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79화.
오늘은 상당히 바쁜 날이다.
연말이라 테이블 4개가 모두 예약이 가득 차서도 그렇지만, 특별한 날인만큼 그에 어울리는 메뉴를 준비하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더니 일손이 부족했다.
도진이도 있고, 덕윤이도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장사를 시작한 뒤라면 모를까 그전에는 그리 크게 쓸모가 있지는 않다.
게다가 지금 이루가 자리를 비운 상태긴 하지만, 도진이는 아침 훈련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덕윤이까지 챙겨가며 진심으로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대견하기도 하다.
그 덕인지 도진이도 덕윤이를 조금은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 같고.
그런데 문제는 그 두 사람이 오전에 훈련하는 것과는 별개로 요리에는 소질이 없다는 점이다.
결국 간단한 재료 손질을 제외한 대부분 요리는 직접 해야 하는데, 평소처럼 메인 메뉴를 하나만 준비하는 날이라면 모를까.
오늘처럼 여러 가지 메뉴를 동시에 준비하려면 솔직한 말로 전속 주방장을 하나 들이고 싶은 기분마저 든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어 차린 식당인데, 주방장을 고용하면 의미가 퇴색되니 그럴 수도 없다.
뾱- 뾱-.
가게부터 주방이며 마당까지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이 요상한 울림.
이건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디자인으로 걸을 때마다 작은 불빛과 함께 소리가 나는 신발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나는 가게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그 신발의 주인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를 불렀다.
“···라미야.”
“응?”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야? 거기다 네스티까지 데리고서.”
“무슨 말이야. 여기 말고 내가 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건 또 그런가?
하기야 한국에 아는 사람이라곤 나뿐일 테니, 딱히 갈 곳이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지금 여기엔 네스티를 봐줄 사람이 없어. 주방은 위험하기도 하고···.”
사우디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지냈는지, 네스티는 장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주방에는 최대한 들어오지 못하게 막긴 했는데 막는다고 막아질 성격도 아닌 것 같고···.
“엄마, 엄마! 저 밖에서 아저씨 둘이 싸워!”
“네스티, 그건 싸우는 게 아니라 훈련이라고 하는 거야.”
“훈련? 훈련이 뭐야?”
“음··· 실제로 싸움이 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연습하는 거지.”
호오.
이건 살짝 의외인데.
라미야가 제대로 ‘엄마의 역할’을 잘 해낼 줄은 정말 몰랐다.
“네스티는 그런 거 필요 없는데.”
“그럼. 우리 네스티는 그런 훈련 없어도 잘 싸울 수 있지?”
“응!”
···취소다.
이제 겨우 5살이나 됨직한 아이한테 도대체 뭘 가르친 거냐.
“···휴우.”
라미야와 네스티의 육아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긴 것도 있긴 하지만 내가 육아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훈계할 정도의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차라리 다른 날이었다면 느긋하게 앉아 그간의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정말 그럴 시간이 없다.
고작 네 개뿐인 테이블의 예약이지만 오늘의 메뉴는 무려 만찬.
[오늘의 메뉴]
[연말 만찬]
-예약이 마감되었습니다.
순서대로 나오는 코스 요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만찬’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여러 가지 귀한 음식을 준비했다.
가볍게 호박죽으로 시작해 흑임자 소스에 버무린 우엉 샐러드와 전복 버터구이.
본격적으로는 데친 시금치를 곁들인 한우 모둠 구이가 제공된다.
밑반찬도 평소보다 특별한 것을 추가했다.
하나하나가 모두 미리 만들어둘 수가 없는 것들이라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는 하루다.
다른 일이라면 시연이나 시은이의 도움을 받아도 그만이지만, 솔직히 두 사람의 요리 실력을 아는 나로서는 심히 우려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고심 끝에 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식에 대한 이해도 잘하고 있고, 요리도 잘하면서 동시에 오늘 같은 날 딱히 약속이 없을 것 같은 사람.
슬슬 올 때가 되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로 젊은 여성이 도착했다.
그리고 라미야를 보고선 잠시 멈칫했다.
“···라미야 압둘? 당신이 왜 여기에···.”
“절 아나요?”
“모를리가 있나요. ‘공간의 지배자’라고 불리던 사람을···.”
그 말에 라미야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말투로 봐서는 마치 이전의 저를 알았던 사람 같네요.”
