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 식당 78화.
통··· 통···.
느릿느릿하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도마 소리.
“···좀 더 빨리는 안 되겠어?”
“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건 처음이라···.”
아무리 요리를 안 해봤다곤 하지만, 이건 꼭 평생 식칼 한 번 안 잡아본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남자라고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게 아닐 텐데.
“넌 무슨 7대 독자라도 되는 거냐?”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됐으니까 나와봐.”
요리를 가르치는 건 아무래도 조금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7대 독자면 군대도 안 가지 않나? 자원이라도 한 걸까?
“시연아, 이 녀석한테 서빙 보는 거랑 포스기 다루는 법 좀 알려줄래?”
“···제가요?”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조금 경계하는 느낌이다.
뭐, 일단은 빌런이라고 불리는 강력 범죄자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짧은 시간에 나눈 몇 마디 말만으로도 어느 정도 느낌이 온다.
유순하면서도 순진한 성격.
아마 살면서 큰 풍파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런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가지는 특유의 온화함이랄까 잔잔함이랄까.
“지금 가르쳐 줄 사람이 시연이뿐이네, 부탁할게.”
“뭐, 어쩔 수 없죠. 이쪽으로 따라와요.”
찬 바람이 쌩하고 볼 정도로 차가운 말투.
두 사람이 친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포스기 앞에 자리 잡은 시연이 시범을 보여주는 걸 보면서 나는 도마에 무를 올렸다.
가을에 나온 무는 달큰한 맛이 좋아 얼큰한 국밥에 넣기에 제격이지.
무 하나를 도톰하게 썰어 준비해두고, 이번엔 물에 불려둔 우거지를 집어 들었다.
식감을 더해줄 우거지도 무와 비슷한 크기로 썰고.
대파는 잔뜩 준비했다.
저녁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지만, 소고기를 넣고 푹 우려야 제맛이 나오는 음식이니 지금부터 끓여도 빠른 것은 아니다.
가게에서 가장 커다란 냄비를 가지고 와서는 참기름을 둘렀다.
냄비가 달궈지자마자 썰어둔 소고기를 듬뿍.
치이이익-.
고기가 바닥에 들러붙지 않도록 재빠르게 겉을 익혀주자 어느새 흘러나온 육즙이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다시 썰어둔 무를 넣고 볶았다.
고운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을 넣고 볶으면 무에서 나온 채수와 육즙이 섞이며 고추기름이 되어간다.
무가 반쯤 익기 시작할 즈음.
육수를 듬뿍 붓고선 불을 최대한 키웠다.
기본 준비는 사실상 끝.
어느 정도 끓기 시작하면 액젓과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소쿠리 한가득 썰어둔 대파를 넣어 익히면 된다.
뚝딱뚝딱 준비하고 있는데, 밖에서 살짝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입가에 슬며시 퍼지는 미소.
“삼초온!”
언제나처럼 나를 부르는 목소리인데도, 오늘은 감정이 조금 격앙된 느낌.
가게로 들어선 시은이가 주방에서 나오는 날 보더니 달려와 품에 쏙 안겼다.
도진이는 조금 뻘쭘한 얼굴로 입구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고.
나는 시은이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히잉··· 미안해요. 삼촌···.”
“괜찮아. 이미 다 지난 일인데, 뭘.”
“괜히 나 때문에···.”
아직도 자책을 하는 건가.
나는 시은이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냈다.
눈가가 붉어진 시은과 눈을 마주하고.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절대 그런 생각하지 마.”
“그래도 제가 거기 가는 바람에 도진 오빠가 죽을 뻔한데다 삼촌도 위험했고···. 또···.”
이유를 찾으려면 끝도 없다.
하지만 게이트가 거기에 생긴 것도, 하필이면 개방형이 된 것도.
시은이의 잘못은 아니다.
“뉴스도 안 봤어? 지금 그런 게이트가 엄청나게 생겼잖아. 그럼 그게 전부 네 탓이라고 할 거야?”
“그건 아니지만···.”
“너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필 그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것뿐이야. 그러니 그렇게 생각할 필요 하나도 없어. 알겠지?”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은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뒤, 가게 입구에서 멀뚱하게 서 있는 도진이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는 녀석.
