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94화 (94/153)

귀환자 식당 94화.

한국 정부가 열심히 북학과 일정을 조율하고 있을 시기.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방문을 받았다.

“네가 여기를 찾아올 줄은 몰랐네.”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 아니지?”

능력은 인정하지만, 3개월 동안이나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도 내가 가장 대하기 까다로웠던 인물.

하밀은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하얀색 롱코트를 입고 가게로 들어섰다.

모두가 거지 같은 꼴을 하고서 게이트를 공략할 때도 이 녀석은 늘 깔끔하게 있었지.

“여전하네.”

“사람이 쉽게 변하면 안 되지.”

이루가 나와 앙숙에 가까운 사이였다면, 하밀은 나와 가장 라이벌에 가까운 녀석이었다.

헌터들의 수가 줄어가면서 내 능력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졌고, 가장 날 경계하던 녀석이었다.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당시 살아남았던 헌터들은 15명.

나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 남은 인원들이 거의 반반으로 나누어졌었다는 걸.

나를 리더로 생각하고 따르던 헌터들이 있었고, 하밀을 리더로 생각하는 헌터들이 있었다.

라미야와 유리코프. 그리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날 미워하면서도 하밀보단 주로 내 의견에 손을 들었던 이루가 내 쪽.

메를린이나 블랙은 하밀의 편에 가까웠다.

언제나 철저한 계산과 계획을 정해 움직이는 게 아마 메를린이나 블랙의 성격과 맞았던 거겠지.

솔직히 나는 그런 부분에선 무신경에 가까웠다.

“그래···. 넌 늘 권력을 좇았었지. 돌아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고.”

“훗-. 진, 너는 지금 내가 단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조금은 냉소적인 표정과 말투.

하밀은 계산적이고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긴 하지만 음흉한 성격은 아니다.

“세상 모두가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살지 않으니까. 결국 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우린 그저 보이는 데로 믿을 수밖에.”

“···그런가. 하지만 아직 이야기하기엔 일러. 나도 사실 아직은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니까. 조금 더 확실해지면··· 그때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게 좋겠군.”

내가 하밀의 말에 뭔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말이 이어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약속하지. 난 권력을 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래. 너와 나, 그리고 나머지 5명. 거기에··· 대마도에서 훈련 중인 이들, 아직 자기 능력을 깨우치지 못한 예비 각성자들까지.”

결국 하밀이 말하는 ‘우리’라는 말은 전 세계 각성자 전체를 뜻하는 거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넌 뭘 알고 있는 건데?”

“진. 아직은 때가 아니야.”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녀석.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유가 설마 ‘아직은 말해줄 수 없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겠고.

“여긴 그저 누굴 만나기 위해서 지나가다 인사차 들린 것뿐이다. 미국에서도 네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면서 가게를 둘러보더니 살짝 웃음을 지었다.

비웃음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짜 작은 미소.

“그래··· 원하던 삶을 찾았나?”

“글쎄.”

몬스터나 게이트가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 수도.

하지만 지금 같은 세상은 결코 내가 원하던 삶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엔 대체 누굴 만나러 온 건데?”

하밀이 한국에 아는 사람이 있나?

물론 대마도에는 나머지 5명이 있긴 하지만 말하는 뉘앙스로 들었을 때 그들은 아니다.

아마도 처음 만나는 사람일 텐데, 그럴 만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는다.

“너도 잘 알 텐데. 네스티라고.”

“···네스티?”

내가 왜 진작에 그 아이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을 정도로 당연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밀이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아마 이 녀석의 수완이라면 벌써 CIA 같은 기관의 기밀이란 기밀은 죄다 파악하고 있을 테고.

네스티에 관한 것도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래. 너도 이미 알겠지만, 지금 나오는 게이트나 몬스터는 예전과 달라.”

등장하는 녀석들의 등급이 비교하기조차 힘든 수준이다.

아마 헌터가 아니라 관련 자료를 어느 정도만 찾아볼 수 있는 이라면 분명 느꼈을 일.

“아마도 이건 인류에게 내려진 두 번째 시련.”

“···두 번째라니?”

“첫 번째는 바로 우리가 30년 전 죽였던 첫 번째 마왕. 그리고 이번이 아마도 두 번째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생각했다.

왜 굳이 두 번째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하고.

“설마, 이게 끝이 아니란 소리냐?”

“···나 역시 누구보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는 사람이지만, 아마도 아닐 거다.”

“어째서?”

그럼 이게 언제까지고 계속된다는 소리인가?

계속해서 강해지는 몬스터가 나온다면 어차피 결말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인간의 멸망으로 말이다.

“리안 네필스의 예언이 있었으니까.”

설마 거기 나오는 8개의 구슬 조각이라는 걸 말하는 건가?

하지만 리안의 예언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맞아. 그 녀석의 예언은 틀리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진, 네 말처럼 모두 이뤄질 거라고 믿긴 힘들지.”

“그런데?”

“그래서 여기 온 거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

“너, 설마. 네스티가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직 아이다.

평범한 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결과 다른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특별할 뿐.

“그래서 말했잖아. 아직은 말해주기가 조금 이르다고.”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만약 네스티한테 무슨 이상한 짓이라도 하려는 거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어쩌면 네스티라는 그 아이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나도 굳이 미움받고 싶지 않거든.”

하밀은 그렇게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문 밖에는 CIA 요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마력을 가진 각성자였다.

“밥이라도 먹고 가지?”

“···난 한식은 별로라.”

인종차별주의자나 백인우월주의자까진 아니지만, 하밀은 은근히 유색인종을 무시하곤 했지.

아니, 메를린이나 유리코프도 무시했으니까 그건 아닌가?

그저 미국찬양 주의자라고 해야 하려나.

