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99화 (99/153)

귀환자 식당 99화.

오래 두고 가까이 지냈어도 모두 벗이 되는 건 아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어도 불편한 사람이 있는 법이고, 이루에겐 하밀이 그런 사람이었다.

앞뒤 재는 건 질색인 이루와 모든 일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하밀의 성격이 애초에 너무 달라서 그럴지도.

그래서 함께 꽤 긴 세월을 게이트에서 보냈음에도 그다지 친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메를린.”

“이루.”

한때는 연인 사이였던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 가볍게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모인 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여기는 이루의 집무실인 부학장실.

온갖 결제부터 아카데미 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처리, 아카데미 생들의 교육 진행 상황까지 모두 체크하는 곳.

이루가 거의 하루 중 2/3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다.

그리고 오늘 그곳에 어쩌면 세계 최강자라 불리는 이들이 대부분 모여들었다.

“난 하밀의 의견에 찬성.”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건 다름 아닌 블랙이었다.

“평소엔 말도 없는 녀석이 왜 갑자기 이 일에는 적극적이야?”

“나도 찬성.”

이번엔 메를린이었다.

결국 늘 하밀의 편에 서던 이들 두 명은 큰 고민없이 하밀의 의견에 손을 든 셈이다.

이제 남은 건 셋.

이루와 유리코프, 라미야.

라미야와 이루가 이진의 편이라면 유리코프는 사실 중립적인 성향에 가깝다.

다만 그 역시 성격적인 부분에서 하밀보단 이진과 더 잘 맞았을 뿐.

“난 무조건 반대야! 네스티는 아직 어린아이라고!”

“그냥 어린아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라미야,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밀. 미안하지만 난 너처럼 냉혈인간은 아니라서 말이야.”

“자자. 두 사람 모두 감정적으로 나가진 말자고, 어쨌든 이건 심각한 사항이야. 라미야,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투표 결과에는 따를 거라고 믿어.”

하밀과 라미야의 감정적 대립이 시작되려는 찰나, 메를린이 나섰다.

“미안하지만 이번엔 투표고 뭐고, 난 무조건 반대야. 네스티를 위험하게 만드는 건 용납 못해.”

라미야가 강경하게 나왔고, 하밀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미야,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 녀석은 인간이 아니다. 정이 들었었다는 건 이해하지만, 넌 지금 인류 전체의 목숨을 놓고 도박을 하겠다는 말인가?”

“······.”

인간이 아니다.

그 말이 라미야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아이.

몇 개월을 함께 지내면서 정말 네스티의 엄마가 된 듯 느끼는 건 착각인가?

“안다. 그 아이가 너에겐 엄마라고 부르고, 이진은 아빠라고 한다지? 하지만 과연 이진이 있다면 이 의견에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지금 세상에서 이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곳에 모인 6명일 거다.

그리고 모두가 하밀의 그 질문에 생각한 답은 같았다.

아마도 이진이라면···.

“···반대하지 않겠지.”

“잘 아는군.”

하밀이 낸 의견은 정말 간단했다.

위험할 수는 있지만, 이 이상 확실하게 네스티의 정체를 밝혀내기 쉬운 방법도 없을 아주 간단한 실험.

“결정된 것 같군.”

라미야도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비록 냉혈한 같은 결정이지만, 하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으니까.

언젠가는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저 그게 너무 갑작스럽고, 빨랐을 뿐.

“그럼, 게이트 생성 장치를 가동하는 즉시 네스티를 투입한다.”

아마 네스티의 정체는 이것으로 확실해질 거다.

“적어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있겠지.”

“···아니라면?”

하밀은 앉은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이미 대답은 알고 있었다.

* * *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삼촌.”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커플로 맞춘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두 사람의 한복.

어떻게 보더라도 같은 원단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시은이의 저고리와 도진이의 바지.

역시나,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적이었던 건가?

이런 옷은 또 언제 준비를 해둔 건지.

“헤헤.”

세배를 하고선 앞에 다소곳이 앉아 배시시 웃어넘기는 시은이.

