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90화.
새벽이슬이 아직 다 내려앉지도 않은 이른 시각.
귀환자 식당 마당에 남자 한 명이 바른 자세로 앉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력은 네 의지를 따라 움직이는 거다. ‘생각’을 하지 말고, ‘의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머리로 생각하면 늦는다. 네가 팔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일 때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듯이 마력을 움직일 때도 그저 네가 움직이고자 할 때 곧장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마력은 내가 아닌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덕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마력은 곧 우주이고 세상이자, 너 자신 이야. 그러니 그 둘을 따로 놓고 생각해선 안 된다.
심오하다고 해야 하나? 이 선문답 같은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무슨 무협 소설에서나 보던 글을 다시 떠올려봤다.
이제 친구라 부를 수는 없지만, 잠깐이나마 함께 했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했을 때의 그 느낌을 떠올려보고.
사장님이 시범 삼아 보여주던 당시 느껴지던 감각을 기억해 본다.
알듯 말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처럼 사그라진다.
“후우···.”
덕윤이 깊은숨을 토해내고선 잠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침에 명상할 때는 꼭 이 자리에서 하도록 하고.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장님이 시키는 건 무조건 따르고 보자는 게 덕윤의 철칙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장님이 정해준 자리에서 한 뒤로는 뭔가 머리가 더 맑은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오빠, 뭐하고 계세요?”
아아악-!
지금은 새벽,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아서 아직도 어두운 아침이다.
당연히 식당 문은 열지 않았고,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이들도 이 시간에 식당을 들르지는 않는다.
당연히 올 사람이 없어야 정상이고, 오래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
덕분에 이렇게 탁 트인 공간임에도 마음 놓고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건데.
“아, 깜짝아! 놀랬잖아요.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세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놀래킨 사람이 누군데···. 속으로만 그 말을 삼킨 덕윤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런데 시은씨가 왜 이 시간에 여길···.”
“왜긴요. 어제 이야기 한 거 잊어버렸어요? 저 당분간 주방에서 일 돕기로 했잖아요.”
“아···. 그, 그랬죠.”
돕는 게 될지, 방해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도 속으로 삼켰다.
아직 덕윤에게 시은이나 시연이는 조금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바닥이 차가운데··· 왜 여기서 그러고 계세요?”
“네? 아··· 이거 사장님이 시키신 훈련 중에 하나에요. 매일 아침 일과죠.”
“삼촌이요? 흐음···.”
어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시은을 보며 덕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번 앉아보라고 권했다.
“여길요? 싫어요. 여자는 찬데 앉는 거 아니라고 했어요.”
“앉으면 차갑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따듯하고··· 뭐랄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일 겁니다.”
“···진짜죠?”
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거짓말로 시은을 맨바닥에 앉힌 걸 나중에 사장님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의심을 지우지 않은 채, 덕윤이 앉아 있던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은 시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때요? 제 말 맞죠?”
“와··· 네.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렇지?”
“다른 데는 안 그런데, 딱 이 자리만 그래요. 아마 사장님이 뭔가를 해주신 것 같은데.”
“뭔데요?”
덕윤은 그 말에 멀뚱한 표정으로 시은을 쳐다봤다.
“···그야 전 모르죠.”
“알지도 못하는데 앉으란다고 앉아있었던 거예요? 그것도 매일?”
그 말에 덕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과연 이 꼬마 아가씨는 알까? 자신이 삼촌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그 사람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하게 느껴지는 사람인지를.
* * *
비록 하루긴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가게를 열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제대로 준비하고 싶어서 새벽부터 시장으로 나왔다.
“혹시 횟감 찾으세요? 오늘 들어온 참돔인데, 선어라 싸게 드립니다!”
“씨알 좋은 낚지 있습니다!”
“자연산 홍합! 자연산 새조개!”
각자의 방식으로 소리치는 상인들.
그들과 흥정을 주고받는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까지, 수산 시장은 그야말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삼촌, 여기 엄청 정신없네요. 근데 뭘 할지는 정하신 거예요?”
“아직. 물건이 다 좋아서 고르기가 힘드네.”
꺅-!
