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97화 (97/153)

귀환자 식당 97화.

콰앙-!

멀찍이 산 능선으로 노을을 배경으로 지어진 건물 한 곳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반나체의 남성 한 명이 문짝과 함께 복도를 뒹굴었다.

어지간한 사람이었으면 일어나기 힘든 걸 떠나 생사를 확인해야 할 정도였지만, 다행히 남자는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오··· 허리야. ···씨발! 저게 미쳤나!”

덩치가 산만 한 흑인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치자, 부서진 문 안쪽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만 타월로 가린 백인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 내가 이 시간엔 여자가 쓴다고 했지!”

“이런, 씨발. 네가 뭔데 통보야, 통보가! 훈련 끝나고 땀 때문에 찜찜한 건 다 똑같은데, 왜 너희가 먼저냐고!”

“남자들이 그 정도 양보도 못 해주냐?!”

“하-. 미친 것들이 지들이 필요할 때만 남자 찾네? 훈련할 때는 남자 여자 상관없이 다 같은 각성자라며?!”

차라리 건물별로 남녀가 나뉘었으면.

그도 아니면 차라리 건물이 현대식이라서 방마다 샤워 시설이 있었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이 이상한 혼욕 온천 문화인지 뭔지 덕분에 이 낡은 여관 건물에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목욕탕이 딱 하나.

무작위로 선정된 남자 3명과 여자 7명의 성비 부조화가 이런 사태를 일으킨 주범인 셈이다.

“여자 숫자가 더 많으니까, 우리가 먼저 씻는 게 맞아.”

“너희들은 한 번 들어가면 한 시간이잖아! 우린 10분이면 끝난다고. 이건 효율성을 따졌을 때 당연히 남자들이 먼저인 게 맞잖아!”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는데, 백인 여성 뒤에서 자그마한 체형의 아시아인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흥! 배려심 없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고!”

“닥쳐! 미즈코인지 나즈코인지, 애초에 너희 일본의 이런 변태 같은 문화만 아니었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고!”

“우, 우리 일본의 고유문화를 욕하지 마!”

새벽에 일어나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을 시작한다.

기초 체력과 지구력을 기르기 위한 50km 산악 구보를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일과는 영하의 기온임에도 온몸에서 땀이 흐르기에 만들기 충분했다.

먼지와 땀으로 뒤덮인 채 한 시간을 멍하니 있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나마 처음 며칠은 버틸 만 했다.

‘우린 남자니까.’

그런 마음으로 배려를 해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지고 지칠수록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갔고, 여자들의 이중적인 잣대에 서서히 지쳐갔다.

그리고 결국 어제 있었던 조별 리더 선정에서 남자들의 화가 폭발해버렸다.

무작위로 선정된 인원들이 10명씩 짝지어진 조.

그 안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인원을 조장으로 선발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반론이 제기된 거다.

-여자들은 타고난 신체 조건이 남자와 다르니 선발 기준에서 여성에게 추가 점수를 줘야 한다.

각성자의 경우 남녀 간의 차이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지만, 여성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지금 선발된 조장이 바로 지금 서 있는 백인 여성이었다.

“내가 조장이니까 내가 정하겠어!”

“무슨 개소리야. 조장의 역할은 조별 훈련 때 뿐이지, 숙소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분명히 아카데미 학칙에도 나와 있는데!”

“그럼 다수결로 하던지.”

“뭐? 이게 진짜···!”

3대 7.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무력으로든, 인원수로든.

일반 여자들이라면 남자가 3명인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신체적인 차이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 우리도 몰라! 염병, 같이 씻던가 그럼!”

···꺄, 꺄아아아아아아!

이 미친놈들아! 어디서 그런 흉물스러운걸!

더는 참지 못한 남자들이 팬티를 벗어 던지고, 당당하게 목욕탕으로 들어섰다.

당연히 여자들은 난리가 났고.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일이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충돌은 당연히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고, 특히나 저런 가족형 펜션에 생판 처음 보는 남녀를 무작위로 배정했으니 이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그냥 지나쳤을 문제인데, 오늘은 그게 유난히 거슬렸다.

