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88화.
살짝 미안하긴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날 일의 수습은 이루에게 맡겼다.
어차피 가장 반발이 거셀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처리했으니 남은 일들은 오히려 아무런 반발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
충격이 큰 걸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다른 것들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언제까지고 가게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벌써 이틀이나 쉬었으니까.
“히잉. 난 더 있다가 와도 되는데.”
시은이가 입술을 삐죽이기는 했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삼초온.”
“안돼.”
다른 건 몰라도, 아직 외박은 절대. 절대로 허락해줄 수 없다.
조금 치사하게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하면서 살고 싶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러자면 당연히 독립해야겠지.
이건 그저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의 부모님이 계셨다면 분명 그랬을 테니까 말이다.
“시은아, 이건 삼촌 말이 맞아. 언니도 그건 허락 못해.”
“알아. 그냥 한 번 해본 말이다. 뭐.”
대마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난리를 치는 동안, 시은이는 태평할 정도로 좋은 시간을 보냈다. 도진이와 함께.
오래전 이미 발길이 끊긴 관광명소들은 자연의 손길이 더 해져 더 멋있게 변했고, 결정적으로 그곳엔 둘만 있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두 사람이 만난 이후로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을테니 아쉬운 건 이해한다.
그래서 내 말에 더 서운한 듯하지만, 그래도 그런 걸 이해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아이는 아니다.
오히려 시연이한테 미안했다.
와있는 동안 거의 내 비서처럼 내 뒤를 따라다니기만 했으니···. 하지만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라미야, 너는?”
아직 정식 배편이나 비행기 편이 마련되진 않았다.
대마도에 온 비행기들 역시 대부분 각성자들만 내려준 뒤 돌아가서 이미 남아있는 운송 수단이라 할 만한 것들도 없다.
결국 우린 왔던 것처럼 라미야의 능력에 의존하는 수밖에.
“나야 어차피 돌아와야 하니까 너희만 데려다주고 다시 와야지.”
“네스티 때문이라면 내가 돌봐줄 사람을 구할 수도 있어.”
내가 거의 반강제적으로 불러온 거긴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일국의 공주 신분이다.
솔직히 와주면 좋고, 안 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던 부분이었고.
그래서 남기 싫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냐. 네스티는 내가 돌봐야지. 대신, 다른 각성자들과 똑같은 규정을 적용하진 않을 거야. 그 정도는 너도 이해하겠지?”
“그래. 이미 아카데미 규정에도 포함해놨어.”
라미야의 저 협박성 눈빛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에 대한 조치는 취해뒀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겨우 6살 남짓한 네스티를 적어도 18세는 되는 교육생들과 동일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만 15세 미만의 아동에 대한 입학을 제한하지만, 그 능력이 독보적이거나 이후 긴급 상황 시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아카데미 교수 회의를 통해 입학을 허가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에 따라 필요하거나 추가해야 할 사항도 수십 가지나 달렸다.
사실 이건 네스티를 위해 만든 규정이고, 아마도 이후에는 규정에 해당하는 아이가 없을 거다.
어지간해서는 말이지.
“그럼 됐어. ···내가 엄마잖아.”
어떤 기분일까.
솔직히 라미야의 기분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인데.
나야 네스티와 함께 살아본 적도 없고, 같이 시간을 보낸 것이라고 해봐야 집에 머무는 잠깐이었을 뿐이니까.
“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해. ···근데 잠깐만.”
너무 자연스럽게 동행하려고 해서 순간 잊고 있었는데, 라미야는 능력을 사용할 때 굳이 함께 다닐 필요가 없다.
제 3자를 이동시키는 것도 가능하니까.
심지어 상대방의 동의가 없이도 말이다. 물론 나는 예외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그 능력으로 전투할 방법이 없겠지.
“너는 왜 같이 가려는 거야?”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거라면. 굳이 뭐 하러? 우리만 보내주면 그만이 아닌가.
그런데 라미야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네가 해주는 요리 먹어보고 싶어.”
무슨 소리지? 안 먹어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너 우리 집에 있을 때 먹었던 밥. 전부 내가 만든 거야.”