“넌 왜 그러고 서 있어? 여기 네 집 아냐? 자기 집에 와서 무슨 손님이라도 된 것처럼 그러고 있어. 가서 짐 정리나 하고 내려와. 가게 열 준비 해야지.”
“네? 아···. 네!”
잘했느니 못했느니.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다.
조금 전 시은이에게 해준 말은 도진이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우린 그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뿐이다.
* * *
보글보글.
끓어오른 뒤, 불을 줄여 푹 우려내고 있는 냄비에서 나는 소리를 배경으로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시연이는 포스기 작동법만 알려주고선 다시 학원으로 향했다.
가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넷.
시은이와 도진이가 이젠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의 옆에 앉았고, 맞은 편에는 내가 덕윤이를 데리고 앉았다.
“자, 여기는 강덕윤. 오늘부터 가게에서 일할 새 직원이다. 나이는 이제 23살이 된다고 했지?”
“네, 사장님!”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된다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군대에 있을 때 버릇이 안 빠져서 말입니다.”
어째, 도진이가 처음 왔을 때랑은 조금 다른데.
도진이도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 군기가 조금 있긴 했지만, 말년 병장에 가까워서 그런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마도 특별 수감동에서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낸 게 아닌가 싶을 뿐.
“도진이보단 한 살 어리지?”
“네. 제가 이제 24살이 되니까요.”
“이루는 해가 바뀌고 일본에서 돌아온다고 하고, 아마 돌아오면 정신없이 바빠질 거다. 그래서 덕윤이를 데려온 거고.”
헌터 아카데미는 원래 계획대로면 3월에 열 생각이었다.
기본적으로 신체 조건이 뛰어난 각성자들이 교육 대상이라 겨울에 훈련을 진행한다고 해도 특별히 우려스러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날이 풀리고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안이한 생각이었다.
사실 지금 곧장 시작한다고 해도 결국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라는 것도 안다.
매일같이 나오는 뉴스를 보면 지금 각국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다.
미국이나 러시아, 독일은 피해가 극히 적은 편이긴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유럽은 정말 심각했다.
여러 나라들이 옹기종기 모인 지역인데다 인구 밀도가 높아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사망자가 벌써 10만 명을 넘어섰다.
메를린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렸지만, 혼자의 힘으로 그 많은 국가를 커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체력적으로도 그렇지만, 분신술을 쓰는 것도 아니니 몸이 정말 10개가 되어도 부족할 지경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에 있는 하밀과 러시아에 있는 유리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는 정도.
물론 엄청난 대가를 받겠지.
그동안 헌터 연합회 가입이라는 것에 조금은 안이하게 생각하던 국가들이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연합의 가입에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테지만, 이렇다 할 각성자가 있지 않은 그들은 연합 가입국이 되기 위해 정말 엄청난 출혈을 감수했을 거다.
하밀 녀석도 이런 사태가 될 거라는 걸 예상하고 기자회견을 했을 테고.
아무튼 계산에는 도가 튼 녀석이니까.
“삼촌···. 당사자 앞에서 말하긴 그렇지만, 저는 싫어요.”
시은이의 표정은 테이블에 앉기 전부터 냉담 그 자체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장에서의 일을 시은이가 잊었을 리가 없으니까.
“이해해.”
“응? 무슨 소리야? 왜 반대해?”
“맞죠? 지난번 시장에서 상인들 공격했던 사람···.”
“···네. 저 맞습니다.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뭐?”
짧은 텀이 있긴 했지만, 도진이도 당시의 일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해하자마자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도진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이루가 확실히 잘 가르치긴 했네.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렇게까지 일취월장했다니.
“시은아, 도진이도 잠깐 진정해봐.”
“사장님! 절대 안 됩니다! 아니, 애초에 저런 범죄자가 어떻게 여기 있는 겁니까?”
화가 난다는 건 잘 안다.
덕윤이가 시은이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들과 일행이었고, 범죄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니까.
“나는 너희들이 잠시만 지켜봐 주면 어떨까 싶은데. 덕윤이가 분명 잘못한 건 맞지만, 그곳에 가기 전까지는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였고···. 원래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그래도··· 전 싫어요.”
나는 덕윤이에게 잠시 나가 있어 달라 말했다.
처음부터 당사자를 앉히는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시은아, 저번에 삼촌한테 했던 이야기 기억나? 각성한 범죄자들의 능력을 이용하자는 거 말이야.”