딱히 자신이 태어나 자란 일본의 문화를 욕해서가 아니다.

콰앙-!

결국 지나치지 못하고 지금의 아카데미 ‘임시 숙소 21호’라고 쓰인 문을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들아, 하루라도 좀 조용히 좀 못 지나가겠냐!”

“부, 부학장님.”

여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물건(?)을 꺼내놓고 있던 남자 교육생들이 허겁지겁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집어 들어 가리기 바빴다.

“부학장님! 저런 변태들과는 도저히 같이 생활 못합니다!”

“우, 우리야말로! 너희같이 이기적인 것들은 지긋지긋하다고!”

하아.

이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들어왔는데도 멈추지 않는 말다툼.

하지만 이건 비단 이곳 ‘임시 숙소 21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운 좋게 남자나 여자로만 이뤄진 조는 그나마 낫지만 대부분의 조가 비슷한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굳이 이런 사소한 문제로 말썽을 일으켜야 하겠냐?”

“사, 사소한 문제라뇨. 남자들이 알몸으로 돌아다닌다고요! 이거 명백한 성희롱이에요!”

“그래? 그럼 너희도 알몸으로 다니면 되지.”

“···네?”

상식을 벗어난 답변에 여학생들이 모두 굳어버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식으로 답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으니까.

“첫날부터 말했을 텐데? 이곳에 들어온 이상, 남녀의 차이는 무시한다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나도 된다고 말이야. 내 말이 어려웠나?”

“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이루는 지금 이런 성별 차이의 문제로 더는 신경을 쓰기가 매우, 무척이나 짜증스러운 상태였다.

“너희들, 착각하지 마. 우리가 남녀의 구별을 없애겠다고 하는 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니까. 닿는 것만으로 녹아버리는 산성 액을 뿜어내는 몬스터, 천 따위는 순식간에 부식되는 독무가 가득한 지역 같은 건 두말 할 것도 없고. 밤 기온은 각성자의 신체로도 추위를 이기지 못해 서로 알몸으로 껴안고 자야 하는 경우도 있다. 너희들··· 그런 상황에서도 남자와 여자를 따지고 있을 거냐?”

이루는 화를 내는 것도, 달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리고 아무도 이루의 말에 답하지 못했다.

* * *

바깥과 다른 느낌이 들 거라는 건 분명하다.

마나의 농도가 다르기도 하지만, 반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곳이 바로 게이트 안이니까.

“그래도 잘 움직이고 있다. 다리가 아니라 발가락 끝으로 마력을 보낸다고 생각하면서 움직여.”

“···네!”

숨을 헐떡이면서도 곧잘 대답한 도진이 열심히 발을 놀렸다.

아이언 골렘의 약점은 딱 두 군데다.

양쪽 눈과 정확하게 목덜미의 관절 부위 중 피부가 연한 단 한 곳.

어째서 그곳의 피부만 다른 곳과 달리 부드러운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 약점이라는 곳도 지금의 도진에게는 전력을 다해야 그나마 기회가 있을 정도라는 거다.

“눈은 반응이 빨라. 닫혀버리면 두 겹이나 되는 눈꺼풀은 오히려 다른 곳보다 더 단단한 곳이 된다. 속도에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목덜미를 노리는 게 좋아.”

“하지만 목덜미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요!”

당연한 소리다.

아무리 몬스터가 멍청해도 1대 1의 상황에서 상대가 자기 약점이 있는 뒤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럴 때야말로 동료가 필요한 거다.

할 수 없지.

오늘은 내가 그 ‘동료’의 역할을 맡아줄 수밖에.

쾅-.

가볍게 뻗은 주먹에 트롤의 가슴에 수박만 한 구멍이 뚫려 버렸다.

“음, 너무 쌨나?”

그래도 다행스럽게(?) 아이언 트롤의 재생력은 이 정도로 죽기엔 이르다.