인터넷 따위를 통해 알아본 게 아니라, 그녀가 살던 시대를 직접 살아온 사람 같은 말투.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
“미연아, 왔어? 갑자기 도와달라고 했는데 와줘서 고마워.”
“아니··· 그보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한 눈빛.
“아아··· 라이먀는 나랑 같은 7명의 귀환자 중의 한 명이잖아. 이번에 헌터 아카데미 일 때문에 얼마 전에 한국에 들어왔어.”
“···그랬구나. 하긴.”
“와··· 그런데 이젠 완전히 옛날로 돌아갔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빠르게 변할 줄은 몰랐는데.”
“응? 아아··· 진짜 신기해. 각성한 지는 꽤 지났는데, 사실 그동안은 변화가 정말 느렸거든. 꼭 오빠를 만난 뒤로 급속도로 가속화가 된 느낌이랄까?”
두 사람의 대화에 라미야가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만, 옛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예전 각성자였어요?”
“네. 아마 제가 라미야 씨보다 한 살 많을걸요?”
라미야야 외국인인데다 공주 신분이라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뭔가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이게 흔히 말하는 여자들의 기 싸움이라는 건가 싶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는데.
“엄마, 결국 큰 아저씨가 이겼어!”
뾱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 문턱을 들어오는 네스티의 목소리에 다시 분위기가 반전됐다.
“아빠, 아빠 제자가 져써! 아빠 제자 약한가 봐. 헤헤-.”
분명 해맑게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인데, 가게 안이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덕윤이가 지는 거야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어째선지 화가 나네.
“···아, 아빠? ···설마 두 사람이···.”
미연의 눈에 비친 건 놀람이 아니라, 실망감이었다.
네스티에 대해 알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두에게는 네스티가 왜 날 아빠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해줬고, 다들 어느 정도는 납득을 하는 상태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물리적(?)으로 당연히 내가 아빠가 될 수도 없으니 설득이 그리 어렵진 않았었다.
솔직히 다른 시은이나 시연이를 제외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해도 별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러니까, 저 아이가··· 게이트 안에서 나온 존재란 거야?”
“맞아. 지금 생각하면 그건 게이트가 아닌 다른 뭔가였을 것 같긴 하지만.”
“잠깐, 나 잠깐만 정리 좀···.”
미연이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고선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대고선 잠시 말이 없었다.
황당한 소리겠지, 솔직히 이런 세상이 오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그냥 미친놈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될 이야기다.
“···진, 네스티에 대해 이렇게 아무에게나 말해줘도 되는 거야?”
라미야는 라미야대로 불만이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이 발칵 뒤집힐 만한 비밀.
“당연히 아무에게나 말해주는 게 아니야. 미연이는 어쩌면 우리 7명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야. 게다가 마력장 왜곡 능력은 그 중요성에 대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라면 알 텐데?”
“···칫.”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네스티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을 들은 사람 중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가장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는 시연이나 시은이조차 그 능력만으로 따지고 들어도 그 정도의 정보를 공유받기에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나니까.
게다가 게이트의 개방을 강제로 늦추는 게 가능한 마력장 왜곡 능력.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지금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어쩌면 미연이가 가진 힘일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이 없길 바라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일단 오빠 아이가 아니라는 건 믿을게.”
한참을 고민하고선 일단이라니.
뭔가 아쉽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일 거다.
뾱-뾱뾱-.
그렇게 돌아다니고도 아직도 에너지가 넘치는 건지, 쉬지도 않는다.
아직은 상체에 비해 다리가 짤막한 신체 비율이건만 걷는 게 다른 아이들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귀엽긴 귀엽다.”
“당연하죠. 누구 아들인데.”
아니. 지금까지 힘들게 설명한 걸 물거품으로 만드는 소리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라미야의 도발 아닌 도발이 미연에겐 별로 먹혀들지 않는다면 다행이랄까.
“참, 진이 오빠. 오늘 뭘 도와달라고 했지?”
비슷한 나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70년 이상을 살아온 미연과 몇 달 만에 돌아오니 얼결에 30살을 먹은 사람의 차이랄까.
이런 게 연륜이구나 싶다.
“그럼 우선 우엉이랑 감자전 할 감자 좀 다듬어 줄래?”
“감자전은 갈아서? 아니면 채로?”
“가는 것도 좋은데, 오늘은 그냥 감자채전으로 할까 봐.”
확실히 미연이는 한식에 대해 잘 안다.
