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95화 (95/153)

귀환자 식당 95화.

조용한 엔진음이 들리는 차내에는 작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저기, 시은아···. 이거 자율주행이니까 핸들에서 인제 그만 손 떼도 되는데···.”

“그래도 갑자기 오류가 날 수도 있으니까 항상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했어요.”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자율주행이 처음 대중화가 시작된 초기에나 그랬지.

지금은 솔직히 술을 먹고 운전석에 앉지만 않으면 된다는 인식이 있는 정도이다.

사람들이 언제 총에 맞을지 모르니 방탄조끼를 늘 차고 다니지는 않듯이 굳이 저렇게 핸들을 잡고 있어 봐야···.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을 것 같은데.

“시은아. 그거 잡고 있으면 오히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더 위험해.”

“···그, 그래? 그럼, 나 정말 놔? 놓는다?!”

자율주행 덕분이라 그런지, 차가 가득가득한 도로임에도 그리 막히진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의 이 시기였으면 주차장을 방불케 했을 고속도로도 제법 소통이 원활해서 출발한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주변에 높은 건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무들이 우거진 낮은 산들을 셀 수 없이 지나면서, 차 안에는 또 한 차례의 묘한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운전석에는 시은이, 그 옆에는 나.

시연이와 도진이가 뒷좌석에 앉아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네.

차라리 조수석을 도진에게 양보할까도 싶었지만, 그래도 정말 혹시 모를 상황에서 가장 대처를 잘 할 수 있는 게 나일 것 같아서 앉았는데.

“크흠. 그래,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할만해?”

“네? 네··· 이루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루와 전화 통화를 했을 때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해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누구 말이 맞든. 결국 잘하고 있긴 하단 소리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던가?

식당에 처음 왔을 당시만 해도 어리바리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느새 저런 말도 할 수 있게 되다니.

물론 이루가 열심히 가르친 덕에 자신감이 붙은 이유도 있겠지만, 도진이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했다.

나쁜 쪽이라 아니라, 좋은 쪽으로.

간혹 보이던 가벼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배려심과 부드러움이 자리하고.

어린아이의 그것과 비슷하던 질투와 시기가 성숙해지면서 이해심으로 변했다.

죽다 살아났던 그 날.

도진이는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처럼 정말 멋진 남자가 되었다.

언제나 내가 지켜줘야 할 것만 같던 시은이가 도진이의 곁에 서면 드는 이 작은 안정감이 내 마음 깊숙이 자리한 무언가를 대신 알려주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래. 그 뒤로 학생들 반응은 어땠어?”

“사실 사장님이, 아니··· 학장님께서 돌아가시고 조금 더 반발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금세 인정하더군요.”

모두 이루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다.

다만 이루는 현재 아카데미의 부학장이자 몇 가지를 제외한다면 거의 아카데미 운영의 모든 권한을 가진 실질적인 운영자의 위치다.

그래서 정말 학생들과 직접 부딪히는 교육자의 위치에 있는 도진이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서 물어본 거다.

그리고 하나가 더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 네 생각엔 옳은 일인 것 같아?”

“물론이죠. 몬스터를 상대할 때 필요한 건, 단순한 무력뿐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저도 잘 아니까요. 그리고 학생들 역시 학장님의 말에 반박할 논리가 없었으니까 당장 마음에 들진 않아도 이해한 것이고요.”

생각이 깊어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본인만 알고 있겠지만, 도진이는 내가 원하던 그 이상적인 헌터에 한 발 더 가까워진 셈이다.

“···모두 너처럼 되도록 만들어봐.”

“네? 저처럼 이라뇨?”

훗-.

도진이는 지금 짐짓 내숭을 떨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다.

예전에 비해 자기가 얼마나 마음이 단단해지고, 발전했는지.

정작 본인이 느끼고 있지 못할 뿐.

아마도 지금 아카데미에서 가장 좋은 선생은 유리코프나 라미야, 메를린, 블랙 같은 이전 세대의 쟁쟁했던 헌터들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막 각성해서 자신들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아이들이 올려다보기엔 너무 멀다.

그에 비해 각성 시기도 비슷하고, 실전을 몇 차례나 겪은 데다 이루에게 특별훈련까지 받은 도진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정말 ‘목표’가 되어 줄 수 있는 선생이겠지.

