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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 식당-82화 (82/153)

귀환자 식당 82화.

살면서 이렇게 행복감이 충만했던 시절이 있었나?

유리코프는 요즘처럼 미소를 지으며 살았던 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게이트 사태가 벌어지고, 많은 이들을 잃었고 그 뒤로는 그저 복수를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의 피를 손에 묻혔는지 모른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유리코프는 맨손 격투의 달인.

게이트에서 돌아온 뒤, 30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내와 딸에게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갔었는데.

30년이 지나버렸다는 말에 정신이 거의 반쯤 날아갔었다.

아내와 딸이 정부의 지원 덕에 그나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말이 작은 위로가 되었을 뿐.

딸이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건 유리코프에게 엄청난 좌절감과 절망을 안겨줬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래.

어린 시절의 딸을 꼭 빼닮은 이 손녀가 아니었다면 정말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안나, 정말 후회 하지 않을 자신 있어?”

“안 해요. 절대로.”

아직은 조막만 한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불안하기만 하다.

“···굳이 네가 아니라도 나설 사람은 많아.”

왜 이러는지는 안다.

힘을 가졌으니, 남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

‘고 녀석 성격이 딱 나를 닮았단 말이지···.’

확실히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는 게 악한 것보단 낫다.

하지만 살면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걸 이젠 너무 잘 안다.

특히나 마지막에 내린 결정으로 자신은 너무 많은 걸 잃었으니.

자신의 성격을 꼭 빼닮은 손녀를 보면 기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같이 들곤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본인이 나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결국 같은 거라고.”

끄응-.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건 그렇지만···.”

“저, 자신 있어요. 할아버지 이름에 먹칠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먹칠이 아니라, 똥칠을 해도 된다.

네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 * *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걱정은 왜 이리 많은지.

분명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잠깐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거의 무식함의 대명사 같던 녀석이 이렇게 감성적으로 변하니 적응이 잘 안된다.

“너도 딸 낳아서 길러봐라.”

“안나가 딸은 아니잖아.”

“내 딸의 딸이니까 딸이나 마찬가지야!”

아니. 손녀라는 말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

말을 삼킨 나는 그냥 웃으며 유리코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잘 지켜봐 주면 되잖아.”

“···내가?”

“응. 너도 같이 가야 하거든.”

유리는 날 보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자, 잠깐··· 나는 이제 뭘 할 생각이···.”

“전 세계에서 각성자들이 죄다 모일 거야. 이미 모이는 중이고, 러시아도 꽤 보내는 걸로 아는데?”

“그거야 그렇지. 안나도 거기에 포함되니까···.”

“안나 외모면 인기가 상당하겠지?”

이거 이러다 낚시에 맛 들이겠다.

유리코프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걸 보는 게 즐거울 줄이야.

“뭐, 아시다시피 각성하면 외모가 출중한 거야 말할 필요도 없으니 안나도 그중 한 명이랑···.”

“안나는 이제 겨우 15살이야!”

“나이가 뭐가 중요해. 사실 헌터 아카데미에서 그런 게 의미가 없을 거라는 건, 너도 알잖아.”

지금 부들거리는 거 같은데.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숙소는 기본적으로 일인실이 제공되니까 마음만 먹으면 사실 언제든···.”

“안돼! 감히 어떤 놈이 우리 안나에게 손을 대! 그 자식의 OO을 OOO해서 OOO을 만들어 버리겠어!”

이 녀석, 정상은 맞겠지?

헌터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학교의 개념이다.

그것도 남녀 공학.

문제는 각성자들의 외모가 모두 출중하다는 점이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외모였다가 각성한 이후 급격히 변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거다.

갑작스럽게 얻은 무기는 분명 독이 된다.

모이는 이들의 연령은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그야말로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 게 비정상이라 생각될 나이의 사람들이 수백 명이 모여든다.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있다.

초기에 기강을 잡아두지 않으면, 연애라는 이름의 들불이 온 산을 뒤덮게 될 게 뻔하다고.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유리코프다.