징그러울 정도로 빠르게 아물어가는 상처를 보면서 나는 마력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내가 시선을 끌 테니 너는 목덜미를 노려봐.”

“네! 학장님.”

약점이라고 해봐야 겨우 1mm 남짓의 작은 틈새.

꽤 경험이 있는 헌터라도 그 틈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도진이는 이루가 직접 가르친 녀석.

이 정도도 못해서야 이루가 아카데미의 교수 자리에 앉혔을 리가 없지.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도 몰래 가르쳐주고 있을 테지.

꾸워어억!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내던 녀석이 날 보며 광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아프지 않을 리는 없으니, 화가 날 만도 하겠지.

물론 내가 바라는 것게 딱 그거고.

카앙-.

키가 3미터에 육박하는 데다 잭나이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다란 손톱이 무언의 벽에 가로막힌다.

크하악! 쿠엑!

캉-! 카앙-! 카가가각!

더 화가 나서 날뛰는 녀석이 이성을 잃고 쉴드를 마구잡이로 때리는 사이.

어느새 녀석의 뒤쪽으로 돌아간 도진이가 칼을 찔러넣었다.

끼기긱-!

강철 이상의 강도를 지닌 가죽을 비집고 칼을 밀어 넣었지만 단번에 잘라내는 건 역시 역부족.

“이익!”

끼이에에엑!!!

칼을 뽑아낸 도진이 물러나자 트롤은 괴성을 넘어 포효를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처절함이 배어나는 높은 음의 괴성.

“···우웁!”

“피어다. 그래도 아이언 트롤은 무리를 짓지 않는 녀석이라 다행이지, 다른 몬스터는 피어를 통해 주변에 있는 동족을 부를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하, 학장님. 저··· 속이 이상한데요.”

“그건 네 내장이 피어에 담긴 마력에 때문에 경련을 일으켜서 그런 거야. 단순히 귀를 막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 그럼 이럴 땐 어떻게 합니까?”

“···그야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지.”

도진이가 황당한 표정을 짓지만, 신체 강화 능력자는 차라리 낫다.

이능력 계열은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의 피어에 정면으로 노출되면 심한 경우 내장 파열까지 일으키기도 하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도 좋은 소식이 없는 건 아니다.

“피어는 몬스터들에게도 거의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거야. 이 녀석이 지금 너한테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는 말이지.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으니 힘내봐.”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마주쳤던 한 마리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내가 처리했다.

처음부터 도진이에게 경험을 시켜주고자 마음먹었고, 그러기 위해 남겨둔 게이트 키퍼니까.

“···네에엑!”

이를 악물며 대답하는 도진이.

게이트 키퍼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당히 오래 버티고 있지만,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도진이도 마력을 거의 쥐어짜다시피 해서 이미 한계라는 정도.

그렇다고 전처럼 생명력을 끌어다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그런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두고 볼 생각도 없고.

그때야 몰라서 그렇다곤 하지만, 그건 설사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해도 절대 해선 안 되는 행동이니까.

지금 여기서 내가 도와줘도 되긴 하지만, 이런 한계를 넘어서야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법이다.

나 역시 그런 한계를 숱하게 넘어와서 더 잘 알고.

그렇다면 도진이에게 힘을 줄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게 뭘까?

고작 몇 마디 말로 이 녀석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 수 있는 말이.

잠깐 생각해보니 하나가 떠오르긴 한다.

이게 먹힐지 안 먹힐진 모르겠지만···.

“···이 녀석 목을 쳐내면 시은이랑 교제를 정식으로 허락해주마.”

아마도 제일 바라고 있었을 말.

두 사람 사이에서는 크게 의미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진이 본인에게는 아마 의미가 다를 거다.

기다랗게 상승곡선을 그리는 도진이의 입꼬리가 그 증거고.

“진짜로 약속하신 겁니다아아아아-!”

이루가 쓰던 검.

그리고 지금은 이루가 유일하게 제자라고 부르는 도진이의 검에서 붉은빛이 뿜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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