갑자기 커다란 대광어 한 마리가 펄떡거리며 수조에서 빠져나와 놀란 시연이가 소리를 질러버렸다.
“하하하. 아가씨 목청이 쩌렁쩌렁하네그려.”
으하하하-.
딱히 피해를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놀랐는데, 사과도 없이 농이라니.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보아하니··· 장사하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고, 애인이랑 구경하러 왔나 보네?”
“네, 네? 그, 그런 게···.”
“뭘 쑥스러워 하고 그래. 자요. 이건 내가 미안해서 드리는 거, 집에 가서 살짝 데쳐서 먹으면 쫄깃하니 맛있어요. 요즘이 제철이라 아주 맛이 좋아.”
그러면서 작은 검은 봉지 하나를 손에 쥐여준다.
슬쩍 내용물을 보니, 손질이 깔끔하게 된 새조개였다.
그래···. 예전에도 날이 추워지면 새조개로 간혹 샤브샤브를 해 먹곤 했었지.
“사장님. 이거 얼마씩 합니까?”
“새조개요? 에이- 이건 내가 미안해서 그냥 드리는 거라니까. 애인이 워낙 미인이기도 하고. 하하하-!”
“아뇨. 저도 식당을 하는데, 오늘은 새조개 샤브샤브를 해볼까 해서요.”
“응? 식당 사장님이셨어? 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데, 처음 봐서···. 새조개 샤브샤브 좋죠! 새벽에 조업해서 바로 까서 올라온 거라 엄청 싱싱해요. 킬로당 딱 6만 원! 어때요. 다른 데 가도 이거보단···.”
“좋네요. 그럼 싱싱한 것들로 10킬로만 부탁드립니다.”
내가 두말없이 승낙하자, 사장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하. 내가 또 이렇게 한 번에 오케이 하는 손님은 처음이네. 좋아, 기분이다! 첫 거래니까 특별히 할인해서 5만 원! 대신 다음에도 우리 가게로 오시기야?”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어중간한 말투.
내가 어려 보이니 그런 거겠지. 솔직히 저런 친근한 화법은 그리 싫지 않다.
“그러시죠.”
“거, 젊은 사장님이 화끈하구먼.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사장은 잠시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얼음이 든 아이스박스에 새조개와 함께 다른 것도 슬쩍 집어넣었다.
“돌문어 한 마리 더 넣었어요. 숙회로 서비스나 좀 내주면 좋아들 한다고.”
아이스박스를 들고 가기 편하게 노끈으로 묶으면서 내게 살짝 언질을 준다.
“어머, 손님 오셨었구나. 사장님은 뭐 사셨나?”
“어어··· 왔어? 새조개 10킬로. 계산 좀 해드려.”
끈을 묶는 손이 빨라졌다.
아마도 아내인 모양인데, 내게 서비스를 준 게 들킬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새조개 10킬로면 60만 원 결제해드리면 되지?”
“크흠. 그··· 50만 원 결제야.”
“···뭐? 10킬론데 왜 50만 원이야?”
“아니··· 첫 거래시고해서 할인을 좀 해드린 거지.”
“이 양반이! ···나중에 이야기해.”
띠딕- 띠익-.
카드로 결제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왠지 이 한편의 콩트 같은 상황에 살짝 웃음이 났다.
“삼촌, 갑자기 왜 웃어요?”
“아니. 그냥 저 사장님들 말이 웃겨서.”
“그, 그렇죠? 어휴, 애인이라니···.”
아까부터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게 그 말 때문이었나?
“신경 쓰지 마. 삼촌이 젊어 보여서 그런 거지,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닐 테니까.”
“···그런 건 아닌데.”
시무룩해 하는 시연이의 머리를 다독여준 뒤, 우린 수산시장을 벗어났다.
장을 보는 건 이제 시작이다.
이제 새조개 샤브샤브에 넣을 소고기와 채소도 사야 하고, 덕윤이가 쓸 생필품도 필요하니까.
* * *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육수통을 불에 올렸다.
육수는 다시마와 대파, 멸치만 넣어서 끓이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정했다.
