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100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교육생들의 인식은 확실히 변해갔다.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따지고 들지 않고, 능력이 어느 방향으로 발전했는지를 우선시하기 시작한 거다.
“제일 앞줄은 중장비 착용이 가능한 근력케를 세워야지!”
“무슨 소리야. 지금이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거기다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갑옷이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한 대 맞으면 날아가 버리는 걸.”
지금은 메를린이 담당하는 [전략과 전술]을 배우는 시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메를린은 두 사람의 의견 대립이 과연 어떤 쪽으로 흘러갈지 지켜봤다.
‘둘 다 맞는 소리야···.’
그래서 대형 몬스터 무리와 소형 몬스터 무리, 그리고 복합적인 무리를 상대할 때의 전략은 모두 달라야 한다.
심지어 몬스터들 중에서도 원거리나, 마법을 사용하는 녀석들이 있을 경우도 달라져야 한다.
같은 공략대에 어떤 능력을 가진 헌터가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져야 하지만,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헌터들은 기본이 되는 다양한 포지션을 찾아냈다.
지금 수업은 바로 그걸 가르치기 위한 시간이고.
“자자. 양쪽의 의견 모두 맞는 소리야.”
점점 과열되어 가는 분위기에 메를린이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이대로 더 가면 주먹이 오갈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이쪽은 아마도 근력 강화 계열이겠지?”
중갑을 착용할 수 있는 능력자를 앞세워야 한다는 의견을 처음부터 강하게 주장하던 이들을 향해 메를린이 물었다.
“···네!”
“그 마음 이해해. 나도 탱커니까.”
“역시! 파티의 리더는 탱커가 맞는 거죠?!”
흐음.
메를린은 그 말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리더라. 너희는 리더가 뭐라고 생각하지?”
“네?”
팀의 포지션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리더의 의미에 대해 물어보니 학생들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메를린은 그런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공략대의 목표를 정하는 사람이죠.”
“그보단 팀원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 아닐까?”
“리더라는 건 결국 최종 결정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역시나 분분한 의견.
하지만 이번에도 모두 맞는 말이었다.
아마 100명에게 묻는다면 100가지의 답이 나올 수도 있는 질문.
어쩌면 이곳에 있는 학생들 모두가 바랄 포지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메를린은 자신이 생각해온 리더에 대한 정의를 학생들에게 말해줬다.
“좋은 리더란 최악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다.”
“메를린 교수님, 하지만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건 어떻게 알죠?”
누군가의 질문에 메를린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며, 몇이나 남았지?”
“···몰라. 20명?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고···.”
“블랙!”
절망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광경.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절반은 하늘을 보고 누워 숨을 헐떡이며 생명이 꺼져가는 중이었다.
“···무리야.”
퀭하게 드러난 눈으로 고개를 젓는 블랙.
아무리 그라도 왼쪽 어깨부터 배꼽이 있는 곳까지 갈라진 이를 살리긴 역부족이었다.
컨디션이 최상인 상태라면 모를까, 어쩌면 지금 공략대중에서 가장 지친 사람은 블랙.
지금은 도저히 살려낼 방법이 없었다.
두두두두···.
멀리서부터 울려오는 지축.
또 다른 몬스터 무리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모두가 깨달은 순간.
“너희들은 정비해. 저건 내가 막아보지.”
조용히 나선 동양인 하나를 헌터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너무 힘들어서 미치기라도 한 건가?
“무슨 헛소리야! 너··· 그래. 한국의 헌터라고 했나? 겨우 B급인 주제에···!”
화낼 일은 아닐지 모른다.
어쨌든 목숨을 걸고 나서겠다는 이를 비난할 일은 더욱 아니고.
하지만 모두가 절망에 빠진 순간에, 헛된 희망에 찬 말이 헌터들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마지막 게이트라고 예상된 곳에 들어온 52인의 최정예.
전 세계 각지에서 강하다는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이는 이제 절반도 되지 않는다.
2달 남짓한 시간.
한 게이트의 키퍼로나 나올 법한 몬스터들이 이 안에서는 그야말로 발에 채이는 돌멩이보다 더 흔했다.
잠은커녕 제대로 쉬지도 못해 체력은 갈수록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어쩌면 모두가 예상했을 거다.
우린 모두 여기서 죽을 거라고.
딱히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의 눈에 서린 것은 절망뿐이었으니까.
그 어디에도 희망 따윈 없었다.
콰과과과-.
그 순간, 얼마 전까지 눈에도 잘 띄지 않던 헌터가 힘을 드러냈다.
새까맣게 몰려오던 몬스터들이 마치 어린아이가 뿌린 물줄기에 휩쓸려 나가는 개미 떼처럼 쓰러지는 장면.
“······무, 무슨 일이···.”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
함께 2달을 넘게 사선을 넘어오면서도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헌터.
그의 손짓에 수천이 넘을 것 같은 몬스터가 바스러지고 있었다.
“대, 대체··· 왜···.”
순간 메를린은 생각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힘을 숨겼는지보다, 왜 하필 지금인지.
극적인 장면에 등장하기 위해 기다렸다?
그렇다고 하기엔 저 남자 역시 몸이 그리 성해 보이진 않았다.
비단 메를린 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헌터들 대부분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한 동양인의 등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저, 교수님?”
“···아, 미안하다. 잠시 옛날 일이 생각나서···. 질문이 뭐였지?”
“그 순간에 뭐가 최선의 선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건 게임이 아니다.
세이브 된 지점으로 돌아가 여러 가지 선택을 해보고, 최선인지 판단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그럼 그 최악의 순간에서 선택한 결과가 과연 최선이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물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모든 게 끝났을 때, 너희들의 옆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는지가 바로 그 결과다.”