“여기까지 왔는데, 헌터 연합 의장 자리에 대해선 할 말 없나?”

“그 문제는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해야겠지. 둘이서 식당에서 해결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나라와 나라.

이미 전 세계 각국에서 가입 요청이 쇄도하는 국제적인 기관의 장을 정하는 문제니. 하밀의 말이 맞다.

“기다리지.”

“···아카데미 학장을 맡더니 달라졌네? 아니, 달라졌으니까 맡은 건가? 예전에는 그런 자리야 어찌 되든 상관 하지 않을 성격이지 않았나?”

“순서야 어찌 됐든 상관없지 않겠어? 네 말처럼 정말 그렇게 큰 문제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면 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다시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만 가보겠다.”

뭔가 할 말이 더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밀을 잡진 않았다.

저 녀석이 말을 아끼는 거라면 지금은 내가 알 필요도, 안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는 말일 테니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긴 했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신뢰한다.

이루도, 라미야도. 유리코프도 있지만, 만약에 내 등을 맡겨야 하는 한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아마도 하밀을 고를테니까.

“기다리겠다.”

네가 나에게 모든 걸 말해줄 그 날을.

“아, 하밀. 잠깐만.”

자동차에 오르려던 하밀을 다시 불렀다.

“뭐지?”

“하나 궁금한 게 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하던 주제와는 상당히 벗어난 질문을 던졌다.

그저 아주 어릴 적부터 궁금했던 하나.

“···나사에 있다는 외계인 이야기, 진짜냐?”

크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까지야.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세상에 살면서 그게 궁금하다고? 진짜로?”

“···잘 가라.”

생각해보니 그렇네.

몬스터 역시 어찌 보면 외계 생명체인 것을.

* * *

라미야에게 부탁하면 편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걸, 굳이 비행기를 타고 간다는 하밀이 떠나고.

위층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덕윤이가 내려왔다.

“···사장님. 방금 그 사람 하밀 로넌 맞죠? 미국의 귀환자.”

“그래.”

“와··· 진짜 잘생겼네요. 분위기도 완전 멋있고.”

뭐 그야··· 금발에 푸른 눈, 거기에 각성자 버프까지 받았으니.

거기다 동양 사람들은 은근히 백인들의 외모를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그런데 뭔가···.

“어째 내 분위기는 별로라는 것 같네?”

“아, 아니죠! 물론 사장님이 훨-씬 더 멋있으십니다!”

엎드려 절받기 같은 느낌이긴 한데, 외모에 굳이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삼촌, 삼촌! 조금 전에 가게에서 나온 사람 누구예요? 완전 멋있던데!”

시은이가 가게로 오다가 봤는지, 호들갑을 떨며 들어섰다.

“···하밀.”

“아아-! 그 미국의 얼음 왕자요?!”

“하, 왕자? 다 늙어빠진 노인네한테 왕자는 무슨!”

같잖은 별명이 유독 더 거슬린다.

“응? 근데 나이는 삼촌이 ㄷ···. 으읍!”

“하하··· 사장님, 시은이랑 저는 채소 다듬을까요?”

조금은 유치했나.

두 사람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마당으로 나와 전화를 꺼냈다.

뚜르르르.

-네. 선생님. 회담 날짜는 아직···.

“아, 그게 아니라. 혹시 하밀 로넌이 입국한 것, 몰랐었나?”

-물론 알고 있었죠. 벌써 며칠이나 된 걸요.

너무 당연하게 이야기하길래, 나는 기억을 잠깐 더듬어봤다.

···분명 나한테 말한 기억은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밀 로넌이 입국했는데 나한테 알라지 않았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네? 아, 그건 당연히 아실 줄 알고···. 입국 한참 전부터 뉴스에서도 여러 차례 나왔고, 온라인에서도 난리가 났었는데요. 정말 모르셨어요? 입국하고 공식적인 기자회견도 하고 그래서 당연히 아실 거라고만···.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꼭 저희쪽에서 보고를!

“아-. 아니야.”

생각해보니 내가 언제부터 이런 사람들한테 보고받고 살았다고.

그게 너무 당연시되어버렸다는 게 조금 당황스럽다.

그런 보고를 하는 게 안정민의 의무사항도 아닌데 말이지.

호의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었던 모양이네.

조금 반성해야겠다.

* * *

회담 날짜가 좀처럼 정해지질 못했다.

정상회담까진 아니더라도 각국의 실무진이 만나는 자리라 그런지 상당한 준비가 필요한 건 이해하지만···.

오랜만에 인벤토리를 열어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었다.

자신이 ‘결투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 녀석이 남기고 간 선물.

그건 일반적으로 몬스터에게 얻을 수 있는 마석이나 부산물이 아닌, 고도의 문명이 만들었을 게 분명한 물건.

이전까지 이런 경우가 없어서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몬스터였으니까 어쩌면 이런 것을 남기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걸 대체 왜 남기고 간 거지?”

애초에 죽기 위해 온 녀석이.

이제 곧 우리와 전투를 치를 ‘누군가’가 경고의 차원에서 보낸 녀석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뭔가를 실수로 가지고 왔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안이 텅 빈 유리병 하나.

일부러 남기고 갔다는 건 분명한데, 아무리 봐도 그 용도를 도무지 모르겠다.

똑똑-.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심각한 얼굴로 유리병을 쳐다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삼촌, 저희는 준비 다 됐어요.”

“그래.”

문을 열고 나서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시연이와 시은이.

그리고 대마도에서 어제 올라온 도진이까지.

“그럼··· 가볼까?”

도진이까지 가는 건 조금 유난스러운 건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원하고 또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니까.

결국 이렇게 네 명이 되었다.

오늘은 설날.

나도 내 외삼촌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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