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 식당-80화 (80/153)

귀환자 식당 80화.

광란에 가까운 밤이 지나고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집 테라스에서 이런 걸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지.

확실히 높은 곳에 사니 이런 건 좋네.

한 손에는 방금 내린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테라스 난간에 상체를 살짝 기대봤다.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을 따라 하는 것 같긴 하지만.

“삼촌. 잘 주무셨어요?”

“시연이니? 왜 벌써 일어났어. 좀 더 자지 않고선.”

“그러는 삼촌은요? 이 멋진 장면 혼자 보시려고요?”

처음 만났을 때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아이인데, 어느새 이렇게 넉살이 늘었는지.

하지만 이런 건 무척이나 좋은 변화다.

우우웅-.

그리고 뒤를 이어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아빠?”

한쪽 눈은 뜨지도 못한 채로 날 향해 걷기 시작한다.

내가 침대에 없어서 찾으러 나온 건가?

“···네스티? 얘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지?”

네스티가 나오자마자 어떻게 또 알았는지 게스트룸에서 후다닥 나오는 라미야.

시연은 라미야를 향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들 이런 새벽에 대체···. 처음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려고 모인 건가?”

“너희 나라에도 해돋이 문화가 있나?”

어이가 없다는 듯한 라미야의 표정을 보고서야 내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지 깨달았다.

해는 비단 한국에서만 떠오르는 게 아닌데, 이걸 당연히 한국 고유문화라고 생각했다니.

“새해의 첫 태양은 어느 나라에서나 특별한 의미가 있지.”

“그렇겠네. 두바이 같은 곳에 있었으면 엄청나게 큰 축제를 벌이고 있었을 텐데 아쉽지 않아?”

“이제 그런 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지겨워. 할 만큼 했으니까.”

살짝 재수 없긴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왕족이란 또 왕족들만 느끼는 고충이 있을 테니까.

으으으···.

제법 시끄러웠던 건가?

해가 중천에는 떠야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시은이가 한 손은 머리를 한 손은 벽을 짚으며 거실로 나왔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술 마셔보니 어때? 좋아?”

“으으··· 다신 안 마실 거에요. 맛도 없고, 다음 날 머리도 이렇게 아픈 걸 대체 왜들 마시는 거지···.”

다신 마시지 않겠다라.

과연 그 말이 언제까지 가나 두고 봐야겠지.

“어어? 삼촌! 저기, 저기요!”

시연이의 다급한 부름에 고개를 돌리니, 멀리 보이는 지평선 너머로 진한 붉은빛의 태양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와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5명이 테라스 난간을 붙잡고선 일렬로 늘어섰다.

피곤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억지로 나온 보람이 있는 표정들.

모두 잠시간 그렇게 붉은빛의 태양을 향해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까. 저, 새해 일출을 이렇게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언니 말 들으니까, 나도 그런 것 같은데?”

마음먹고 일출을 보러 어디라도 가지 않는 이상에야, 서울에서 일출을 보기는 사실 힘들지.

새벽같이 일어나 남산이라도 찾으면 모를까.

이렇게 집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상 돈 많은 이의 특권인 셈이다.

물론 내 손으로 이뤄낸 것이니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자, 다들 여기 봐.”

찰칵-.

등을 돌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셔터를 누르는 라미야.

···쟤한테 이런 센스가 있었다고?

“···음, 잘 나왔다. 이거 톡에 올릴게.”

“고마워요. 아, 언니도 이쪽으로 오세요. 이번엔 제가 찍어드릴게요.”

“그럼 그럴까?”

뭐지.

기분이 살짝 묘한 기분이 드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시은이가 얼른 답했다.

“아, 언니랑 저희 멜론톡에 단체방 있거든요.”

“단체방?”

언제 그렇게 친해졌지?

아니, 라미야가 한국에 온 지 고작해야 일주일인데.

그새 이렇게 친해졌다고?

“아뇨. 라미야 언니랑, 시연 언니, 저. 그리고 이루 오빠랑 도진 오빠, 예령이도 있죠.”

“시연아, 어제 미연 언니도 가입했잖아.”

“맞다! 미연 언니도 가입했으니까··· 전부 7명이네요.”

“···삼촌은?”

“삼촌이요? 삼촌은 멜론톡 안 쓰셔서···.”

그래. 그랬지.

나야 딱히 그런 걸로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전화가 편해서 그랬던 건데.

“크흠···. 그럼 나도 가입을 좀···.”

뭔가 따돌림당한 느낌이라 억울하기까지 한데.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톡톡-!