이루나 나는 그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일 뿐이다.

학생들을 이끌고 길의 가장 앞에서 수풀을 헤치며 나갈 수 있는 리더는 바로 도진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옆에는 오늘 새벽같이 집으로 향한 덕윤이도 있을 수 있겠고.

“걱정하지 마, 덕윤이도 곧 내려가서 도와줄 거고, 아마 미국에서도 조만간 몇 명이 지원하러 올 테니까.”

하밀 녀석이 왔을 당시 함께 있던 요원들을 보고 느꼈다.

이미 어느 정도 훈련을 마친 이들이라는 걸.

적당한 시기를 잡아 지원을 요구하면 거절할 수 없겠지.

“아참! 삼촌. 덕윤이 오빠는 잘 가고 있겠죠? 운전 진짜 조심히 해야 하는데···.”

두 번밖에 타보지 못한 차를 울며 겨자 먹기로 내어준 시은이가 울상을 지었다.

* * *

무궁화 공원.

그저 산책 같은 것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조상들의 산소가 모여있는 묘원墓園이다.

산속에 위치한 묘원의 안쪽에 있는 산소 하나.

우리는 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묘의 둘레는 대리석으로 단단하게 받쳐놨고, 가까운 곳에는 적송 한 그루가 심어진 근사한 산소였다.

무덤 위에는 일명 떼라 불리는 잔디가 오밀조밀하고 반듯하게 심어져 무척이나 잘 관리됐다는 느낌이 드는 산소.

산소 앞에 놓인 상석에 준비한 음식을 차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모습.

“할아버지, 매번 흙바닥에 신문지를 깔고서 올렸는데··· 올해는 이렇게 상석까지 있네요. 할아버지도 좋죠?”

“흙바닥이 다 뭐야. 비만 오면 무너져내린 산소며 돗자리 깔 자리도 없어서 매번···.”

내가 산소를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즉각 이장을 권했었다.

묘墓 앞의 공간이 너무 부족해서 앉을 자리도 부족했다는 말에 마음이 어찌나 상했던지.

당장에 묘원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이장을 하자 먼저 말을 꺼냈었다.

딱히 미신을 믿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그리고 덩달아 내 마음도 조금이나마 편하고 싶어서 말이다.

“할아버지, 이 전들이랑 토란국은 내가 끓인 거다?”

“네가 한 건 토란이랑 전에 들어가는 채소 다듬은 게 전부인 거 아녔어? 할아버지가 못 보셨다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

“호, 호박전은 내가 직접 부친 거 맞거든?!”

대부분 정갈하게 만들어진 음식들 사이에서 유난히 엉망인 호박전에는 그런 사연이 있었지.

“아마 할아버지는 그 호박전을 제일 맛있게 드실 거야.”

“흥, 그야 당연히 제일 맛있으니까요!”

성묘 음식은 차례상을 차리는 것보다 조금 간결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오늘은 못지않게 잘 차려졌다.

시연이와 시은이야 늘 북어포나 과일 정도만 올렸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처음이니까.

“외삼촌. 너무 늦게 찾아왔네요.”

제대로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물론, 나는 미신을 믿지는 않는다.

그저···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지고자 하는 행위일 뿐이지.

* * *

말만 들어서는 정말 앞에 할아버지가 앉아 있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한참을 떠들었다.

“시연이 그렇게 원하던 의대에 합격했어요. 할아버지.”

“삼촌 덕분에 비싼 등록금 걱정도 없고! 아, 그리고 여기는 내 남자친구! 할아버지, 잘 생겼지?”

“아, 그러니까··· 인사를 드려야 하겠지? 서, 서도진이라고 합니다.”

정말 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까?

솔직히 나에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6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것도 있지만, 식당 주인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나마 각성자가 된 이후로 기억력이나 인지력 등이 많이 좋아져서 이 정도인 거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얼굴 형태를 떠올리는 것도 어려웠을 거다.

“그러고 보면 삼촌이랑, 할아버지랑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이것 보세요. 잘 안 보이긴 해도 느낌이 꽤 비슷하죠?”

시은이가 내민 스마트폰에는 상당히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정말 비슷하긴 했다.

“할아버지가 워낙에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하셔서, 그나마 이게 제일 잘 나온 거네요.”