기가 막히긴 하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두 사람이 서로 저리 좋아 죽는다는데 말려서 될 일도 아니고.

“도진이 부모님 뵙거든 인사 잘 드리고.”

“아저씨, 아줌마야 벌써 전에 한 번 뵀는데요. 뭘.”

크리스마스 때인가?

하지만 그때는 잠깐이기도 했고, 시은이가 토라져서 뛰쳐나가 사실 인사를 제대로 드리진 못했던 것 같은데.

게다가 그런 시은이를 데리러 갔다가 몬스터를 맞닥뜨린 도진이가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실려 갔으니, 그쪽 부모님이 마냥 좋아하실 리가 없을 것 같은데.

“헤헤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좋다고 헤실거리는 시은이를 보니 참 심란하다.

“왜 자꾸 그렇게 웃어?”

“···얼른 주셔야죠. 삼촌?”

순간 무슨 소리인가 했다.

뭘 맡겨둔 사람처럼 뜬금없이 내놓으라니.

“뭘?”

“그야··· 세뱃돈이요?”

“······아.”

워낙에 오래전 일이었던 것도 있고.

나야 12살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세배를 한 적도, 세배를 받은 적도 없어서 생각 자체를 못했다.

“힝.”

큰 금액을 바랬다기보다는 그저 그 작은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마음인지. 시은이가 살짝 울상을 지었다.

“너, 너도 이제 성인이야. 성인이 무슨 세뱃돈을···.”

“그래도 전 아직 학생이잖아요. 학생은 그런 거 다 받는단 말이에요!”

이거 참···.

“그럼 그냥 이체로 해주면···.”

“···그래도 세뱃돈은 현금으로 받는 맛인데.”

시연이까지 뒤에서 조용히 비수를 꽂는 말을 중얼거렸다.

“거, 요즘 대한민국에서 현금 들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도무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안 보이는 모양이고, 어떻게든 손에 뭔갈 쥐여줘야 저 슬픈 눈망울을 내 앞에서 치울 생각인 것 같다.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당연히 현금이 있을 리가 없다.

대신, 다른 게 손끝에 잡혔다.

“아!”

“···왜요? 뭐 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 원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금세 반짝거리는 눈빛.

그게 귀여워서라도 도무지 그냥 넘어가진 못하겠다.

“크흠.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세뱃돈보다 훨씬 더 좋은 걸 줄 테니까.”

“정말요? 뭔데요?”

작은 마석 조각을 손끝으로 굴리며, 나는 얼른 내 방으로 향했다.

잠깐이면 되는 일이지만 이왕이면 놀라게 해주고 싶기도 하고.

사각- 사각-.

꼬마 아이에게 줬던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공을 들였다.

왜 진작 이런 걸 줄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는데, 아마 이렇게 주려고 그랬던 모양이지.

엄지손톱만 하게 다듬어진 마석이 사파이어처럼 빛났고, 나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보호.

안전.

가호.

내 의지에 따라 마력이 움직이며 마석의 뒤에 알 수 없는 무늬의 도형을 그려 나간다.

움직이는 빛을 따라 그려지는 선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

마석에서 짧은 시간동안 작은 빛이 환하게 터져나왔다.

짤그랑-.

완성된 두 개의 마석 조각.

이대로 주어도 이미 충분한 보물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더 선물처럼 느끼면 좋겠는데.

인벤토리의 안의 작은 금화 하나를 꺼내 녹였다.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마석의 테두리를 감싸고, 금으로 된 얇은 사슬이 마치 용이 승천하듯 한 바퀴 감아 오르며 몸을 꼬았다.

단순한 모양이긴 하지만 제법 모양새는 갖췄다.

목걸이의 형태로 할까 하다가, 너무 눈에 띄는 건 오히려 별로일까 싶어 얼른 팔지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탁월했던 것 같고.

“크흠.”

멋쩍게 헛기침하며 다시 거실로 나가자, 역시나 시은이가 가장 먼저 달려왔다.

“삼촌! 방금 그 빛, 마법 쓴 거죠? 뭐였어요? 네?”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마법은 무슨···.”