“그, 그런 거 말고.”
“그럼··· 식당 음식을 말하는 거야?”
“그래. 다 같이 먹는 것 말고, 나만을 위해서 요리해주는 거.”
공주라 서민 생활을 모르는 건가? 아니면 한국 식당을 가본 적이 없어서 착각을 하는 건 아닌가?
“한국 식당은 레스토랑이 아닌데?”
한 접시마다 정성을 들이는 그런 고급 코스 요리와는 다르다.
아마도 그걸 모르고 있는 것 같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식당에서 먹는다고 해도 네가 집에서 먹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어째서? 레스토랑이잖아?”
그래. 이게 바로 통역 마법의 한계이자 단점이다.
상대방이 의미하는 바를 전달하는 와중에서 서로 간의 문화 차이나, 알지 못하는 단에 대해서는 그저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
라미야는 한국 식당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저 그녀가 아는 가장 비슷한 단어로 대체한 거다.
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줘야 할까.
“뭐야··· 그럼 그 식당이라는 게 그냥 밖에서 밥 먹는 것 외엔 의미가 없는 거야?”
짧게 설명했지만, 라미야는 금세 알아들었다.
“뭐··· 비슷해.”
가정에서 만들기 어렵거나 번거로운 것들일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식당’이라는 건 그런 개념에 가깝지.
“아, 알았어. 그런 거면 뭐···.”
왠지 모르게 조금 전보다 더 붉어진 얼굴.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일단 같이 갈 의사는 현재 없어 보인다.
“그럼 우리만 보내줄래? 서둘러 돌아가야 할 것 같거든.”
벌써 오후 3시가 넘어간다.
5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단골손님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
빛무리가 몸을 감싸면서 살짝 떠오르자, 저번처럼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여전히 꺅꺅거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와.
저녁 메뉴는 뭘 해야 하는 걱정거리가 머릿속을 함께 맴돌았다.
* * *
“응? 너희들이?”
돌아오고 바로 집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식당에 남았다.
날 돕겠다면서.
···시연이는 모르겠지만, 시은이가?
“그럼요! 오늘은 오빠들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언니랑 제가 도울게요. 아무리 삼촌이라도 혼자는 힘들잖아요.”
“저기··· 저도 있는데.”
덕윤이가 슬쩍 손을 들었지만, 이내 묵살 당해버렸다.
“그래요. 삼촌,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요? 자, 그럼 그런 걸로 하고, 전 뭐부터 할까요?”
너무나 당연하게 시연이가 앞치마를 걸치는데, 시은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오늘 주방은 내가 들어갈래!”
“뭐? 안 돼. 주방이 얼마나 위험한데···.”
“아, 왜애! 나도 음식 배우고 싶단 말이야!”
시은이가 평소에 요리에 관심이 있었나? 아니,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전혀.
설령 관심이 있다 해도, 여긴 식당이다.
일반 가정집과는 조리기구 사용법도 다르고, 무엇보다 시연의 말처럼 위험하다.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칼보다 훨씬 날카롭고, 화구의 화력은 강하며, 조절하기가 어렵다.
무쇠 웍이나 냄비는 무겁고, 무엇보다 대량으로 음식을 하기 때문에 집에서 하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아직 자전도 제대로 못 타면서 산악용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우기는 셈이다.
“그래. 시은아··· 아무래도 주방은···.”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시은이가 요리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나?
시연이야 가장이기도 하고, 단둘이 살 때 집안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으니 기본적인 음식 정도야 한다.
물론 시은이야 고등학교 3학년이란 특수한 환경에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하자면 못할 정도로 바쁘진 않았었지.
그런데 왜 갑자기 요리에 흥미를 보이는 걸까.
“···갑자기 요리는 왜? 너, 혹시 도진이한테···.”
붉어지는 얼굴이 바로 대답이겠지.
딸그랑-.
작은 쇠국자가 주방 바닥의 타일 위를 뒹굴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조금 전까지 내 손에 들려 있던 국자가.
“그런 게 아니라···.”
이해한다.
그래, 원래 요리란 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해주고 싶어서 배우는 경우가 많긴 하지.