시연이도 어떤 사진인가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얼마나 사진을 안 남겼으면 이게 가장 잘 나온 사진이라니, 조금 황당하기까지 하네.

낯이 익은 듯, 낯설게 느껴지는 노인이 찍힌 사진.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 자신을 따듯하게 챙겨준 사람도 저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정말, 학장님이 나이를 들면 이렇게 변하실 것 같은 느낌이긴 하네요.”

잘 보이지도 않는 사진을 보면서 그걸 어찌 아나.

그래도 난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 사진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삼촌, 인제 그만 고수레하고 갈까요?”

“고수레?”

그런 걸 아직도 하나?

과일이나 술 같은 걸 사방으로 던지는 걸 묘원 관리소에서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보아하니 주변에 비슷한 시간에 성묘를 온 이들도 비슷한 걸 보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전 이런 전통문화가 좋아요. 주변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게 참 정 많은 한국 사람답기도 하고.”

“정 많은 한국 사람이라···.”

그런가.

아마 외삼촌도 그런 마음으로 날 신경 써줬던 거겠지?

따지고보면 굳이 내가 마음쓰지 않았어도 별 상관없었을 두 아이를 내가 챙기듯이 말이다.

아직도 의문이 들긴 한다.

어머니는 왜 나에게 외삼촌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리고 외삼촌 역시도.

언젠가는 알 수 있을 날이 오려나.

“시, 시은아! 너 운전해야 하는데, 술 마시면 어떡해.”

“응? 그래도 음복은 해야지.”

“···걱정하지 마. 운전은 내가 하면 되지.”

시은이도 서서히 술꾼 집안의 피를 각성하기 시작한 건가.

“역시 술은 할아버지한테 배워야지. 그렇죠, 할아버지?”

이미 배울 대로 다 배운 것 같은데.

억지 논리를 펴면서 끝내 청주 석잔을 비워내고 마는 시은이.

어쩌면 운전하고 싶지 않아서 마신 걸지도 모르겠네.

그냥 앉아만 있으면 된다는 걸 깨달으면 좀 편해질 텐데.

그릇들을 정리하고, 돗자리를 접는 도중.

허리를 숙인 채 산소 주변의 잡초를 뜯던 도진이의 허리가 튕기듯 펴졌다.

“하, 학장님!”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안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건 솔직히 나도 처음 보는 장면이다.

즈즈즈-.

작은 정전기가 일어나는 소리를 내며 마력이 한 곳으로 응집되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더 멀었으면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작은 마력들이 모여드는 현상.

“···삼촌, 이거 설마···.”

“아마도 게이트가 생성되는 중인 것 같구나.”

말로만 들어봤지,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인데.

모여들던 마력이 일순 폭발하듯 퍼져나감과 동시에, 푸른빛의 장막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작 사람 하나가 통과할 정도의 크기였던 장막이 점점 주변의 마력을 흡수하면서 몸집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아름답네요.”

황당한 말이지만 도진이의 말처럼 정말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 외엔 그 어떤 말도 어울리지 않을 듯한 장면.

화려한 액션 영화의 그래픽처럼 퍼져나가는 물결이 치는 듯한 빛의 장막을 보면서.

“완성되면 아마도 몬스터가 튀어나오려나.”

확신도 없이 무심결에 뱉은 말이지만 틀리지 않을 거다.

나는 도진이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몸집을 불려가는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두 사람이야 도진이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안심이고, 그렇다고 몬스터가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릴 이유도 없으니.

그런데 도진이가 앞으로 나섰다.

“잠시만요. 저도 가겠습니다.”

“나 혼자면 충분해. 그리고, 너는 위험할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명색이 헌터 아카데미 교관인데 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괜히 한 번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전혀 흔들림 없는 도진이의 눈빛을 보던 내가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 너도 학생들에게 들려줄 무용담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무용담은 이미 하나 있습니다만.”

씨익-.

이 녀석, 어느새 이렇게 든든해진 거지.

“다녀올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시연이와 시은이도 불안한 눈빛이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보다 나은 선택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번에도 다쳐서 오면 가만 안 둬. 진짜.”

그런 걱정스러운 눈으로 볼 것 없다.

네 남자친구는 이 삼촌이 지켜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