“···기억나요. 하지만!”
“정작 네가 낸 의견인데 피해자가 너였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거야? 그렇다면 그건 너무 편파적인 것 같은데.”
법이란 기준은 그렇게 상황에 따라 잣대가 달라지면 안 된다.
“네가 피해자가 아니라면 괜찮은 거야?”
“···삼촌, 미워요.”
이게 감수성이 떨어지는 말이라는 건 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도, 정작 자신의 문제가 되면 전혀 달라지는 게 사람이니까.
“딱 일주일만 지켜보자. 덕윤이는 심성이 나쁜 애는 아니야. 만약 일주일 동안 너희가 겪어보고도 반대한다면 나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을게.”
“···알겠어요. 오빠는 어때?”
물으나 마나, 도진이는 지금 내가 없었다면 당장이라도 덕윤이를 땅바닥에 꽂아버려도 시원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알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전 일주일 뒤에도 똑같을 겁니다. 감히 우리 시은이를···.”
‘우리’ 시은이라···.
기분이 묘하지만, 시은이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고 했던 녀석이다.
아니, 실제로 바쳤었지.
지금 나에게 도진이의 마음을 막을 이유는 없다.
저렇게 아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은이는 커다란 복을 받은 것과 같은 셈이니.
“그건 일주일 뒤에 보면 알겠지. 그리고, 시은아.”
“네?”
“이건 네가 낸 의견의 시범 케이스같은 거야. 알지? 만약 삼촌이 실패하면 ‘감독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
“치이-. 삼촌, 치사해.”
사실 이건 그냥 한 말이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아마 내가 본 덕윤이라면 두 사람의 생각을 분명 바꿔놓을 수 있을거라고 믿으니까.
* * *
3일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음식 하랴. 덕윤이 가르치랴.
여기서 가르친다는 건 단순히 요리나 가게 일을 가르치는 것도 있지만.
사실 다른 부분이 가장 컸다.
내가 덕윤이를 데려온 건 그저 식당에서 포스기나 두드리게 하려고 한 이유는 아니니까.
딱-.
막대기로 덕윤의 한쪽 어깨를 살짝 내리쳤다.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이 틀어지면 정신도 틀어지는 법.
“지금은 바른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몇 번을 말해. 천천히 숨을 쉬는 것처럼 편안하게. 조급하게 굴다가는 버프가 아니라 오히려 너프가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네! 사장님.”
오전 7시.
한겨울인 탓에 아직도 새벽처럼 어둡지만, 나는 마당에서 덕윤을 교육 중이다.
오늘처럼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곳에 온 뒤, 덕윤의 일과는 오전 5시부터 시작한다.
가장 처음은 도진이 처음 했던 것과 같은 신체 단련으로 시작.
그리고 7시에 내가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마력 제어를 훈련한다.
덕윤이는 도진이처럼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없다.
버퍼의 역할은 각성자가 가진 능력의 한계치를 더욱 끌어올리는, 일종의 부스터다.
마력의 섬세한 조절이야 말로, 그 능력의 핵심이니까.
물론 기본적인 전투 능력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흔들-.
내 말에 덕윤이 가만히 숨을 몰아쉬면 정신을 집중하자, 꺼질뻔 했던 불길이 조금씩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확실히, 이 녀석도 재능은 있다.
지금 하는 훈련은 차디찬 겨울바람이 부는 마당에 놓인 촛불을 꺼지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
단순히 마력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거나 하는 훈련이 아니다.
바람 앞에서 위태로운 촛불을 마력으로 강화하는 거다.
꺼지지 않도록 유지하면서도 심지가 타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지금은 고작 3개지만, 앞으론 차차 개수를 늘려야 겠지.
10개, 20개··· 그리고 언젠가는 수백 개가 될 때까지.
게이트에 들어가는 인원은 보통 10명 남짓.
각자의 능력에 따라 최대 입장 인원수가 달라지긴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20명 이상은 넘지 않는다.
그러니 더 이상 숫자를 늘려도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비록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지금 생겨나고 있는 게이트는 우리가 들어가는 게 아니다.
수백 대 수백의 전투가 벌어지게 될 수도 있다.
그것도 우리 삶의 터전이 되는 이 곳에에서.
우리는 이제 게이트에 들어가 벌일 전투가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벌어질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