시은이가 보낸 초대로 단체방이란 곳에 들어가자마자 울리는 경쾌한 알람과 함께 이루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루와 옆에서 있는 단아한 차림의 한복을 차려입고 있는 여성도.

“뭐야, 이 오빠 일본에 은지 언니랑 같이 간 거야? 와··· 그 급한 와중에 언니까지 데리고 갔다고? 아무튼 대단하다. 대단해.”

시은이가 살짝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은지 언니한테는 따로 오라고 했었데. 근데 일본에서 한복 입고 다니면 위험하지 않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싫어하는 만큼, 일본 사람들도 한국 싫어한다던데. 괜히 시비라도 걸면···.”

“언니, 잘 생각해 봐. 옆에 이루 오빠가 있는데?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아마 누가 손가락질만 해도 그 사람 손가락 개수가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새롭게 변화를 맞이하는 날이 될걸?”

“음. 하긴 그건 또 그렇겠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동생과 언니의 대화치고는 조금 잔인한 면이 없잖은 것 같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막상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띠릭-.

모두 잠에서 깼으니 자연스럽게 거실의 티비를 틀었다.

늘 나오던 뉴스 채널이 아닌, 어린이 프로그램이 화면에 떠올랐고 네스티가 꺅꺅거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확실히 저렇게 보면 영락 없는 아이는 아이네···.

라미야가 네스티는 아직 더 자야 한다며 안아 들고선 내 방으로 들어가고, 우린 그제야 뉴스를 볼 수 있었다.

화면을 틀자마자 보이는 것은 연말의 축제가 휩쓸고 간 뒤의 현장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떡해.”

“사람들··· 많이 다쳤겠다.”

[이곳은 호주 멜버른입니다. 연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는데요. 보시다시피 지금은 몬스터들의 소탕이 완료된 상태이지만 아직까지 게이트가 사라지지 않아 호주 게이트 관리국은 근방 5킬로미터 이내의 주민을 모두 대피시켜둔 상태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고는 비단 호주뿐이 아니라 현재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

우리가 가게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저들은 생애 최악의 연말을 보낸 셈이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은 들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슬프거나 하는 마음은 사실 거의 들지 않네.

오히려 이로써 거의 확실해진 게 하나 있다.

이번에 나타나는 게이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열린 직후 곧장 개방되는 거다.

사실상 대비할 시간이 거의 없어진 셈이다.

그야말로 게이트가 열린 순간 근처에 있다면, 그 자신이 각성자가 아닌 이상에야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이다.

“삼촌,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 지금으로선 아카데미를 빨리 열어서 최대한 많은 이들을 훈련시키는 게 최선이 아닐까?”

내가 가게를 닫고 본격적으로 구호 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전 세계의 모든 게이트를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진. 아무래도 나도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네스티를 재운 건지, 어느새 나와 화면을 보고 있던 라미야.

“사우디에?”

“응.”

“···괜찮겠어?”

라미야도 잃어버렸던 마력의 대부분을 회복하긴 했지만, 그녀는 엄밀하게 말해서 전투에서는 그리 강한 능력이 아니다.

물론 공간 조작이라는 특성을 잘 응용해서 1:1의 전투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상대가 다수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몬스터의 몸속에 있는 중요한 장기, 혹은 마석을 뽑아내거나 공간의 압축이나 팽창을 이용한 전투는 강력한 하나의 개체를 상대하는 거라면 모를까, 여럿을 동시에 상대하는 전투에는 불리하니까.

난 그걸 물어보는 거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든 솔직한 말로 내 관심 밖이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말.

“괜찮아. ···정 안되면 도움을 청할게. 그래도 될까?”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해 도울거다.

물론 지난 번처럼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보지 않아도, 이제 그런 짓은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제는 하고 싶어서 그럴 수도 없고.”

“그럼 네스티는?”

“당분간은 네가 돌봐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이럴 때는 네 옆이 제일 안전하잖아.”

라미야가 없이 혼자 네스티를 돌볼 수 있으려나 살짝 걱정되기도 하지만 라미야의 말대로 지금 네스티를 데리고 사우디로 가는 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마왕의 후신後身이든 아니든, 네스티는 아직 아이니까.

이건 그전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가 네스티가 이곳에 있는 며칠 사이에 깨달은 거다.

라미야의 말처럼 네스티는 그저 아이라고.

“그래. 이번에도 비행기를 타고 가나?”

“아니. 그러면 시간이 너무 걸리거든, 어차피 입국 절차는 밟았으니까 괜찮겠지.”

···나갈 땐 다시 출국 절차도 밟아야 하는 건데.

뭐, 큰 의미는 없으려나?