새조개만 먹는 것이라면 가리비나 바지락 등을 넣고 끓여서 더 진한 해산물 육수가 낫겠지만, 오늘은 소고기도 함께니까.
너무 바다향이 진한 것은 자칫 비릴 염려가 있다.
“시은이는··· 음.”
오늘은 손질할 재료가 정말, 무척이나 많다.
일단 다양한 채소들.
끓이는 육수에 넣으면 금세 숨이 죽어버리는 게 채소인데다, 샤브샤브는 채소가 많아야 맛있다는 건 너무 당연한 사실.
그렇다고 채소 몇 조각 더 주면서 손님들에게 추가 요금을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늘은 이틀간의 무단 휴일과 어제의 허술했던 메뉴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기도 하니까.
이틀 연속은 무리일까 싶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영훈 사장에게 전화했는데, 너무 흔쾌히 와준다고 했다.
그러니 더 잘 준비해야겠지.
소고기는 마블링이 적당한 등심 부위를 얇게 썰어서 준비했다.
그 외에는 배추, 청경채, 팽이버섯,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대파, 당근, 양파, 무.
혹시나 찾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숙주와 청양고추도 조금씩.
그러니 정말 오늘의 일은 재료 손질이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정말 괜찮겠어?”
오늘은 칼질보단, 주로 씻는 일이 된다.
지금은 1월의 초입. 그저 춥다는 말로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기온이 낮은 날인데, 이런 날 채소를 씻는다는 건 정말 고역이다.
그렇다고 따듯한 물로 씻을 수도 없다.
상추 같은 것들은 조금 따듯한 물에 담가두면 오히려 싱싱해지곤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시들해지는 여름이나 그런 거지.
“삼촌, 잊고 계신 거 같은데. 저도 각성자거든요?”
“···그렇긴 하지.”
시은이도 각성자이긴 하지.
아무리 신체 강화 계열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 추위에 어찌 될 정도로 약하진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마음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싫었다.
저 고사리손으로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채소를 씻거나 하는 게.
무엇보다 의사가 될 아이의 손인데, 괜히 험한 일을 하게 두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오늘은 안 되겠어. 그냥 집으로···.”
“삼촌!”
“···응?”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왕 배우기로 했는데, 가리면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배우겠다고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그래도 오늘은 너무···.”
“삼촌, 절 겨우 하루 만에 포기하는 아이로 만드실 거예요?”
하아.
이렇게 나오면 내가 이길 방법이 없다.
시연이도 그렇지만 시은이도 고집이 보통이 아닌데다, 솔직히 틀린 말을 하는 아이들도 아니니까.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오면 결국 백기를 드는 수밖에.
물론 논리 같은 걸 무시해버릴 상황이라면 그러겠지만, 시은이 말대로 이왕 요리를 배운다고 마음먹었는데.
상황에 따라 피해버린다면 의미가 없다.
음식의 기본은 재료.
요리의 기본은 손질부터 시작하는 법이니까.
“좋아. 그럼··· 일단 간단한 대파부터 씻어볼까?”
대파 10단.
일반 가정집에서는 김장철이 아니고선 볼 일이 없을 정도의 양이다.
하지만 여기는 식당이고, 한식에 대파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찾기 어렵다.
“사장님. 짐 다 내렸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씻어볼까? 씻고 나면 덕윤이는 깨끗하게 손질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시은이가 씩씩한 표정으로 팔을 걷어붙이며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덕윤이도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어색하지 않았고.
“···삼촌은요? 같이 안 해요?”
“나? 난 사장이잖아. 원래 이런 건 주방 보조들이 하는 거야.”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치사해.”
시은아.
세상은 원래 치사한 곳이란다.
평소라면 덕윤이와 함께 하곤 했지만, 굳이 세 명까지 필요한 일은 아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덕윤이를 좀 살펴보고 싶었다.
덕윤이 녀석의 몸속을 떠도는 마력.
마력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불과 어제만 하더라도 가만히 고여있는 잔잔한 호수 같았던 것이.
비록 아직은 아주 작긴 하지만, 어딘가로 흐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
드디어 본격적으로 가르칠 때가 된 건가?
라미야.
너에게 보낼 조수가 조금 더 일찍 준비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