유리 녀석의 손녀가 설마하니 각성자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더 적격인 셈이지.

“뭐, 사실 15살이면 사실상 알만한 건 다 아는 나이지···.”

“웃기는 소리! 내가 간다! 안나에게 찝쩍거리는 놈이 보이면 허리를 반으로 꺾어버리겠어!”

“···그래. 그럼 한국에서 보자고.”

“응? 너는 어쩌려고? 우리랑 같이 가는 거 아닌가?”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문명의 혜택을 즐기는 편이 좋다.

공기를 차면서 날아가는 건 빠르긴 하지만 사실 상당히 귀찮은 일이라 시간이 있으면 그냥 비행기를 타는 게 편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급한 건 아니라지만 느긋하게 처리하느니, 차라리 빨리 움직여서 기반을 다져두는 게 마음도 편하고.

“난 먼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가. 그럼 한국에서 보자고.”

가볍게 악수를 한 뒤, 나는 다시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몇몇이 탄성을 지르며 쳐다보는 것도 이젠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 * *

호화스러울 정도로 잘 꾸며진 병실.

정재계 인사들이 자주 찾는다는 삼영 병원에서도 가장 좋은 병실에 벌써 몇 달째 눌러앉은 환자가 하나 있었다.

“이놈아. 인제 그만 정신 차려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한심하긴.”

쯔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찾은 최진우 회장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보며 혀를 찼다.

명석한 녀석이지만 욕심이 과했달까.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린 게 실수였지.

“아버지, 저 녀석 자존심 아시잖아요. 시간이 더 필요할 겁니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세월만 낭비할 셈이냐?!”

“······.”

호통도 쳐보고, 달래도 보고.

무슨 짓을 해도 반응은 늘 같았다.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이상은 없다.

수많은 검사를 한 결과였지만, 정작 최우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깨어난 이후로 단 한 마디도.

“충격으로 실어증이라고 걸린 건 아닌가?”

“그,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주치의는 그저 죽을 맛.

처음 주치의를 맡았을 당시만 해도 드디어 자신에게 꽃길이 펼쳐지는 줄 알았다.

삼영 그룹 최진우 회장의 둘째 아들인데다, 차기 후계자로 내정된 인물의 주치의라니.

이대로만 잘 풀리면 미래의 병원장도 꿈은 아닐 거라고.

미친 듯이 치료에 매달렸다.

덕분에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 넘어, 어쩌면 다치기 전보다 더 건강한 상태로 만들어놨다.

그런데 그저 입만 닫고 있으니, 마치 자기가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이 빌어먹을 새끼야!’

마음 같아선 정말 귀에다 대고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충격을 받은 건 알겠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맞을 만 하지 않았던가.

그러게 왜 하필 건드려도 그런 사람을 건드린 건지.

솔직한 말로 한심하긴 했다.

물론 말로 할 수는 없지만.

“···도혁아.”

“네. 아버지.”

“전략 기획실은 앞으로 네가 맡아라.”

“···네.”

사실 진즉 이렇게 했어야 하는 일이다.

전략 기획실은 그룹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길을 찾는 핵심 중의 핵심 부서.

그런 곳의 수장을 몇 달이나 비워둔 것 자체로 이미 최진우 회장은 둘째 아들에 대한 의리는 충분히 지킨 셈이다.

“주치의 선생.”

“네! 회장님.”

“이 녀석, 퇴원은 해도 되는 건가?”

순간,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자신을 믿었다.

분명 이상은 없다고.

“네. 의욕이 상당히 저하된 상태지만,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건 제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냥 퇴원시켜 주게.”

“아버지. 그래도 병원에서 케어를 받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제 몸 멀쩡한 놈이 누구한테 수발을 받아. 여기서 이렇게 멍하니 있으니 더 저러는 게지.”

어쩌면 그것도 맞는 소리겠거니.

최도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삐익-.