나도 그랬었나? 이젠 기억도 나질 않지만, 확실히 부모님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도 그랬었거늘, 시은이에게 서운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근데 서운하긴 하네.
풉-.
내 표정이 볼만했던 건가.
시은이랑 시연이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덕윤이 녀석은 애써 참는 게 뻔히 보이고··· 차라리 웃어라 그냥.
“삼촌,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시은이가 얼마 전부터 설날에 음식 하나는 꼭 자기가 하고 싶다고···. 그래서 제가 삼촌한테 가르쳐달라고 하는 게 어떠냐고 했어요.”
“설날?”
“···기억하시죠? 우리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이런··· 나 혼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건가 보다.
“할아버지한테 제가 해드린 음식 꼭 대접하고 싶어요. ···전에는 못 해 드렸으니까.”
애써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
살아 계실 때 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 담긴.
“···들어와. 대신, 이 안에서는 절대 까불거리거나 하면 안 된다?”’
훌쩍-.
코를 한 번 훌쩍인 시은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쉪!”
장난치지 말래도.
그래도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으니까.
* * *
도착하자마자 고민을 해봤는데, 사실 딱히 메뉴로 뭘 정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가장 처음에 내가 손님에게 대접했던 음식을 간단하게 차리기로 했다.
[오늘의 메뉴]
[참치김치찌개&계란말이]
사실 어디 식당에서 메뉴라고 내 걸기에는 다소, 아니. 많이 부족한 음식이긴 하다.
가게를 정식으로 열기도 전에 가장 먼저 찾아왔던, 강영훈 사장에게 만들어줬던 음식.
“삼촌, 요리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응? 제일 중요한 거···?”
분명 내가 가르치는 입장인데, 뜬금없이 물어보니 선뜻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무래도 적당한 간? 아니면 신선한 재료?”
“에이-. 삼촌은 쉐프면서 그런 것도 몰라요?”
쉐프라.
한식당 주방장을 보통 쉐프라고 부르진 않아서 어색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그럼 뭔데?”
“그건 바로···!”
도도도도-.
“이 녀석, 장난은 금지랬지!”
커다란 도마 위에 장난스럽게 젓가락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려고 하다가 결국 한 차례 혼이 났다.
그래도 기는 죽지 않는다.
“아무튼!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사랑과 진심이라고요!”
“···응. 그래. 아까 칼 잡는 방법은 알려줬지? 조심하고, 거기 대파나 좀 썰어봐.”
사랑을 듬뿍 담아!
혼자 그렇게 외치면서도 칼을 조심스럽게 잡고선.
···사각. ···사각.
흰 눈이 쌓인 곳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꼬마처럼, 조심스럽게 대파를 썰어간다.
어느새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고, 주방에는 김치 볶는 냄새와 함께 시은이의 칼질만 가득 차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볶은 김치를 넣고 참치를 듬뿍 넣은 찌개가 끓기 시작하자, 처음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사장님! 저희 왔습니다!”
“어?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솔바람 인테리어의 강영훈 사장과 직원들.
평소에는 일을 마치고 샤워까지 하고 오기 때문에 7시는 훌쩍 넘어야 오던 이들인데, 오늘은 6시도 되기 전에 도착했으니.
“사실··· 저희가 엄청난 계약 건을 따냈지 뭡니까! 그래서 오늘은 일찍 마치고 축하도 할 겸 회식하러 왔습니다!”
“엄청난 계약이요? 뭔지 궁금한데요?”
이미 알고 있지만, 이럴 땐 모르는 척해줘야지.
“그게 다름이 아니라···.”
킁킁-.
말을 하다 말고선 갑자기 코를 벌름거리는 강영훈 사장.
“어? 오늘 참치 김치 찌개였습니까?”
“네. 가게 앞에 메뉴판 못 보셨어요?”
“하하··· 저희야 늘 그냥 들어오기 바빠서. 가끔 보긴 하는데··· 여긴 그냥 믿고 오는 식당 아닙니까. 하하.”
참 고마운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식당을 못 그만두지.
“아무튼, 대마도 계약 건 축하드립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라? 방금 말한 거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