하지만 메를린은 확신했다.
진정한 리더라면, 더욱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거라고.
* * *
게이트 안에도 밤은 찾아온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이상 편히 쉴 방법은 없다.
인간과 달리 몬스터는 야행성인 것도 있고, 심지어 밤이 되면 능력이 증폭되는 것들도 있다.
시야는 어두워지고, 몬스터가 흉포해지는 시기.
인간들에게는 낮보다 더 위험한 시간이 바로 밤인 셈이다.
며칠 정도야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한 이들이 태반인 공략대지만 그것도 2달이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친 이들을 중심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휴식을 취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해야 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
“오늘 밤은 제가 불침번을 설 테니 모두 주무시죠.”
불과 하루 전에도 30명의 인원이 3교대로 돌아가며 휴식을 취했다.
그 와중에 나오는 자잘한 몬스터는 경계 중인 인원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라 최소한의 인원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혼자서 이 인원을 지킨다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헛소리라고 소리쳐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헌터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낮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런 말을 하는 게 되려 고마울 지경이니까.
“···혼자 정말 괜찮겠습니까?”
대표로 물은 이는 프랑스에서 온 슈렝이라는 S급 버퍼였다.
다른 부분에서는 모르지만,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 지휘관의 역할을 하던 인물.
알게 모르게 헌터들 사이에서도 따르는 이들이 많은 남자.
“괜찮습니다. 뭐, 조금 심심할 순 있겠지만···.”
“그럼 내가 이야기 상대라도 해줄게요. 나야 다른 사람들처럼 상처가 심한 것도 아니니까.”
“···라미야씨의 능력은 기습 전투의 핵심입니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게 좋아요.”
“걱정마세요. 컨디션은 나쁘지 않으니까.”
이견은 없었다.
정말 이대로 가면 몬스터가 아니라 수면 부족으로 급사할 것 같은 이들은 이진의 말이 허세라고 해도 믿고 싶은 심정이었을 테니.
아마 1분도 되지 않아 모닥불 근처에서는 코를 고는 소리만 울려 퍼졌던 것 같다.
“하, 하···. 하하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이들.
아침에 일어난 헌터들의 눈에 들어온 건 엄청난 수의 마석 더미였다.
“도대체 간밤에 몬스터가 얼마나 왔길래···.”
“아무리 피곤했다고 해도, 우리가 저 정도의 몬스터가 몰려오는 동안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이게 말이 돼?”
“···마력 차단막.”
“말도 안 돼! 우리가 있던 곳 전체를 마력 장막으로 덮었다고? 심지어 그 상태로 저 많은 수의 몬스터를 잡고? 그것도 혼자서?!”
그 이외엔 설명할 길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악을 쓰는 헌터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라미야. 너는 뭔가 봤지?”
“···그래. 봤어.”
“그의 능력은··· 뭐였어?”
메를린의 질문에 라미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몰라.”
“뭐?”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겠어.”
“···무슨 소리야. 봤다면서 모르겠다니.”
메를린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라미야는 여전히 반쯤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우리 중 저 사람의 능력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마 없을 거야.”
저 사람이라.
메를린은 그 단어에서 확신했다.
라미야의 입에서 이진이라는 한국인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들을 수 없을 거라는 걸.
헌터들이 은연중 두 부류로 나뉘고 있었다.
20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독단적으로 행동하다가 전멸을 한 이후로 하밀의 작전과 슈렝의 지휘 아래 지금까지 잘 헤쳐왔는데.
갑자기 나타난 압도적인 실력자의 등장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진이라는 남자가 딱히 그런 지위에 관심이 없다는 정도.
“이 작전에서 가장 핵심은 역시 이진이 초대형 몬스터를 얼마나 빠르게 정리해주느냐가 관건이야. ···가능하겠어?”
“가능해.”
“드래곤이 무려 세 마리야. 일단 이진이 두 마리를 맡아주니까 우리는 최대한 전력을 집중해서 나머지 한 마리의 발을 묶어놓는 게 중요해.”
이진은 하밀과 슈렝이 작전을 세우는 동안 의견을 내놓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저 그들이 맡기는 역할에 고개를 끄덕일 뿐.
“이제 남은 인원은 모두 22명. 이 빌어먹을 게이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최대한 많은 이들과 함께 살아나가고 싶다.”
“나 역시. 승리한다고 해도 죽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 거니까.”
하밀과 슈렝의 작전.
그건 늘 사상자를 최소한으로 만들 수 있도록 계획됐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중심 역할은 늘 이진이었다.
“아무리 이진이라도 혼자 후위까지 돌파하는 건 무리겠지. 내가 함께 가겠다.”
“···유리코프, 너는 이쪽의 최선봉이야. 일점 돌파의 핵심인 네가 빠지면···!”
“그럼 이진은? 죽어도 된단 소리인가? 지금 이 작전, 마치 이진을 함정에 몰아넣는 것처럼 보이는 건 정말 나뿐이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진이야말로 이 작전의 핵심이야. 애초에 그가 없다면 이런 작전도 아무런 의미가···!”
평소 하밀답지 않게 흥분한 순간.
모두가 깨달았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하밀의 치밀한 작전도.
슈렝의 뛰어난 지휘력 덕분도 아닌.
오직 이진의 압도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난 괜찮아. 유리코프, 너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줘. 라미야, 나를 드래곤 근처로 보내줄 수 있겠어?”
“응. 하지만 드래곤 주변은 폭풍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마력이 불안정해. 아마 근처라고 해도 200미터는 떨어진 곳이 한계야.”
“충분해.”
그리고, 그날.
이진이 두 마리의 드래곤과 상대하는 사이.
3명의 헌터가 목숨을 달리했다.
그리고 이진은 더욱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