내야 한다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다. 심지어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를.
혹시나 싶어 게이트 생성 장치 시연 전에는 주변으로 차단막을 펼쳐둬서 다행이지, 전 세계적으로 공식 유부남이 될 뻔했네.
“진이 오빠.”
“···어? 미연아, 너도 왔어?”
“응. 저기 안 차장님이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게이트 활성화를 막아줄 수 있냐고 부탁하셔서.”
언제 차장을 달았는지 말하지 않은 것도 놀랍지만 내가 있는데 굳이 미연이까지 불렀다니. 정민이가 꼼꼼하긴 하지만, 이건 좀 과한 게 아닐까 싶다. 아니면 날 못 믿나? 설마, 그럴 리는 없는데.
“근데 나도 듣고 엄청 놀랐네. 저게 정말 작동하는 거야?”
“작동은 해. 실제로 지난번에 성공했었고.”
“와··· 게이트를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다니, 상상도 못 해봤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지.”
하긴. 미연이는 중얼거리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비록 능력이 달라지긴 했지만 예전에 힐러였던 미연은 아마 구한 사람도 많았겠지만, 구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을 거다.
게이트를 만드는 장치라니, 상상할 필요도 없었겠지.
“선생님,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그러지. 마석은?”
“중급으로 20개 준비했으니 부족할 일은 없을 겁니다.”
20개라.
설마 그걸 다 쓸 일은 없겠지만, 다 써서도 안 된다. 그 말은 던전의 등급이 그만큼 올라간다는 소리일 테니까.
그래도 이 정도로 판을 벌여놨는데, 실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준비는 해둔 거겠지. 기자들을 보니 외신 기자들이 더 많은데, 실패라도 했다간 그야말로 새해 첫날부터 개망신이다.
아, 외국 기자들에게는 오늘이 새해 첫날이 아니겠구나. 그래도 아마 새해 들어 첫 흑역사가 되긴 하겠지.
나야 그런 거 별 관심 없지만 아카데미가 있는 한국 정부나 하밀은 상당히 쪽팔리겠지. 오, 그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렇다고 일부러 실패하게 할 생각도 없다. 사실 이번 계획을 듣고 내가 바로 수락한 것도, 나 역시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네스티가 던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처음 만났을 당시에 네스티는 게이트 안을 자신의 ‘집’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열리는 게이트는 어떨까?
‘만약 그 ‘결투장’ 녀석의 말이 맞는다면 네스티는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간과 달리 몬스터들에게 ‘적’으로 인식되진 않을 거다. 그래서 혼자 들어가는 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허락한 거고.
이제는 결과가 나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일.
이거 보는 눈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나도 살짝 긴장된다.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처음이기도 하고.
손끝에서 뻗어나간 마력이 공간에 퍼져있는 다른 마력들과 얽히고 공명하며 촘촘하게 펼쳐진다.
크기를 얼마나 해야 적당할까 생각을 해봤었다.
최대한 넓게? 어쩌면 그게 안전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위험했다.
만약 가까운 거리에 연결되는 다른 게이트가 있다면? 그래서 내린 결론은 최대한 타이트하게다.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크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상급의 게이트를 기준으로 마력 차단막을 펼쳤다.
“···정확하게 저 안쪽에만 마력의 흐름이 끊겼어.”
“이진은 이런 것도 가능한 거였어?”
“잘하면 게이트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도 되는 거 아냐?”
마력의 흐름을 끊어낼 수 있다는 걸 나도 얼마 전에 알았다. 그전까지는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게이트를 없앨 수 있나 오전에 잠깐 시도를 해봤는데 그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게이트가 유지되는 마력은 이쪽이 아니라, 게이트 안쪽 세상에서 넘어오는 거라서? 정확하진 않지만 그게 내 결론이다.
우우우웅-.
오전에 본 오리지날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하나의 작은 점에서 시작해서 점차 커지던 게이트와는 달리 이건 마치 투명하던 것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나타나고 있었다.
‘작다.’
마력 차단막보다 훨씬 작았다. 설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또 연결된 다른 게이트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혹시나 싶어서 얼른 차단막의 크기를 줄여나갔다.
끼이이이-.
소리의 출처가 없는 기이한 소리가 공기중에서 울려퍼진다. 기자들이 연신 불안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저들 역시 목숨을 걸고 온 거였구나. 하기사, 나타나자마자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게이트를 바로 앞에서 열겠다는데, 겁이 나지 않으면 비정상이지.