병실에 달린 인터폰에서 알림이 울리고, 눈치만 살피던 주치의가 얼른 뛰어가 인터폰을 받았다.

“···면회? ···뭐, 누구라고?”

주치의는 수화기를 들고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멍청한 얼굴로.

“···회, 회장님. 저기··· 그, 그분이 오셨다는 데요.”

“그분이라니? 누구를 말···. 설마, 이진이 왔다고?”

“네. 어, 어떻게 할까요···.”

‘이진? 그 자가 무슨 염치로 여기를···.’

대놓고 적대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얼굴을 마주 보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자기 아들을 저 지경으로 만든 원흉이 아닌가.

하지만 왜 이곳으로 찾아온 거지?

만나고 싶었다면 국정원을 통했으면 되었을 일인데.

‘설마, 이 녀석을 만나러 온 건가?’

대체 왜?

설마 여기서 뭔가를 더 할 생각일까?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럴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한다면 확실하게 하되, 뒤끝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저기,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막는다고 막아질 사람인가. 들어오라고 하게.”

“네!”

막아선다?

어쩌면 대한민국 군대 전체를 동원해도 막지 못할 사람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사실 면회 신청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대단한 일이다.

그냥 들어오자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이내 병실의 문이 열렸다.

“어? 여기 계셨나요?”

이진이 들어오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넨 말.

‘역시 날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우혁이 녀석을 만나러 온 건가? 대체 왜?’

악연 중의 악연이라는 걸 모를 리는 없다.

아무리 무심한 성격이라고 해도 사람의 거의 곤죽으로 패놓고서 그런 것도 모른다면 그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그렇네요. 와- 근데 병실이 엄청 좋네요. 이런 병실은 하루만 있어도 엄청 비싸겠죠?”

“저희 같은 사람들은 일반 병실에 가면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합니다. 그보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아. 별건 아니고, 지난 번에 그 물건이요. 저 친구가 아직 구할 수 있나 해서요.”

이진의 말에 최진우 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이 함께 알만한 ‘물건’이라는 게 하나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구할 수 있다고 한들, 설마 그걸 드릴 거로 생각하십니까?”

“하긴, 그건 또 그런가요? 그런데 저는 거기 회장님이 아니라, 저 친구한테 물어보러 온 겁니다만.”

뿌득.

어찌나 이를 악물었는지 최진우 회장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정작 이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최진우 회장은 그 점이 더 화가 났다.

‘···개자식.’

“보다시피 누구 덕에 지금은 말도 못···.”

“아버지.”

“···너?”

“제가 말할게요.”

몇 달간 그렇게 주변 사람들 마음고생을 시켜놓고선, 정작 이진이 오니 입을 열다니.

기가 막혔지만 일단 말을 했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라 믿었다.

“만약 구할 수 있다면··· 근데 그게 왜 필요한 겁니까?”

실험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선, 이제 와 다시 찾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들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듣고 싶었다.

“대마도에 헌터 아카데미가 생기는 건 알고 있지?”

“뉴스는 봤습니다.”

“아카데미 생들의 훈련을 위해서지. 분명 실전이 필요할 테니까.”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시제품을 만들었던 이는 지금 살아있지 않다.

설계도를 보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 데다 위험한 물건인 만큼 신중하게 작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얼마나 걸리지?”

“한 달은 필요합니다.”

“좋아.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지. 따로 필요한 건?”

“마석이 필요할 겁니다.”

“구해주지.”

이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해라.”

“저도 아카데미에서 훈련받게 해주십시오. 그게 조건입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가장 놀란 건 최진우 회장이었다.

“자, 잠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아카데미라니?! 네가 왜 그런···!”

“각성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이진이 물었고, 최우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장비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생각한 건 아닌 것 같고, 이유는?”

“이번 일을 겪고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세상이 왔다는 걸. 그리고···.”

“그리고?”

최우혁이 팔을 들어, 이진을 가리켰다.

“언젠가는 당신을 뛰어넘고 말 겁니다.”

이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거 기대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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