정부에서 알아도 아마 그러려니 할 테고.

“그럼, 조심해.”

“응.”

그 말과 함께 사라져버린 라미야.

확실히 저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하겠다.

혹시 나도 할 수 있으려나?

흐음···. 어쩌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언제 기회가 되면 요령이라도 물어봐야지.

“참, 이루 오빠는 간 일 잘 해결했나?”

“그러니까 저러고 사진이랑 찍었겠지. 근데 여긴 어디야? 무슨 절처럼 생겼네?”

“신사라고, 일본에 있는 신당 같은 거야.”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야스쿠니 신사만 아니면 됐지.

설마, 녀석도 머리가 있으면 한국인 여자친구를 데리고 설마 그런 장소를 가진 않았을 테고.

“아, 삼촌. 뉴스에서 이루 오빠 이야기도 나와요.”

[일본도 얼마 전 큰 위기를 넘겼었죠. 이제는 한국인이 된 전前 일본인 김이루씨가 다급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덕인데요. 김이루씨는 큐슈 지방에 나타난 수백에 가까운 몬스터를 단신으로 3시간 만에 모두 처리했다며···.]

이번에는 잘 넘겼지만, 다음에는?

또 그다음에는?

아마도 게이트가 나타나는 속도는 점점 늘어나게 될 거다.

만약 예전과 비슷한 속도로 게이트가 나타나고, 그 모든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어쩌면 인간의 문명이 수십 년, 혹은 수백을 퇴보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그저 서둘러야지하는 마음만 가져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게 됐다.

* * *

새해 인사라.

안정민과 신주희가 집으로 찾아왔다.

명목은 새해 인사.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떡꾹! 마싯따!”

어린이용 포크숟가락을 양손에 단단히 거머쥔 채로 턱받이에 국물을 잔뜩 묻힌 네스티만 빼고.

“시연아, 네스티 좀 잠시만···.”

“네. 말씀 나누세요. 네스티는 누나랑 갈까?”

읏차-.

아이를 안아 드는 시연이를 흐뭇하게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말해봐.”

“아무래도 아카데미 개교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기밀 사항이긴 하지만 새벽에 전라남도 한 야산에서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아직 몬스터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주변 새벽부터 주민들을 대피시키느라 한바탕 소란이 있었으니, 기자들이 금세 눈치채고 달려들 겁니다.”

“새해 첫날부터··· 군인들도 고생이 많겠어.”

“네···. 다행하게도 게이트 등급의 수치가 낮은 편이긴 하지만, 당장 몬스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미연이는?”

“아마 지금쯤 가고 계실 겁니다.”

“다들 고생이네.”

“그래도 우리나라엔 이미연 선생님이나 이진 선생님이 계셔서 최악의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습니다만···.”

아침부터 뉴스를 봤으니 뒤에 이어질 말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다른 나라들에서 아마 난리가 났겠지.

“그래서, 언제부터 시작할 생각이야. 준비는 다 마쳤고?”

“네! 사실 이미 시설 대부분은 완성단계였고, 편의 시설만 조금 보강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그건 됐고.”

“네,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뭐 있나.

“위탁 교육을 신청한 국가에 전부 전달해. 내일···. 아니, 오늘 당장 교육생들 한국으로 보내라고.”

“지, 지금 당장 말입니까? 하지만 아직 교육을 담당하기로 한 김이루 선생님이 일본에···.”

“일본에서도 교육생이 오지 않나?”

“물론 옵니다. 한국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나라죠.”

헌터 아카데미의 건물이나 교육장은 일반적인 것들과 다르다.

마석을 이용해 강화한 건설재를 이용해야 해서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고, 일본은 가장 많은 교육생을 맡기는 대신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떠안았다.

“그럼 교육생들 올 때 같이 돌아오면 되겠네.”

집에 들를 필요도 없어, 곧장 대마도로 가면 되겠지.

“···알겠습니다. 바로 공문 띄우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반기부터는 이능력 교육도 진행할 수 있을 거야. ···보낼 사람들 미리미리 뽑아두라고 알려둬.”

“하지만 교육은 누가···. 설마, 선생님이 직접···!”

“아, 그건 아니고.”

그 녀석 장단에 어울리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있나.

헌터 연합인지 뭔지에 가입하고, 하밀 녀석을 데려와야지.

신체 강화 능력자 다음으로 많은 게 바로 이능력 계열인 마법사.

그리고 내가 알기에 하밀 녀석만큼 마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다.

아마 오지 않겠다고 하진 않겠지.

어쩌면 그 녀석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뭐, 아주 조금이라면 어울려줘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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