“미연아.”
“알았어.”
내가 해도 되긴 하지만, 미연이도 있는데 굳이 혼자서 북치고 장구까지 칠 필요 있나. 북 치는 것만 집중하면 되겠지.
미연이가 손을 뻗자 일렁거리던 게이트의 장막이 눈에 띄게 차분해져 간다. 당장이라도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던 마력이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오호라,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였나? 다음에 나도 한 번 해봐야지.
라미야의 공간 이동은 아직 무리지만, 미연이의 능력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에서 확인되는 게이트는 없습니다!”
오오오-.
기자들이 탄성을 뱉어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리포터까지 나서서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이전과 달리 사고도 없었고, 중급 마석 3개 만에 게이트가 열렸다. 크기와 마력 수치를 보아하니, E등급 정도.
마침 딱 적당한 게 열렸네.
네스티에 대한 검증이 끝나고 남아있다면 애초 예정이었던 훈련용 게이트로 사용해도 될 것 같다. 교육생들의 실전 훈련 용도로 쓰기에 딱 적당하다.
E급이면 도진이 정도만 있어도 클리어가 가능한 수준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런 등급의 게이트가 열린다는 보장도 없고, 생성할 때마다 매번 내가 내려와서 이렇게 해줄 수도 없으니.
흠. 이 건물 전체를 아예 외부 마력이랑 차단해버릴까? 그러면 적어도 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게이트 외에 밖에서 열리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을 텐데.
아니지,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한 것 같고.
“음··· 이건 고민 좀 해봐야겠는데.”
“선생님.”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안정민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또 뭘 해달라고 하려고?
“저기, 인터뷰 요청은··· 안 되겠죠?”
“하밀한테 하라고 해. 그 녀석 그런 거 좋아하니까.”
차라리 어디 따로 기자회견실 잡아주고 거기로 다 보내버렸으면 좋겠··· 어? 진짜 가네?
“저 자식, 그냥 가는데?”
“나중에 결과만 듣겠대. 지금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말이나 못 하면. 결국 지가 나서서 영웅 되겠다 이건데, 그래. 전 세계 사람들한테 칭송받아라.
실내가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시끌시끌하던 이들이 몽땅 사라지고 나니, 이제 정말 중요한 이들만 남은 셈이다.
“네스티, 엄마가 해준 말 기억하지?”
“응!”
“누가 네스티 괴롭힐 것 같으면 그냥 확-! 알았지?”
무슨 말을 해줬을까?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보진 말자. 왠지 들으면 공범이 될 것 같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마음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입학도 안 했을 법한 아이를 게이트에 보내야 한다니, 그것도 혼자 말이지.
물론 여차하면 가만히 구경만 할 생각도 아니긴 하지만, 사실 밖에서 게이트 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하밀 녀석은 도망간 거 같고···. 메를린, 네가 볼 때 어떻게 될 것 같아?”
하밀이 얼음 왕자라면 메를린은 냉혈 공주쯤 되겠다. 그나마 여기서 가장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어봤는데, 메를린이라고 해도 마음이 좋진 않은 건지.
“···최악은 저 아이가 게이트에 들어간 뒤 각성을 하는 거야.”
“각성이라면··· 마왕으로?”
“그렇지. 그게 내가 예상하는 최악의 상황이고···.”
“그럼 반대는?”
“···그냥 아예 들어가지 못하는 거.”
그럴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메를린에게 ‘결투장’이 한 말을 전해준 적은 없다. 이 녀석, 그냥 희망 사항이었나?
“···솔직히 난 모르겠어. 왜 이런 일이 또 생긴 건지. 도대체 신은 우리한테 뭘 바라는 거지? 진··· 네 생각은 어때?”
“나라고 너보다 많은 걸 알겠어? 심지어 난 신도 안 믿어.”
“그래도 너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나도 네가 가진 능력 하나는 인정하거든.”
여자의 직감인가? 아니면 그냥 던져보는 말인가. 칭찬인지 욕인지 애매한 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적어도 여기 있는 모두에게는 말을 해줘야겠지.
그 녀석이 내게 했던 그 전언을.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들은 알 자격이 있다.
왜냐면 우린 세상을 한 번은 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