아니, 또 마법이 아니라면 뭐라 설명할 길이 없긴 하네.

그냥 마법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자. 세뱃ㄷ··· 선물.”

촤륵.

손가락 끝에 걸려서 중력으로 인해 몸을 늘어뜨린 금색 팔찌의 중앙에 매달린 작고 푸른빛의 보석.

두 겹의 사슬이 유려하게 몸을 꼬고 있는 팔찌였다.

“우···. 우와아아아아아!”

눈을 동그랗게 뜬 시은이 팔찌를 낚아채듯 쥐고선, 거실 조명 아래로 향했다.

“후아아아···.”

팔찌를 찰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조명을 향해 들어 보이며 멍하게 웃음을 짓는 녀석.

기쁘기도 하고,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아. 이건 시연이 거.”

“···저, 저요? 하지만 전 아직 세배도 안 드렸는데요?”

“세배는 무슨··· 자, 받아. 시은이에게 준 거랑 같은 거다.”

시연이의 입꼬리에도 조심스럽게 미소가 걸렸다.

안 줬으면 서운해했겠지.

“너무 이뻐요···.”

“그 푸른색 보석은.”

“마석, 마석맞죠?!”

조명에 비춰보던 게 설마 보석의 진품 여부를 가리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그래. 마석을 가공해서 만든 거야.”

“혹시 아까 공원에서 만난 꼬마한테 주신 거랑 비슷한 거예요?”

“비슷하긴 하지만 이건 조금 더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까?”

나야 애초에 저런 게 필요하지도 않아서 그랬겠지만, 저렇게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거였으면 좀 미리 만들어 줬을 걸 하는 생각도 든다.

“꼭 가지고 있어.”

“네. 감사해요.”

“나도! 완전 이뻐, 완전 이뻐어!”

온도 차가 조금 나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충분히 기뻐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다만 그 옆에서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도진이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고,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당연하지.”

이 녀석이야말로 오늘 가장 큰 선물을 받은 행운아잖아.

저런 별것 아닌 물건 하나쯤이야.

* * *

후우-.

긴장한 듯 숨을 몰아쉬고 있는 최우혁.

그의 앞에, 금속으로 된 케이스 하나가 놓였다.

“완성했습니다.”

“···이것 하나뿐인가?”

“저희도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나중에라도 추가 생산할 가능성도 없나?”

“···죄송합니다. 이것도 그저 엄청난 우연의 산물일 뿐입니다. 지금 저희가 가진 기술력으로는 이게 작동하는 방식을 알아내는 것도 사실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딸칵-.

조심스럽게 연 케이스 안에는 붉은색의 슈트 한 벌이 들어있었다.

최우혁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슈트에 손을 뻗었다.

“조, 조심하셔야 합니다. 닿기만 해도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는 놈이에요. 꼭 살아있는 악마 같은 놈입니다.”

“···그래? 그거 마음에 드는군?”

입술을 이죽거리는 최우혁 실장의 표정에 연구원 복장을 한 남자는 흠칫하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도대체 저런 소재는 어디서 가져온 거고, 대체 왜 저런 걸로 마력 슈트를 제작하라고 했는지 연구원은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가?’

저 슈트를 입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끊임없는 마력의 공급.

각성한 이들조차도 슈트를 입고 활동하기 시작하면 채 2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탈진하기가 일쑤였다.

엄청난 금액을 약속하고 비밀리에 실행된 시험에서 일반인이 버텼던 시간은 고작 5분.

그리고 무려 3일간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대체 저런 걸 어디에 쓰겠다는 거지?’

그가 알기에 최우혁은 각성자가 아니다.

그 말은 마력을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슈트를 감당할 방법은 하나뿐이란 소리다.

“설마, 마석을 계속 공급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건 알 필요 없고, 양산형에 비해서 성능은?”

“슈트의 성능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수준입니다. 어른과 아이···. 아니, 신과 인간을 비교하는 수준이라고 감히 장담합니다.”

최우혁의 눈이 빛났다.

“일단은··· 아카데미 최우수 졸업생 타이틀부터 가져와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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