남자, 여자를 떠나 한식만 70년을 넘게 먹고 살아왔는데 모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그나마 내 주위에서 요리에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마 미연이지 않을까?
“그럼 굳이 갈아두진 않아도 되겠다. 할 때 맛살 같은 거 찢어서 넣어도 엄청 맛있는데.”
“그래?”
“요즘은 맛살도 종류가 많아서, 비싸긴 해도 부드러운 걸로 넣으면 아무래도 더 맛이 좋지.”
흐음.
감자전에 맛살을 추가한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다.
사실 꽤 맛있을 것 같다.
“덕윤아!”
“네!”
내가 부르자마자 득달같이 들어온 녀석의 이마엔 땀이 몽글몽글했다.
둘에게는 크리스마스 때 벌려놓은 뒤로 아직 제대로 치우지 못했던 마당의 정리를 부탁했는데,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각성자가 그깟 마당 정리 좀 하면서 땀을 흘릴 이유는 없으니까.
아까 승부가 났을 텐데도 성에 차지 않은 건지.
“편의점 가서 맛살 좀 사 올래?”
“맛살이요? 네! 얼마나 사 올까요?”
흠.
얼마나 넣어야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미연이를 쳐다봤고.
“큰 걸로 두 개면 충분해.”
“큰 걸로 두 개!”
미연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서 전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생각해 보니 가게를 연 뒤로 누가 나 대신 음식을 만드는 데 큰 결정을 한 적은 처음이라서.”
“···그래?”
그 말에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줍게 고개를 숙인다.
전에는 저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30년이란 세월이면 사람이 변하기에도 충분히 긴 시간이긴 하다.
어쩌면 그녀는 예전의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 * *
테이블 하나에 놓인 의자는 4개가 전부였지만, 사실상 지금 가게 안에 있는 손님들은 굳이 테이블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4개 테이블을 전부 모아 거대한 테이블을 만들고선 모두가 어울렸다.
처음에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반대하는 사람 없어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모양이다.
가게 주인인 내 허락도 없이···.
음식을 가지고 나왔더니 이미 명절에 모인 대가족처럼 둘러 앉은 마당이라 다시 돌릴 수도 없고.
“사장님도 이리 오세요!”
“저는 주방을 봐야 해서···.”
“에이- 천천히 하시면 되죠. 어차피 술 드셔도 취하지도 않으시잖아요.”
“그래요. 오세요!”
솔직히 완강히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뭐···.
굳이?
자기 수저와 술잔만 들고서 모두가 섞여들었다.
예령이는 왜 저기서 인테리어 업체 아저씨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지 모르겠고, 시연이는 도진이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정작 시은이는···.
“삼촌, 감자전 어디 있어요? 나 더 먹을래!”
주방에서 감자전을 굽겠다며 들어간 상태.
누가 보면 정말 개판이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상태이긴 하다.
“아아! 시작한다!”
누구의 외침이었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선 티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10! 9!···.]
리포터의 목소리를 이어, 모두가 함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8, 7···.
살면서 50번도 넘게 맞이했던 이 순간이.
오늘은 굉장히 특별하게 다가온다.
육!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숫자를 외치는 순간.
시연이와 시은이가 양쪽에서 내 팔을 붙잡고 날 쳐다봤다.
“삼촌이 있어서 올해는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아요.”
“나도, 나도! 진짜로 좋아!”
사람들이 숫자를 외치는 시끄러움 속에서 유난히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들렸다.
삼!
올해의 마지막이 흘러가는 이 순간.
내 옆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게 어쩌면 돌아온 나에게 있어선 가장 커다란 보상이 아닐까.
“삼촌도 너희들이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히힛-.
낯 부끄러운 말에 시은이가 몸을 꼰다.
일-!
아마도 전국에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숫자를 외치고 잇을 이 순간.
나는 두 사람을 보고 처음으로 즐거운 새해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 다 새해 복···!”
“앗싸-! 나도 이제 술 마실 수 있다아아아!”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시은이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예령이와 잔을 마주 들었다.
시연이가 그런 시은이를 보면 고개를 젓고선.
“···삼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마워, 시연이도 복 많이 받아.”
호기롭게 잔을 들이킨 시은이와 예령이의 입에서 소주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며, 나는 시연이와 함께 조용히 새해 인사를 건넸다.
지금 이곳에 이루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작은 아쉬움을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하게도 평화로운 하루였다.
오직 이곳에서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